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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1 :: 요한복음 1장 8절 말씀묵상
- 2021.09.20 :: 요한복음 1장 7절 말씀묵상
- 2021.09.19 :: 요한복음 1장 6절 말씀묵상
- 2021.09.18 ::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묵상
- 2021.09.16 ::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묵상
- 2021.09.14 ::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 묵상
- 2021.09.13 :: 요한복음 1장 2절 말씀 묵상
- 2021.09.12 ::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묵상
- 2020.11.22 :: 로마서 1장 12절 말씀 묵상 1
요한복음 1장 9절 말씀묵상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빛으로 소개하는 것은 어둠에 대한 필요였으며, 그리스도는 어둠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참의 뜻은 진짜의, 실제의, 정당한, 신뢰 할 수 있는...등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가짜의, 신뢰하지 못할 모양만 빛인 가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전까지의 각 사람을 비추었던 모양만 그럴듯한 거짓 빛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 빛은 일반적인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이들은 빛을 마땅히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셨는데도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빛은 영적인 빛의 모형일 뿐이다.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빛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을 통해서 유형적으로 영적인 빛을 생각해 볼 수 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부정적인 상황을 통해서 어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안목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상황 가운데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적인 문제의 근원에는 영적인 어둠의 문제가 있다.
근원적인 접근이 없는 육의 문제만을 위한 빛이라면 그것은 참 빛이 아니며, 신뢰할 수 없는 빛이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전에 사람들이 육의 문제만을 위한 거짓 빛에 미혹되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는 많은 영역들에서 육적인 문제만을 위한 활동들이 활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단지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때 유행하였던 비지니스 차원의 실용주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교회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그 큰 교회들은 사실상 거의 다 실패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들은 참 빛이 아닌 세상의 거짓 빛을 따랐던 이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실용주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교회가 실용주의적이 되었는데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교회는 많은데 나아갈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가 참 빛이 아닌 빛의 모양을 한 거짓 것, 즉 영적인 어둠이 아니라 육적인 어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외형적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참 교회인 신자라 할지라도 넘어서기 힘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 신자라하더라도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서 참 빛보다는 세상의 거짓 빛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자는 이를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
인생은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한다.
이에는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구가 있다.
성, 명예, 권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것들이지만, 꼭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오신 것은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오시지 않으셨다.
다윗은 자신의 성공 뒤에 숨겨있던 어둠의 문제를 안고서 고통스럽게 씨름을 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신의 성공을 통해서 이방 여인들과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세상의 거짓 빛을 따라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나그네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광과 부는 세상의 거짓 빛이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시 영광과 부라는 거짓 빛을 제공해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 후에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세상의 거짓 빛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신자들은 성공이라는 거짓 빛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이것을 쫓아갈 때 교회는 거짓 빛을 추구하는 변질된 곳이 되어버린다.
예전에 어떤 목사는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자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부추겼다.
수 많은 젊은 이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였지만, 그는 결국 성추행 목사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의 성공을 향한 수 많은 설교들은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이었던 것이다.
어둠 가운데 만나는 참 빛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아무리 성공을 추구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로서는 내면 세계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실패도 절망적이지만, 영광과 부의 끝도 타락과 절망뿐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인 죄성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근원적인 어둠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의 참 빛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꼭대기에서나, 혹은 성공을 추구하는데서는, 참 빛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해방되어, 자신들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육적인 시오니즘 때문이다.
인생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시기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이다.
인생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자신에게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도 없고,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명예와 자랑은 다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참 빛에 대하여 반응하게된다.
이는 빛을 알고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영적으로는 가장 희망적인 상황이다.
실패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 경험하는 빛은 인생에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준다.
더 이상은 거짓 빛을 추구하려하지 않게된다.
이 때에야 비로소 거듭난 자로서 참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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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8절 말씀묵상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직분의 자리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 뿐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하는 직분을 받았지만,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요한은 처음 아담과는 달리 빛에 대한 증거를 하면서 빛과 같이 높아지려고하지 않았다.
그가 이 빛이 아니라는 요한에 대한 소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리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높아지려던 자는 사탄이었다.
일단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종이기에, 사탄과 마찬가지로 기회만 있으면 높아지려고한다.
이러한 높아지려는 본능은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있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사탄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빛과 같이 높아지고자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점에서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이는 아담의 범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큰 일을 하면서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지만 요한은 그런 일이 없었다.
모세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계를 받았다(민 20:1-2).
반석을 치는 일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이는 빛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심각한 손상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존재론적으로는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철저하게 빛의 증인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높아짐의 피동성
인간이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성에 속해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높아지고자하는 이들의 싸움이 주도하였다.
섬기고 사랑하고 낮아지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의지로는 높아지고자하는 본성의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
인간은 생존경쟁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높아져야만 한다.
마치 기술 경쟁 사회에서 낙후된 기술은 도태되는 것과 같이 경쟁력을 상실한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경쟁력은 높아짐을 수반한다.
기업에서의 생존력은 기업 가치의 높아짐에 달려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교회에 적용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목회와 생존 경쟁
조그마한 교회에서는 높아짐이나 교만의 문제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조그마한 교회는 생존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커지려고한다.
하지만 조그마한 교회도 커지게되면 그만큼 목회자에게서도 교만해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교만해진 목회자는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 말씀을 사용한다.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께 세례받으러 가는 이들에 대하여 자신이 쇠하여야할 것을 말하였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그리스도의 빛을 약화시켜서라도 자신이 흥하고자 말씀 선포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포장한다.
큰 교회 목회자들은 교회 크기에 걸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서 말씀의 빛을 약화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이에 대하여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확장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십일조에 대한 강조, 교회에서의 충성 봉사. 주의 종을 섬기는 것등을 강조하는 교회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도 예수님과 같이 사단의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확장시킨 교회의 꼭대기에서 높아진 모습을 자랑하게끔 사탄의 시험을 받을 수있다.
기억 속에 오래전에 잠깐 다니던 아파트 상가의 개척교회에서 참으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목회자가 뵌 일이 있었다.
어느덧 그 목회자는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지만, 그 교회의 재정담당 장로는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의 비리를 숨기고자 무리하게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목회세습을 강행하면서 사회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이 되었다.
처음의 순수하고 좋았던 이미지는 어느덧 숭배받는 교만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어느 순간에 그렇게 변질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회자도 범죄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교인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며 주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는 목회자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뱀에게 유혹받은 아담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즐거움보다는 교인들의 숭배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또한 아담을 유혹했던 뱀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빛이 되려고하지 않고 빛을 증거하는 요한은 그리스도께 큰 자라 칭함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서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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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7절 말씀묵상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증언에 준비되어진 이스라엘 공동체
요한의 증언은 구속을 위한 은혜로의 초대였다.
요한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언약의 표현이었다.
요한의 증언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담겨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으며, 그 다음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세번째로 말씀하신다.
에덴에서의 창조언약이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언약이었다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으로 인도하기 위한 행위언약의 재연이었다.
이제 요한을 통하여 선포되는 믿음으로의 초대는 은혜언약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에덴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을 위해 행위가 요구되는 행위언약의 말씀이었다.
범죄 이전의 에덴에서와는 달리, 죄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에 임하셨던 하나님은, 시내산에서의 권위와 위엄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위엄과 권위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초라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요한을 통하여 온유하게 말씀하신다.
요한의 증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것이며,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 되어진 은혜언약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환란 가운데 좌절하고 낙망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더 이상의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오랜 환란을 통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자격과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실패와 좌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요한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져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에 대한 신뢰가 전제가 되어야했다.
그의 증언이 신뢰할만하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행할 능력이 없었다.
요한은 오직 외침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이 어떠한 실패자인지를 알고있었기에, 요한의 외침에 대하여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한을 예비하시고 요한의 외침이 효과가 있도록 준비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벨론 포로, 400여년의 침묵하심, 로마의 압제등은 은혜를 베푸시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신 환경이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음문을 열 수 있기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다리셨다.
믿음으로의 초대
요한의 빛에 대한 증언은 예수를 믿게하려는 것이었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도덕적인 행함의 문제 이전에 자기 의에 대한 것이었다.
요한의 믿음에 대한 증언은, 그가 외쳤던 회개가 범죄에 대한 것 이전에 스스로의 행위를 통한 의를 추구하려는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예수는 자기 의를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행동방식을 보여주는 따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불행히도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예수가 세상을 대변해주는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여야하는지 또 하나의 행동 방식을 보여준 혁명적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속이는 자의 속삭임일 뿐이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시간들
이스라엘에 대한 침묵하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현 시대는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의 계시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고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마음껏 써 버리듯이 현대인들은 마음껏 삶을 즐기고있다.
하지만 집을 나간 탕자의 종말과 같이 현대인들은 막다른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막다른 길로 향하고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지구온난화, 핵무기, 플라스틱 공해, 미세먼지, 기상재해...등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재난들에 직면해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이전에 스스로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가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요한의 외침에 순응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종말의 재앙 앞에서 현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하심에 대하여 아무 항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기다리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기다리신다.
세계 제1,2차 대전은 과학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인간 욕심의 결과물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욕심에 이끌리는 전쟁의 역사였지만, 핵이라는 무기로 인해서 제한되어진 욕망의 표현은 과학 기술과 산업의 극대화로 방향이 전환되었을 뿐,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어들지가 않았다.
현대인들은 마치 폭풍 전야와같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재앙의 문턱에서 살고있다.
인류는 스스로 만든 재앙에 내어버려진 자들이다.
요한의 외침과 같은 회개의 외침들은 구원의 소리들이다.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세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같이, 더 늦기 전에 요한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최후의 심판을 준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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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신구약 중간기의 종료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오랜 침묵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400여년의 계시의 공백은 더 큰 일을 위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길 원했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상태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어 버리신 백성과 같았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초라하기만 하였다.
그나마 초라한 성전은 온갖 모욕을 겪어야만 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성전에서 돼지고기로 제물로 바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기도하였다.
이는 결국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된 동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수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지속되었다.
격동의 시기에 침묵하신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을 버리신 모습같이 보였지만 이는 어둠의 땅에 이르시는 빛을 위한 시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준비하시는 시간이었다.
보냄받은 요한과 하나님의 주권
요한의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은 요한의 역할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사신을 보낼 때 사신의 권위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낸 왕에게서 나온다.
사신에 대한 도전이나 사신을 해하는 것은 그 보낸 왕과 그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요한을 죽인 헤롯왕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께 찾을 수 있다
처음 왕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권위가 주어진 것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보냄받은 사신이 자신을 보낸 왕을 배신하는 행위와 같았다.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다시 보내신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되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에서의 요한의 역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처음 창조 때와는 달리 잃어버린 왕국의 회복에 있었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지만 요한은 이제 현실적인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구분된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라는 잃어버린 이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원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상대하지 않으셨으며, 여인이 더욱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4, 26)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거절한 사건은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꺽이는 사건이었다.
이방인인 우리 신자들은 꺽이운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성도의 자세
가끔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을 하다보면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된다.
들을 준비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종종 깊은 죄절에 빠지게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내어버리시지는 않으신다.
침묵의 시간은 자신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시간이다.
우리가 느끼고 알지 못할 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내어버려 두시지는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가 약속의 이삭을 경험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약속하신 이삭에 대한 희망을 기다리지 못하고 86세에 이스마엘이라는 불신의 결과를 낳기도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오랜 침묵의 시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의 400년의 침묵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말씀 가운데 침묵하시는 2000여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 시간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온 시간임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침묵과 간섭하심
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관상기도나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려하지만 이는 인간적인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간섭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 대한 구속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400여년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성도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에 대한 침묵하심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은 어둠의 시기였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말씀이 주어진 빛의 시기를 살아가고있다.
말씀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을 원하는 성도의 간절함은 종종 여러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말하지만, 이는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다.
인간은 어둠 가운데 죄성에 길들여져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추구는 종종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된다.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예민한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에 대해서 민감할 필요가 있지만,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종종 오류를 범하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인간은 삶 가운데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에 대한 인식도 없는 경우가 많이있다.
하나님께 민감하는 것 이상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볼 때 더욱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게된다.
컴퓨터가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작동되듯이 인간은 어둠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동되는 본성을 가지고있다.
아직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하며, 이를 보편화시켜서는 안된다.
죄인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포장할 때 자신이 멋있어 보인다.
요한의 증거는 하나님의 보내심이라는 근거가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침을 포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도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많은 이들이 성경으로 자기의 정의감을 포장하기도하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근거로 정의를 외치고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상황에 대하여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원하고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사역에 간섭하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들은 치유사역을 자랑하기도하고, 여러가지 간증을 하기도하지만, 정작 이들이 증거하는 말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지 의문이 가기도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근거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자신을 증거하려하지 않았다.
오직 빛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성도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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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5절 말씀묵상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는 인간의 모습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번역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헬라어 katalambano는 ESV에서는 encompass로, NIV에서는 overcome으로 번역하고있다.
깨닫다라고 번역된 katalambano는 "붙잡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감당하다"라는 뜻이 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함의 주체로 표현되었지만 그 실상은 어둠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가 있다.
깨닫지 못함은 부족함의 문제라기보다는 능력과 상황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단순한 물리적 힘의 크기 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빛과 어둠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닌 영적인 실체이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인간들의 영적인 상태에 적용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빛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땅에 존재하지가 않는다.
빛이 어둠에 비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어둠 가운데 있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이 땅은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빛을 필요로하는 세상이었다.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문제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은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윤리 도덕 차원의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로 비명을 지르면서, 이 땅에 문제가 많다는것을 알면서도, 이 땅이 어떠한 성격의 어둠 가운데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문제 해결의 가장 올바른 접근 방식은 원인적 접근 방식이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면 근원적인 해결책이 없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는 문제는 계속 반복될 뿐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문제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선되어가는 것 같지만 문제의 총량은 늘어만 갈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으며, 인간이 바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둠의 세력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어둠을 쫓아간다.
빛이 비출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인간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갇혀 있는 인간은 빛이 낯설 뿐만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으며,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 빛은 인간적인 도덕의 기준에서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하는 빛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빛 가운데 노출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매일의 뉴스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로 도배되지만, 정작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부정적인 상황과 분리시키고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부정적인 상황들은 사실 부정적인 인간에게 가장 합당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상황을 탓하기 전에 왜 자신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가장 무서운 암은 통증없이 진행되는 암이다.
통증이 없기에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권세에 길여여졌더라도,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상황이 좋기만 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죄에 머물면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다.
빛으로 인도하기 위한 부정적 상황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정적인 상황들은 긍정이라는 반전의 필수 요소가 되기도한다.
어둠 가운데 길들여진 인간은 본성적으로는 빛으로 나올 수 없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빛으로 나올 수 밖에 없게된다
아무리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욕을 하고 비판을 한다 하여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상황이 다가오지 않으면 남의 일일 뿐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나서, 자신들의 정신적 모체였던 성전이 모독을 당하고, 로마의 압제라는 부정적 상황이 있었기에,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400여년은 하나님의 계시도, 예언의 말씀도 없던, 이스라엘에게는 깊은 암흑의 시대였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은 그만큼 빛으로 인도되기 위한 고난의 시간임을 생각해보면서 부정 속에 긍정을 보게된다.
사랑의 빛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과 더불어 오신 것이다.
빛을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희생적 사랑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만약에 자식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사람들에게 자식을 욕하면서 흉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기에 남을 해하는 온갖 비방과 다툼과 전쟁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육체적 본능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참된 사랑은 오직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있었을 성품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소유한 인간들 가운데서는 전쟁이 있을 수도 없으며, 어떠한 부정적인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적 기독교를 말하는 톰 라이트는 인간이 연습과 훈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떠한 연습과 훈련으로도 인간은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인간은 연습과 훈련으로 빛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타인을 사랑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기에 이러한 사랑의 빛을 타락한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빛의 출현-새로운 창조
그리스도의 탄생은 BC와 AD를 구분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원이 된다.
어둠은 빛의 반대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태초에 빛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빛의 부재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은 어둠의 혼돈 가운데 있는 세상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어둠은 빛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며, 싸움 자체가 안된다.
어둠은 빛을 원하지 않는다.
어둠은 그 자체가 사물이 아니듯 빛도 마찬가지이다.
어둠이 그 역할에 의미가 있듯이 빛도 그 역할에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빛은 처음 아담에서와 달리 영원한 구원을 약속한다.
처음 아담에게 영원한 안식의 나라는 조건적 약속이었지만, 빛 가운데 있는 둘째 아담의 후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무조건적으로 약속된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불순종으로 인한 더 이상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신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보장되어있다.
구속을 약속하는 빛
신약의 빛은 창조를 넘어선 구원과 결부된 계시다.
창세전의 혼돈 가운데있던 깊은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 아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들 가운데 있던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었다.
그리스도의 빛은 단순한 결핍의 보충이 아니라 순종하심을 통하여 얻은, 어둠을 이기는 능력이다
불순종한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하기에 어둠을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을 배척하고 구속을 약속해준다.
신자는 이제껏 자신을 지배했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힘입어, 어둠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둠은 빛을 감당할 수가 없다.
세상 철학자들의 결론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어도 그들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성을 집단성에서 찾았지만, 집단의 죄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 결과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함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는 소경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성경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탐구”라는 방식은 성경에 대한 또 다른 인간적인 해석을 하게된다.
슈바이처는 역사적예수탐구라는 방식을 통하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 않지만,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하면서, 윤리적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은 칭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둔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결합시킨 새관점을 도출해낸다.
새관점의 결론은에수는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게 어떠한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고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에게 에수는 따름의 대상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창조자로서의 빛도 아니었다.
슈바이처, 불트만, 케제만, 톰 라이트 모두 다 어둠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려했다.
말씀은 어둠 가운데서 올바로 해석될 수 없다.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오직 말씀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지만 제대로 해석될 수가 있다.
언약적 신율주의와 빛
빛은 구원을 위한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 땅은 빛이 비추이기 이전에 어느 곳도 어둠에 덮여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실 때 유대 땅은 아직 구원의 빛이 비쳐지지 않은, 구원을 기다리는 어두운 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유대 땅이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해서 연구해본 결과, 1세기 제2성전 유대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신율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담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최종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공로가 추가적으로 요구된다면 이는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짓는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은혜받은 인간에게 추가적인 공로가 요구된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원의 빛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빛은 희미하게 비치는 윤리적인 빛일 뿐이며 그 안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과학적인 접근방식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의하지 않고는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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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묵상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설명하신다(요 11:25)
여기서 소개하는 생명은 살아있는 육신과는 다른 영으로서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은 생명이 없는 주검일 뿐이다.
생명은 죽음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생명이 없었던 흑암 가운데 땅에서 취하여진 인간은 생명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서 사람이 생령이 되도록하셨다.
흙으로 지어진 처음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짐으로 생령, 즉 생명이 있는 영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은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되었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 처음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였기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흙으로 돌아간 사람에게 다시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도록하신다.
처음 아담 때와 달리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을 위한 것이다.
처음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이 보장되지 않았다.
처음 아담에게는 순종의 조건이 주어졌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다시 처음 창조에서의 생기와는 차원이 다른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작업을 하시게된 것이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부여받아 거듭난 신자는 다시 불순종 할 수가 없다.
신자의 생명은 신자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믿음 또한 자신에게서 출발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에 의한 선물이기에 신자는 구원하시는 생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종종 보이는 배교행위는 원래부터 모양만 신자였던 불신자가 자신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기에 새생명을 얻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상은 죽은 인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육적인 생명과 죽음은 매한가지일 뿐이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인간은 실상 죽은 자들이다.
좀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죽은 이들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좀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아담은 그 코에 불어 넣어진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생령, 즉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였지만 불순종함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바빙크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정녕 죽으리라한 약속이 은혜 가운데 실행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하고서도 은혜 가운데 수백년을 살아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한날 죽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의 삶은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육신만 살아있는 삶이었다.
생명과 죽음은 빛과 어둠으로 대비된다.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빛으로 어둠 가운데 오신 것은 죽은 자들, 즉 처음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의 후손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육으로 난 자들이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하고있다.
모든 인간은 육으로 난 자들이지 영으로 난 자들이 아니다.
영으로 난 자들만이살아있는 자들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둘째 아담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들에게 생명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패망 후에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하고나서야 스스로 죽은 자임을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이 준비되었기에 오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게서 솔로몬이나 다윗 시대에 오셨다면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인간 승리를 외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인간 승리라는 것은 없다.
인간적으로 승리한 자들, 성공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힘들 것이다.
여기서 부자는 물질을 풍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잘났다고 외치는 교만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공 뒤에 오는 좌절과 패배,절망의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이 열렸을 때 가까이 다가오신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신을 믿어온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교만에서 꺽여서 깊은 좌절감으로 낙망하여있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이 죽은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사라지고 내세울 명예와 권위가 없어졌을 때 비로서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자신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게 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 낙망의 시간, 우울의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시고자 손을 벌리시고 기다리시는 시간이다.
육신의 생각은 생명에 대하여 저항한다.
믿고 의지했던 육신이 죽음을 앞에 둘 때 육신의 교만에 의지하던 인생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깊은 좌절에 빠지게된다.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전제로하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명을 주시고자 말씀 가운데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신다.
사람들의 빛
여기서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어있고 육신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본래부터 빛 가운데 있었던 자들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오직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다가오신 것은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세계는 빛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빛을 경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고자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빛을 비추신다.
이 빛은 사람들로하여금 구원을 얻게해주는 계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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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절 말씀 묵상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점진적 인식
요한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방식을 취하고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에 대하여, 2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리고 이제 3절에서는 만물에 대하여 언급한다.
1,2,3절의 중심은 하나님이신 말씀이다.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하고있다.
만물은 이어서 서술되는 생명과 빛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이는 자신이 만든 만물 가운데 피조물의 형태로 다가오신다.
말씀이신 창조주는 창조물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이러한 점진적 접근법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선포되어지는 방법이기에, 이는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모르겠다고 핑계댈 수 없도록 만든다.
만물의 정체성
만물의 정체성은 만물을 만드신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된다.
만물은 정적이면서 동적인 역동성을 가지고있다.
만물의 질서있고 체계적인 움직임은 어느 하나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위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없다.
본래 말씀으로 지어진 만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으실 정도로 완전하였지만, 만물은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혼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원래 지어진 만물은 아름답지 않거나 혼란스러운 것은 없었다.
원래의 만물에는 지으신 이의 품격이 담겨있었다.
만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품격은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력과 빛으로 다가온다.
피조된 인간은 지어진 만물의 정점에 있다.
만물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이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인간은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려 하기보다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말씀 가운데 만남으로써 좀 더 근원적인 접근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만물의 역동성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만물의 창조주는 인정하면서도 그 분의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창조주는 인정하면서도 만물의 움직임은, 마치 감겨진 태엽에 의해서 시계가 움직이듯이, 만물은 더 이상 창조주의 간섭하심이 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이 전하는 복음에서는 창조주께서 만물 가운데 다가오셔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만물 가운데서 살아움직이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나타내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역동성을 전제로한다.
역동성이 없는 말씀은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은 존재이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은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신자가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은, 신자 스스로 살아있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은 지금도 역사하셔서 신자를 거듭나게 만든다.
역사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목적없는 움직임과 같아 보이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움직임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요한이 소개하는 만물을 지으신 분은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땅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하심이지만, 그 분의 성육신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한 가운데 오신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한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역사였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역동성이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의 간섭하심이 없는 곳은 없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설명될 수 있듯이 인류는 어둠 가운데있다.
그렇다고 어둠이 빛을 탓할 수는 없다.
어둠은 아담 안에서 인류가 선택한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어둠 가운데 전쟁과 시기와 질투와 온갖 더러운 일로 가득하지만,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한줄기 은혜로 인하여 이제까지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말씀에 반응하는 신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말씀 가운데 역사하셔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인간의 정체성
만물의 존재의 근원을 창조주에게서 찾을 수 있듯이, 인간의 존재의 근원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리스도께 주권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주권이 없다.
불순종한 인간은 사단에게 내어준바되었지만, 그 근원적인 소유권은 그리스도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그 뿌리를 알아야한다.
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해하는 일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만물이 완벽한 모습 가운데에서도 왜 부정적인 상황들이 생겨나는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살아가지만 왜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인간은 왜 그리스도께서 지으신 만물을 파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의 창조 방식에 반대이며, 인간의 부정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은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지만 이제 인간은 그 만물을 파괴하면서 피조된 인간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지구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들어가고있다.
빛이 사라진 완전한 어둠은 파멸로 결론이 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지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지으신 만물의 완전한 파멸을 막으시기 위해서 어둠을 쫓아내시고자 빛으로 다가오신다.
만물은 지어진 목적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를 다 구원하실 때 지어진 만물은 그 소명을 다할 것이다.
세상 만물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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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2절 말씀 묵상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1절에서는 1)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 2)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세가지 사실을 전하고있다.
2절은 3절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실을 좀 더 강조한다.
그(말씀이신 하나님)가 (다른 위격의)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강조한다.
2절에서의 함께 계심은 1절에서의 존재론적인 함께계심보다는 3절의 창조행위에서의 행하심의 행위론적인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또한 2절에서의 함께 계심은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중간 서술이다.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며 그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은 창세기를 기록한 당시 시대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서술된 것이다.
만약에 창세기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을 하였다면 아마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요한의 기록은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말씀은 신약의 기록에 의해서 비로소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된 것이다.
이는 구약만으로는 완성된 말씀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미완성의 종교일 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신자와 성경 말씀으로 함께하신다.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신자에게 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자가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요한복음1장 1-3절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비되어진 독자들을 위해서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 기록에 숨겨졌던 사실을 선포하고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말씀의 존재론적 위격을 나타내기도하지만, 창조라는 행위에 있어서 말씀이신 하나님은 제 3자가 아님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3절에서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창조주이심을 선포함으로서,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에 이미 태초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있다.
함께함과 권위
일을 행함에 있어서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그 함께하는 존재의 권위와 동일한 권위가 부여되기에 중요한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일을 하였어도 일을 하는 현장에 다른 사람이 같이 있었다면 공동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은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일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창조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은 창조 사역뿐만이 아니라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동일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효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에 근거한다.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신자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함께 계심은 신자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근거가된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은 신자에게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 아닌 안식을 주시는 기쁨과 위로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적 사역과 인간의 공동체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공동체성이 마땅히 어떠해야하는지 그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존재이기에 왜곡된 공동체적 특성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공동체는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유럽의 2천년 전쟁사를 보든, 어느 나라든 모든 인류의 전쟁사는 자신들의 공동체의 이익를 위한 것들이다.
타락한 인간의 행위의 동기는 자신의 이익이다.
공동체의 이익의 밑바닥에도 인간 개인의 이익이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는 함께하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생명을 짓밟기도한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하심에는 이익이 아닌 사랑이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함께 계심의 근거는 사랑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지은바 되었지만, 독사의 자식들이 된 인간의 삶의 원동력은 이익과 미움이다.
복음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통하여 이익이 아닌 사랑에 근거한 구속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자신의 이익을 쫓아가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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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묵상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이미 영원 가운데 계신 예수님
만물의 시작 이전에 이미 계신 분이신 예수님은 영원 가운데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며, 시간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시공간에 갇혀있지만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초월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육신적인 한계에서 출발되어서는 안되며,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어지는 분이 아니시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주어진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말씀을 육신적인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가두어 놓고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수 취하신 형태인 것이다.
피조물 가운데 언어는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언어를 소유할 수 인간은 존재의 근원을 말씀 안에서 찾아야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작정하심 가운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말씀을 통하여 인간 안에 담겨진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여야만한다.
죄악으로 일그러진 인간은 불순종을 속성으로 가지고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말씀을 가까이 할 수가 없다.
처음 아담에게는 순종의 요구라는 말씀이 주어졌지만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하였기에, 둘째 아담, 즉 말씀 안에서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은 말씀과 더불어 시작된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구원받은 거듭난 자로서 이 땅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해나가는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말씀 안에서만 해석되어지는 존재의 근거
창세 전에 오직 삼위하나님만 계셨음은 창조된 세계의 절대적 기준과 근거가 되신다.
만물의 가시적 존재는 존재의 시작과 존재의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은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적 선포라고 할 수있다.
인간이 만든 물건도 그 물건의 존재와 시작이 있으며 그 소유권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태초에 계신 말씀은 조물주이시며, 말씀은 피조 세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사고 능력의 한계는 어떻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사고에서 한계에 부딪히지만, 성경은 이 한계를 넘어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존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가시적 현상들은 빛으로 오신 말씀 가운데 해석되어질 때에만 제대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된 가시적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다.
인간사는 전쟁으로 얼룩져있고 인간의 삶은 부정적 상처 투성이일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세상사는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였던 이유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결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러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참된 해방은 오직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의 죽으심을 선지자의 죽음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직접 나타나시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설명해주셨다.
인간의 눈으로는 예수의 죽으심을 직접 목격했지만 해석이 없이는 그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고 계신다.
칸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분리되어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택하신 자에게 찾아오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말씀은 절망 속에 갇혀있는 인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참된 빛인 것이다.
성도와 함께하기 위한 말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근거를 제시해준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도 인간이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론에 또 다른 정의를 부여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던 인간의 세상은 암흑 자체였다.
극단적으로는 인간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하지만 이는 또 다른 암흑 세계를 만들어갈 뿐 해결책이 아니었다.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어떠한 인간적인 방법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일은 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해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에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신 것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혜인 것이다.
이제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의 아들됨이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제시되어진 하나님이신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초대하는 초대의 말씀이다.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초청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복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
요한복음의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의 첫 번째 구절과 대비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창세기와는 달리 말씀되신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신다.
창세기의 첫장이 에덴에서의 아담이 그 중심에 있다면 요한복음의 첫번째 장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신다.
창세기는 창조와 타락이 주제였다면 요한복음은 구속이 주제이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라는 관점에서 처음 아담의 타락과 둘째 아담의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대비적으로 묵상해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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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2절 말씀 묵상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관계성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바울과 로마의 성도를 연결시켜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만남을 통하여 힘을 얻는 것은 인간의 지음받은 속성으로 인한 필연적 요구이면서 동시에 결과이다.
불신자들 조차도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 힘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을 향하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 불신자들과 다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방인을 만나서 그들 가운데 믿음의 열매를 보고서 힘을 얻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면서 동시에 당연한 결과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가 서로 안위함을 얻는 것은 바울과 로마의 성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가 피차 안위함을 얻는 것은 서로의 인간적인 만남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나 혹은 인간적인 파워의 증가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안식과 위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앞두고 시작된 박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인간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 힘을 키우기 위해서 당을 지으려고 하지만, 바울이 로마의 성도를 만나서 안위함을 얻고자하는 것은 당을 지어 인간적인 세력을 키우고자하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이방인이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가 격려를 받고 힘을 얻는 것은 인류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처음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 관계는 급속히 파괴되었다.
타락 이후 부부 사이에 대한 원망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제 간에 살인,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살인을 넘어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행위에 이르기 까지 관계성의 파괴는 점진적으로 증폭되었다.
인간의 수평적 관계의 손상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수직적 관계의 손상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수직적 관계를 가지고있다.
바울과 로마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회복된 수직적 관계의 수평적 확대인 것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 간의 만남은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있다.
아합 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이 왔을 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고서 사환에게 주먹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날 때까지 일곱번을 확인하도록 보낸다.
주먹만한 작은 구름은 하늘이 캄캄해지기까지 뒤덮여 온 지면을 적신다.
바울과 로마 성도의 만남은 주먹만한 조그마한 것이었지만 이 시대에 성도의 교제와 만남은 온 지면을 뒤덮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있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성의 회복과 더불어 확장된다.
이방인 성도와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격려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는 민족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기에 성도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로 인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은 인류 역사의 전환이 되는 사건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성도는 전혀 낯선 처음 만난 사람도 믿음 안에서는 서로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만남의 동력이 믿음이 되어야한다.
믿음에 근거한 관계성 회복
아담의 범죄 이후의 사람 간의 모든 관계성은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육신적 본능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익에 의한 것이다.
혈연, 학연, 지연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표적인 요인이었다.
이러한 요인에 의한 관계성은 배타성을 가지면서 외부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혈연, 학연, 지연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주요 수단이었지만, 이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수평적 확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이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라고 말씀하신다.
육신적인 인간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 은총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은총의 영역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영역 안에 있을 때 순기능을 할 수 있다.
아담에 의하여 파괴되고 왜곡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회복을 보게된다.
바울과 로마에 있는 성도와의 관계는 일반 은총 위에 더하여지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믿음은 특별 은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와 만나 안위함을 얻고자하는 매개체는 바로 서로의 믿음이었다
바울과 로마인은 서로 이방인의 관계였지만 서로 안위함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가 될 수있었던 것은 믿음의 결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물론 사람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바로 잡아준다.
성도가 세상에서 해야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믿음을 기반으로하는 관계성의 회복이다.
참된 관계성의 회복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천하여 제자삼는 사역의 실천은 바로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결실을 가져오게된다.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으로 모인 무리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나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믿음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모든 만물의 구속이라는 우주적 교회론을 근거로한 선교적 교회론이나,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을 근거로 한 문화변혁 개념 안에는 믿음에 의한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성령의 창조 사역의 결과물이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다.
믿음은 문화와 달리 세상 사람과 공유될 수 없다.
구속의 근거는 믿음이 되어야한다.
성도가 문화활동을 하면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활동의 근거가 만물의 구속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변혁 활동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이들이나 모든 피조 세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한 자와만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오직 택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참된 개혁주의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에 근거한 택한 자들 가운데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들이 서로의 믿음으로 인하여 안위함을 받는 것은 오직 성도들 사이에서만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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