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19. 20:53

신명기 29장 1- 13절 말씀 묵상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은,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웠던 처음 세대는 거의 광야에서 죽고서, 그의 후손들과 세워진 것이다.

단순한 세대교체의 의미보다는, 광야에서의 4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을 경험하고서 세워지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호렙산 언약보다는 좀 더 심도있다고 할 수 있다.

호렙산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세대였다면,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하고 알 수 있는 세대와 세워진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 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을 행한다면, 이전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세워진 언약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입교를 하는 것과 같이, 이제 광야에서 사십년의 충만한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판단력은 오랜 경험 못지 않게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앞으로 살게될 환경이 과거와 비교하여 어떠할지를 스스로 판단하여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상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연륜은, 젊은 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판단력을 높여준다.

이는 젊은 이들이 노인을 존경하여야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노년의 판단은 그만큼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삶의 연륜을 통해서 깨닫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근본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도 자연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그토록 고민하고 연구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인간을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풀이라도 소가 먹으면 소똥이 나오고 염소가 먹으면 염소 똥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40년의 충만한 시간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환경이 바뀐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준비가 안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 자손들로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자연법적 과정을 중요시 여기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교만한 지를 알아야만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장 과정이 필요하며, 자신의 문제와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성장의 첫 걸음이다.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호렙산 언약보다도 성장 과정에 따른 좀 더 구체적인 명령이 제시될 수 밖에 없다.

거듭남의 과정은 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때에만 거듭날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80년의 시행착오 과정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눈과 귀를 허락하셨다.

거듭남과 성령의 함께하심이 없으면, 인간은 외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깨닫고 알 수가 없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간의 공생애를 같이 했어도, 예수님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어도 깨닫지 못했으며, 알 수가 없었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의 차원이 아니며, 표면적인 율법의 차원을 넘어선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깨닫는데서 출발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를 강조했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거부한다.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며, 인간의 행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이들 가운데에서 점점 더 부패하고 변질되어가는 기독교를 보게된다.

현대 기독교의 변질과 부패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된 복음만이, 오직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마음으로 깨닫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40년 간의 공급하심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말해준다.

사십 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에도 인간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 세상 최후의 심판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며, 세상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사십 년 동안의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핑계 할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의 마지막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재앙에 의하여 멸망되어 갈 것이며, 하나님께 불평 할 수가 없을 것이다.



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농사를 지울 수도 없었으며, 소산으로 인한 포도주와 독주도 취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만이 살길이었다.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자신들의 우상 숭배의 토대로 사용하였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타락한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거듭나게 하시지 않고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거할 수가 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편적 안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로 삼질 않는다.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훨씬 편한 존재이다.

인생은 분명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 이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느낀다고하더라도 무능력한 것이 인생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바랄 뿐이다.


7  너희가 이 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주어진 땅은 그냥 공터가 아니라, 점령에 의하여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 땅은 이전의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땅으로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패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땅을 인간이 다시 오염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간섭하심은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정화하시는 작업을 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뢰하고 맡길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호렙산 언약보다도 경험과 신뢰가 더욱 다져진 상태에서 또 다시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다.

언약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는 모세 언약의 속성이 행위 언약임을 다시 한 번 더 나타내는 것이다.

은혜 언약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행위 언약은 쌍방적인 요구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상태이기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다시 한번 더 강조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성숙된 이들이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성숙된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분별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끔 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바탕으로 충분한 지식이 주어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10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가나안에는 언약에 참여한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기에,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야한다.

에덴에서의 생존 조건도 가나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에 참여한 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언약을 어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 날 수 밖에 없었듯이,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언약의 종결이며,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복귀는, 이미 종결된 행위 언약을 토대로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맹세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조건적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맹세에 참여한 백성은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백성이다.

언약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 할 수가 없다.

저주의 근본 원인은 불순종한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에서 한시적 복을 누리는 것이다.

현재 인간이 누리는 축복은 결코 인간이 잘낫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 가운데 있으며, 결코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거룩한 백성이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부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다.

부패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을 실질적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get in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stay in 규범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주된 점은, 유대인들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며,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에 가해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시고서,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에 전파하는 길을 여신 분으로 보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면서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관점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고 수용하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며, 단지 행위를 본받을 선지자에 불과할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8. 22:02

신명기 28장 58-68절 말씀 묵상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도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모세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완전한 것을 요구한다.

모든 말씀을 지키라는 반복적인 강조는 듣는 이들에게 심히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스라엘에게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이 아니라 행위 언약이었다.

명령에 대한 실행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행위 언약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이 그대로 재연republication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담의 행위 언약이 반복되는 면이 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위치와 성격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위치와 성격과는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나안에서의 모세 언약이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인가에 대해서는 아랫부분에 따로 정리해본다)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스라엘의 나중 상태는 출애굽 이전의 처음 상태보다도 더욱 안좋아진 상태가 된다.

선택받아 누렸던 모든 축복은 사라지고, 오히려 선택받기 이전 만도 못한 상태가 된다.

저주를 받을 거라면, 차라리 출애굽을 안하는 것이 좋았을 뻔 하였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포되는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시험대에 선 가나안에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듯이, 선택의 기로에 선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라는 축복이 임하고 있다.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선택을 위한 기회로 한시적으로 주어졌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의 축복은, 그냥 세상적인 복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기회를 허락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서 인류가 누리는 문명의 기술은 인간의 외적인 삶에 풍요를 가져다 주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무한정 주시는 풍요가 아니다.

불순종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질병과 재앙이 임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질병과 재앙이 임할 수 있고, 또 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막강한 기술력과 능력도 무력화되는 것은 순간이다.

현대인은 문명의 기술이 인간을 구원해주리라는 자기 착각에 빠져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 못지 않게 질병의 가지수는 최대치를 기록하고있다.

현대 의학으로 누리는 장수는, 약으로 버티는 수명의 연장이지 결코 건강 수명은 아니다.


인간의 굉장함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없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재력이나 능력, 규모등이 커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려하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게된다.

자기 신뢰는 교만으로 이어지며, 교만과 자기 신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명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명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은,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고 번성하게 하기를 기뻐하시면서 일을 이루셨지만,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면서 행하셨다.

출애굽과 더불어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던 백성은, 만민 중에 흩어지면서 목석우상을 섬기게 된다.

모든 것이 정반대 상황으로 바뀌어버린다.

출애굽에서의 희망은 절망을 바뀌어버렸지만, 가나안에서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출애굽 직전의 애굽에서의 상황은 가나안에서의 마지막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출애굽으로 이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이어졌다.

애굽에서나 가나안에서나 고통은 동일하였지만, 이어지는 희망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만을 가져왔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내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출애굽이 육적인 구속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영적인 구속이었다.

출애굽에서의 유월절은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우선은 삶의 고통 가운데 구원을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하며, 그 다음은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한가지 과정만 있다.

새관점은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안식이 생략되어있기에, 구원의 속성이 다르며, 그리스도의 역할 또한 달리 해석한다.

실제적으로 자신을 압제하는 세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 있다.

내면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또한 자신이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

끊임없이 외부 환경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치 않아도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이어질 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5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66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67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에 담겨있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는 아니지만, 은혜의 문턱에 놓여져있다는 것이다

비록 육적인 생명은 위험에 처해있더라도, 영적인 생명은 새롭게 열리는 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된 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다.


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출애굽 이전의 애굽에서의 상황보다도 악화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전에 애굽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던 구원을 반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애굽에서 간절히 바라던 구원에 대한 간구와는 다른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간구를 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백성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나안의 멸망과 더불어 더욱 겸손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차원이 다른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인가?

신명기 28장은 축복과 저주라는 갈림길에선 이스라엘의 모습이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에스콘디도Escondido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재연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있으며,  재연 교리는 그의 후예들, 즉 존 페스코J. V. Fesko나 반드루넨David VanDrunen등, 웨스트민스터신학교WSCal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된 The Law is Not Of Faith라는 책을 통하여 다시 제기된 주장이었다.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정통장로교회OPC 소속의 일부 목회자들이 모여서 Merit and Mose라는 책을 통해 재연 교리에 대한 반론을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가지 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었지만, 모세 언약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과는 다르기에, 단순히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주장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메러디스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에 대한 반발이 줄지 않는 것은,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이 유형학적typological으로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유형학적 재연으로 보는 것은, 여러가지 유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의 속성이 제거되고 오직 은혜 언약만으로 해석된다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소멸되며, 성경의 중심이 신약의 교회보다는 구약의 이스라엘로 이동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의 개념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 된다.

칼 바르트는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주장했다.

또한 존 머리John Murrey도 마찬가지로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였다.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비전Federal Vision은 결국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게된다.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간단하게나마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비교하면서 개인적인 관점을 소개하고자한다.

먼저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의 비슷한 점들을 살펴본다.


비슷한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다.

에덴은 아직 타락 이전이었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지 않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된 선악과 금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것이었으며, 시내산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시복음이 제시되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제시되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이 제시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구원자가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 실행의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명령에 따른 축복과 저주가 제시되었다.

●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검증을 요구하는 곳이다.



다른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이지만, 에덴은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땅이었다.

에덴도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가나안의 풍요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하심에 의한 풍요였다.

● 에덴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은 종말론적 약속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한시적인 현재적 삶이었다.

● 가나안은 영원한 가나안의 모형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었지만, 에덴은 영원한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지는 않는다.

●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 아담 언약에서는 은혜의 요소가 내포되어있지 않지만, 모세 언약은 은혜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내포한다.


결론적 생각들


● 가나안은 에덴보다도 한 단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가까웠으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타락 이전의 상태라서, 은혜가 직접적으로 요구되지 않았지만, 이미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은혜가 임함으로서 가나안이라는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가나안이 하나님의 안식의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할 수 있었다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준비된 백성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신32:5)”고 말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족한 점과 문제점을 노출시켜서, 그 부분을 채우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예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다.


● 가나안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통으로 보지만,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몸통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꼬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약의 모든 역사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성경의 핵심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이지만, 새관점에서는 처음 아담을 논하지 않기에, 둘째 아담의 개념이 상실되어있다.


●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한시적이었던 것은, 가나안 자체가 안식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에서 순종에 따른 또 다른 종말론적 안식의 땅이 제시된다면,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나안의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을 이 땅에 실현된 실질적 안식의 땅으로보며, 종말론적 가나안을 현재적 안식의 땅과 동일시한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는, 유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분이시다.

새관점에서보는 교회는 확장된 유대 이스라엘이다.


●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한 행위 언약이다.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보기에는 조건적 행위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모세 언약이라는 점을 들지만, 모세 언약 자체는 표면적으로는 분명하게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을 지킬 수 없었기에, 즉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실질적으로 모세 언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귀결되는 면에서 모세 언약이 은혜 언약이라고 말하는 점은 맞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지 못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했기에 모세 언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하더라도, 표면적 속성에 있어서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아야한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는 이들은, 존 머레이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였던 노먼 쉐퍼드와 그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주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카이퍼의 신칼빈주의가 여기에 속하여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으로서의 속성은,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을 재연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없이는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적 속성을 간과하는 이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제함으로서, 이들의 신학 사상에는 결과적으로는 인본주의적 속성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율법은 복과 저주의 갈림길인 행위 언약의 근거가 아니다.

이들은 모세 언약을 오직 은혜 언약의 속성만을 갖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본으로서, 율법을 일종의 생활 규법으로 격하시킨다.

이는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는 윤리를 넘어서는 복음이며, 복음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전제로 한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하기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관점은 열매로서만 접근되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7. 21:25

신명기 28장 36-57절 말씀 묵상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명령이라기보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실제적으로 일어날 일로서, 불순종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민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선택된 것은 아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타락에 대한 문제 해결없이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참여될 수 없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담의 문제와 관계없이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참여된 것으로 본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모세 율법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삶의 지침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을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는 참혹하기만 한데, 이를 삶의 지침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는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직 아담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그대로 나타내고있다.

가나안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제점들을 노출시킴으로서, 이차적으로 구속사가 이루질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가나안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자신에게 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일반 은혜는 구원으로의 초대를 위한 것이다.

보편적 평안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의 최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못지 않을 것이다.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비방거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만 자신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모를 뿐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야만 한다.

인생의 삶 가운데 당하는 수치와 비난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
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43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44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가나안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것이다.

만약에 불순종하여도 처음의 축복이 지속된다면, 이들의 불순종은 끝을 모르고 심화될 것이다.

모든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저주받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았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유익의 기준이 틀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주어졌다면, 이 시간은 인생의 가장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고통 가운데 얻는 유익은, 평안 가운데 얻는 유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고통 가운데 얻는 유익이 진정한 축복이다.

세상적인 축복을 원하며 이를 간증하거나 자랑하는 신앙은 항상 위험을 내포한다.

행위 언약의 형식을 가진 모세 율법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듯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에발산에서의 저주의 본질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삶의 여정 가운데 생기는 모든 문제를 경제 원리, 혹은 과학이나 정치로 해결하려고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속의 기회를 흘려보내는 불행한 방식이다.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정적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유익한 상황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가나안에서는 순종이 철저하게 요구되며,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는 불순종에는 반드시 저주가 임할 것이다.

가나안은 일차적으로는 심판의 장소이다.

심판은 철저하게 인간의 순종이라는 공로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심판의 두 번째 단계는 은혜의 과정이다.

문제를 노출시키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결이 없이는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은혜는 문제를 문제로 노출시킬 때에만 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가나안을 은혜의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차적인 단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두 번째 단계는 일차적 단계의 단점을 보강하는 부차적인 단계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는 가나안은 심판과 저주만 있을 뿐이다.

가나안에 임한 저주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참여될 때에만 진정한 은혜가 있는 것이다.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적군을 섬기는 것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이미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들은 실질적으로 이미 사단을 섬기고있었다.

뱀을 미화시킨 가상 동물인 용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보지 않았어도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고있다.

남미의 고대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용이나 중국에서의 용이나, 서로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을 텐데도 너무나도 유사하다.

용은 남미나 중국 대륙이나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섬기는 짐승이지만, 신기한 것은 용을 본 사람이 없어도 비슷한 모양으로 세계 각국에서 제각기 용의 모양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이미 자유 의지가 박탈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섬김의 대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 귀결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로 연결되는 수단과 통로가 되어야한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격도 없으며 통로도 없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미 사단의 권세 아래있기에, 자유 의지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 의지이면서 전적인 부패해 있을 뿐이다.

인간의 노예 의지와 전적인 부패는 새관점주의자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개념이다.

노예 의지 개념은, 새관점주의자들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공로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49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51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지배를 당하며, 이전의 애굽에서의 상태보다도 더 비참한 상태가 된다.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을 압제 가운데로 몰아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단의 실상이 어떠한지 막연한 가운데 섬겨왔지만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사단의 악한 모습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바닥이 없으면 높이를 알 수 없듯이, 악을 경험하지 않으면, 선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궤변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에서의 악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악의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악이  마치 제방이 무너져 쏟아지는 물과 같이 덮칠 것이다.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이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일반 은혜는 결코 당연하지도 않으며, 가벼운 것도 아니다.


53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54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5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56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7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연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인육을 먹은 사람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수치를 감당해야만 한다

그것도 자식을…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극단적 반대 상황이다.

극단적 상황에서는 인간의 온유하고 연약한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 사랑해야할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된다.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 먹이감이 되며 자신을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해친다.

인간의 품위는 어느 정도의 환경이 조성이 되어야만 가능하며, 극단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성품과 기질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가나안에서의 환란은, 마치 상품의 품질을 검사하듯이 극단적 테스트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테스트에 통과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원래 인간은 모두 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불량품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 제공되어도 만족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 마저 파괴 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고발하는 곳이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는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면서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과정이다.

가나안에서의 저주는 사랑의 채찍이며, 완전한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현 시대에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문제들은 택함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통로이며, 택함받지 않은 이에게는 멸망의 통로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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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8. 6. 16. 23:04

신명기 28장 15-35절 말씀 묵상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모두 완전하게 지켜 행하여야한다.

부분적인 행함으로는 모든 저주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 가혹하고 불가능한 요구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자연계의 질서는 어느 하나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누룩과 같이, 인간의 조그마한 범죄는 피조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은 엄격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법은 엄격하지도 않았으며, 혹시 법을 어겼을 지라도 성전에서의 제사를 통해서 언제라도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유대인들이 무척이나 성실하게 율법을 준수하였으며, 매우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성실하거나 신실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 톰 라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최종적 심판을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한 율법 준수라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은 방어를 위한 곳이지만, 성벽에 의한 방어는 무용지물이 된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성벽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며, 어느 곳에 있던지 저주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경제력을 키우고 힘을 키우지만, 그들의 내면의 실상을 보면 문제가 없는 이들이 없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콩가루가 된 집안도 종종 본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오는 것이다.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먹는 문제는 생존에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 때에, 아람 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자기의 아들을 쌂아 먹는 일까지도 일어났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은혜와 안식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 사회가 일반 은혜 가운데 어느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비극적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상 재해와 메뚜기 때의 출현은 언제라도 인류를 굶주림의 저주 가운데 몰아 넣을 수 있다.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 맛보았던 수고의 모든 결실들을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불순종과 더불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들어와서 안식을 취할 수도 없고, 나가서 수고를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상실된 상태에서는 수고와 안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순히 잘먹고 잘살라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으로 귀결되어야한다.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잊은 악한 행동은 그대로 놓아둘 경우 주변의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시킬 것이다.

마치 발사한 미사일이 궤도를 이탈했을 경우에는 중간에 파괴시키지 않으면,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있으며, 행함의 궤도가 있다.

주의 말씀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궤도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동은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회로서, 어디로 가야할지 궤도를 상실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다윗은 인구조사라는 불순종의 댓가로 백성들에 염병을 돌게하였다.

불순종과 염병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인들의 질병은 대부분 문명의 발달로 인한 후유증과 연관되어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욕심으로 대체시킨다.

현대인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불순종이라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현대인은 약이라는 수단으로 질병을 통제하고있지만, 모든 약은 이차적인 부작용을 수반하게 되어있다.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예전에 서울에서의 생활 가운데 차 안에서의 냄새 문제가 해결이안됬는데 지방에서의 생활에서는 차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음이온의 부족으로 정화기능이 떨어진 것이다

도시 문명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부차적인 욕심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로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을 파괴시킨다.

일반 은혜 시대에 다가오는 저주의 재앙은, 문명의 보편성 만큼이나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질병의 대다수가 인간이 자초한 보편적 저주와 연관되어있다.

현대인은 질병들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하지만, 과학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맹인들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용납하는 것은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하기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질병의 재앙들은 인간의 생태계를 조절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가나안에서 하늘과 땅이 주는 축복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포괄적 은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선택적 은혜만을 허락하시지는 않는다.

현대는 일반 은혜의 시대에 보편적인 은혜를 거부를 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있다.

대기 오염은 인간의 욕심의 결과들이다.

중국은 발전과 더불어 대기 오염이 상상을 초월한다.


(미세먼지 분포도)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비가 내려도 대기 오염으로 인한 산성비가 내린다.

온갖 미세먼지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려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게끔 인도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미세먼지의 원인과 대책은 많이 나오지만,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미세 먼지에 대한 대책은 또 다른 이차적 문제를 유발할 것이며, 이미 재앙의 굴레에 빠져들었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에는 재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인간의 욕심으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하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어버리신 이유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후2:11-12)”

현대인이 겪는 환경 재앙은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재앙조차도 사람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생기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에, 내어버려둠으로서 어떠한 결과가 생기는지 스스로 경험하도록 하신다.

가나안의 이스라엘도,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서, 재앙 가운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만 했다.


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떠한 승리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단에 승리를 하였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재벌이나 학자들이나 성공한 이들은 승리한 자들이 아니다.

승리는 더 이상 사단의 간섭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악한 이세벨 뿐만이 아니라 불순종한 유다의 멸망때 이러한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출 9:9-10)”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피부병을 일으키셨지만, 일반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는 환경 파괴와 면역체계의 약화로 인하여 각종 피부 질환에 노출되고 있다.

표면적 의료 기술의 발달은 임시적일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해주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미치는 것과 정상적인 것의 차이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겨넣으신 자연법은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며 기준이 사라진 인간의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는,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결과로 인한 것이다.

현대인은 엄밀하게 말해서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모두가 비정상이며, 정신질환자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질환은 해결책이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질환은 해결책이 없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기에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공격하는 현상은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한다.

하나님 나라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을 통해서 완성되기에, 서로에 대하여 정죄하기 바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구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맞이하는 결과들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빛이 되신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빛은 있지만,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빛이 없기에, 환란 가운데 도움을 청할 수가 없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현대는 문명의 빛은 화려하지만, 영적인 빛은 거의 사라진 시대이다.

하나님을 찾아도 볼 수가 없으며, 도움을 구하여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불순종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대는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고있다.

현대는 오직 외적인 빛만 밝힐 뿐 마음에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시대이다.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가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사라진다.

사람과 재산을 잃게 됨으로서, 삶의 기반이 상실된다.

출애굽하여 들어간 가나안에서 얻은 모든 것이 다시 상실되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하여 하나님과 약속하였던 것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더 이상 출애굽한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신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몸을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시는 처소가 준비되어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주신다.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형제들과 같이 나누어서 먹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감사하면서, 풍요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잃었을 때 형제가 이를 찾아주었다.

재판은 공정하였기에,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가나안 공동체에서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비록 안식의 땅으로 준비되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은 상실되었다.

현대 사회는 일반 은혜 가운데 보편적인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힘있는 자에게 의해서 약자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 같아도  실제적으로 약자는 점점 더 희생될 수 밖에 없다.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자녀를 상실해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가 없다.

하나님은 자녀를 처음으로 잃어버리셨던 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수고한 것의 소산을 먹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축복이다.

식민지배를 당하면 수고의 소산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투기나 도박은 뺏고 빼앗기는 하나님을 떠난 방식이다.

주식도 벌은 만큼 손해보는 사람이 있으며, 수고로 얻은 모든 것을 잃는 통로가 되기도한다.

이익을 위해 매진하는 현대 사회는 자신의 수고를 담보로 다른 이들의 수고를 빼앗기도하는 하나님을 떠난 사회이다.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도박이나 투기로 자신이 수고한 것을 다 잃어본 사람은 미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좀처럼 짧지는 않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회복되기 어렵다.

낙담하는 시간과 상실의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치지 않았더라면, 제 정신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가장 친근하게 은혜로 다가오신다.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철저하게 비참해진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몇십년 후에는 예외없이 도움을 받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차라리 젊었을 때 무릎과 다리에 고치지 못할 종기가 생긴다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평생을 자신을 믿다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사람에게는 희망이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현재의 삶 가운데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을 쫓아가는 시대


현시대는 가장 발달된 시대이면서 가장 무지한 시대이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교만이 꺽이고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현대는 교만이 극치를 달리고 있는 시대이다.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고한다.

현대인들은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병은 병원에서 해결하고, 사회 범죄는 언론과 법원의 몫이며, 배고품의 문제는 경제 활동으로 해결한다.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여지가 없다.

가끔 자연 재해를 만나게되면, 인간의 연약함과 창조주의 위대함을 말해보기도하지만, 잠깐 뿐이다.

교만한 현대 문명의 뒤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자리잡고 있다.

질병에 대해서는 원인적 접근보다는 현상적, 즉 증상에 따른 치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왜 질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지 근원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한 근원적 접근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귀결되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한다.

사회 범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하고 재판이 이루어지지만, 범죄의 총체적 분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은 어느 정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활성화된다.

죄악은 죄성이 활성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마치 화산이 내부의 마그마가 활동하면서 폭발하는 것과 같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죄성을 더욱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된다.

예전에는 청소년이 인터넷의 음란물을 접하지 못하도록 컴퓨터를 거실에 놓아야한다고 대책을 세우기도했지만, 이제 컴퓨터는 손 안으로 들어가서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있다.


내면의 죄성이 활성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 경제 활동은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경제의 굴레에 짓밟히며, 하나님께 향하여야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현대인의 외적인 화려함과 달리 현대인은 빛을 잃은 눈 먼자가 되어가며,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현대인에게 바쁨과 수고의 결론은 안식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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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0) 2018.03.30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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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5. 23:10

신명기 28장 1-14절 말씀 묵상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세계 모든 민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로서 결코 다스릴 자격이 없는 민족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명령을 지킨다면, 더 이상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원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되었기이에 다스림의 권세를 가짐으로서 더 이상 세상이 이기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하듯,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되면, 창조 세계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은 이미 아담에게도 약속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할 때만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삶의 원리는 창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읍에서든지, 보호되지 않는 들에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보호자가되시며, 공급자가 되시기에,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가 있다.

인간의 자기 방어에 관계없이, 거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순리적으로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이다.

복에다가 인간적인 욕심의 관점을 접목시키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이다.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이었으며,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타락의 극대화만 초래하였을 뿐이고, 급기야는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생물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순종을 전제로한 가나안에서의 생육은 원래 에덴에서 주어졌던 명령의 결과들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또 다시 에덴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서, 가나안에서 주어졌던 순종의 결과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된 것이다.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아담은 범죄한 후에 소산을 먹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했으며, 밭의 채소를 먹어야했지만,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에, 수고를 하여도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땅의 저주에서 해방된 안식의 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영적인 갈증과 더불어 육적인 궁핍을 해결해주심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셨다.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수고하러나가는 시간이나 쉬러 들어오는 시간이나 모두 안식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일주일의 시작은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주일로 부터 시작된다.

성도의 한주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 위에서, 안식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안식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대적하는 자와의 싸움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는 승리 밖에 없다.

인간이 사는 환경은 어디에나 대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모든 역경을 스스로 헤쳐나아가야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고생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는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오직 순종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대적자를 물리치시면서, 안식의 풍요를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사단은 이미 패배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단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새로운 승리한 존재로 세워질 것이다.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사람이 하는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풍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받는다면, 부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은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사회의 특징은 수고하는 이상의 문제로 인하여 수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한다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적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백성이 될 것이다.

만약에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하였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성민이 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성민이 된 것이다.

 

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아담의 순종으로 에덴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면, 온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기에, 사단의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근거는 약속이었다.

구속의 역사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약속, 즉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원협약을 근거로하여, 구속의 역사가 진행되며, 가나안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축복을 예표하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적절한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풍성한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계절과 때에 맞추어 내리는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나타내는 놀라운 자연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자연 재해들이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에서 기인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욕심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며, 현대 문명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인 것을 볼 때, 현대 문명과 우상 숭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는 세상 문명을 통한 성취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복된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행사하는 왕의 역할을 하였다.

아담이 높은 자리에서 행사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반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었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은 두려움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다시 안식의 땅으로 초대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어떠한 복을 받는지 증거해주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을 뿐이며, 모든 인간은 구속주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높임을 받는 자가 되었다.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모압 땅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은 시내산 언약을 좀 더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주어진 명령은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를 선언한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축복과 저주가 반복된다는 면에서,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이 재연되는 행위 언약으로 보기도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5. 00:28

신명기 27장 1-26절 말씀 묵상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과 장소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존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선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선조들은 애굽에서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렸으며, 가나안 입성은 선조들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무조건적 응답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주관자가 되며 하나님은 단순히 반응하시는 분이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하며, 하나님의 법은 일종의 자연법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의 법은 자연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순응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법이다.

특히 가나안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거룩한 땅으로서, 자연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기에 주어진 자연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과 저주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거룩한 땅은 의인에게는 축복된 땅이지만, 죄인에게는 저주의 땅이다.

내면에 죄성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결코 축복의 땅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에 힘입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한 날에 에덴에서 쫓겨나는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는 다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세울 큰 돌은 가나안이 명령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는 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안식의 성취가 아니라 안식의 성취를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위한 요구가 주어지는 검증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쇠연장을 대면, 모양 자체가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위적인 형상이 만들어지거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에 돌을 다듬는다면, 금송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가 있고, 이 돌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상들은 물건 자체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숭배의 대상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가나안은 영원한 화목제이신 그리스도와 달리, 인위적이고 지속적인 제사가 필요했던 곳이다.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언젠가는 상황이 변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가나안 생활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초로하여 시작되어야한다.

이는 가나안 생활의 조건이다.

미국에 가면 미국의 법을 따라야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안식의 땅으로서, 이를 누리기 위해서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야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 즉 행위 언약이 가나안에서 재연되는 면이 있지만, 에덴은 언약의 성취를 통하여 안식이 약속된 반면, 가나안은 성취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 언약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에덴은 아담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이 약속되어있던 반면에, 가나안은 순종을 통하여 현재적 안식을 누리는 곳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누리는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에덴이나 가나안이나 공통적으로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을 향하여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 즉 행위 언약이 재연republication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영원한 안식이라는 은혜 언약을 내포하고 있다.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되었지만, 조건이 있기에,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은혜는 더 이상 사람에게 조건적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조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거래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것이다.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면, 율법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해보아야한다.

율법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인가, 아니면 규범인가 구분해야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요단강을 건넌 백성들에게 율법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 것을 제차 강조한다.

율법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가나안 생활에서의 요구 조건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있어서 실패하였기에, 가나안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율법이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라 조건임를 말해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적 울법주의에서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규범이라고 말하지만, 율법은 규범을 넘어서, 행위 언약의 기준이 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11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가나안은 축복을 받기 위한 땅이면서, 동시에 저주를 받기 위한 땅이다.

마치 무균실에 넣어진 음식이 부패될지, 아니면 계속 신선하게 유지될 지를 검증하는 실험실과 같아서, 부패되는 현상이 생기면 버려질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어도 검증을 위한 과정에 참여된다는 점에서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번째로 우상숭배에 대한 검증을 받는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검증에서 문제를 보였듯이, 모든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특징되는 우상은 문명의 기술이다.

조각하거나 부어만든 우상은, 현대에 와서는 문명의 발전이라는 형태를 띄고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문화 명령을 근거로,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종말론적 천국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즉 발전된 문명이라는 것이 원시 에덴에서 고도로 발전된 천국을 이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문명의 기술을 지향한다고 말하며, 이를 선한 방향으로 전환시켜 천국에서 보존되도록 해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는 문화명령의 개념은 성경을 너무도 왜곡시키는 해석이다.

기술은 하나님 의존적인 방식을 떠나, 인간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도시 문명의 산물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으로 생기는 문제들 조차 기술로 해결하려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다.

기술의 발전은 우상을 미화시킬 뿐이다.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태초의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이른다.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없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어야하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지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러하지 못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변하는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구세주를 필요로 함을 증명해 주고있을 뿐이다.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에서는 각 사람에게 땅을 배분해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셨다.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간이 훔쳐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을 다스리라고하였다.

사단은 아담을 실족시킴으로서 아담으로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영역에서 쫓겨나게끔 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환경이 있는데, 사단은 서로에게 불법적인 해를 가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훼손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있다.

인간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면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분명하게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안식을 제시하셨다.

사단은 아담의 길을 굽게하여 실족하게하였다,

가나안은 실족하여 길을 잃은 자에게 다시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고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곳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길을 스스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길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는 사단이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어 버린 자에게 길이되시고 생명이 되시면서, 능력이 없는 죄인에게 능력과 힘이 되어주신다.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객이나 고아나 과부였다.

이들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20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해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이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악한 행위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였다.

사단은 인간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까지 모독하려는 시도를 한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면서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범죄를 저질렀다.

가나안에서는 노골적인 범죄가 일어난다.

압살롬은 공개적으로 이러한 일을 범한다.



21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자연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짐승과 교합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구속 사역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다.


2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압살롬은 마찬가지로 이러한 악한 일을 벌인다.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남자가 집을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행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는 일이다.



24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구현으로서,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한다.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일종의 청부 살인으로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이다.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저주에 대한 선포는 단순한 규범을 넘어서 행위 언약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명령이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였던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 같이, 에발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저주는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저주는 행위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물임을 말해주고있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3. 23:25

신명기 26장 1-19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처음 소산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받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자의 기본 자세이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오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이었다.

현재의 존재와 풍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과정에 빚을 진 것이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성도가 현재 누리는 풍요는 수천년의 구속 역사의 과정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룬 결실들이기에, 결코 감사함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가진 것을 아무리 많이 하나님께 드린다할지라도, 이제껏 주신 축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예배하려오는 자는 감사 예물을 가지고 온다.

제단 앞에 놓여진 광주리 안의 맏물은 속죄와는 무관한다.

가나안에서의 제단의 우선적 역할은 속죄에 대한 것보다도 감사에 대한 것이다.

속죄에 대한 것은 이차적으로 가나안에서 드러나는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다.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제단 앞에서 아뢰는 고백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기에, 아뢰는 것은 사실을 고하는 것보다는 마음에 새기기 위한 것, 마치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서, 마음에 기억하게하는 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일종의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를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선택받아 애굽에서 크게 번성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에서 다시 번성하여 크고 강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반복된다.

이는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된 상태가 최종적 상태가 아니었듯이, 크고 강하고 번성되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최종적 상태가 아니라 그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발전을 하면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지만, 이는 최종적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크고 강하고 번성된 민족은 오직 패망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고난 가운데 출애굽을 하였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를 맞이했듯이, 번영된 대한민국은 어려움 가운데 또 다른 희망을 기다려야만 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어려운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또 다른 희망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당한 대우와 고통과 심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결코 애굽에서 나와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이방인의 압제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일제의 압제가 없었다면, 선교사들에게서 희망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며, 한국이 복음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는 마치 바벨론이나 애굽과 같은 필요악일 뿐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졌다고 이를 미화한다면,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미화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악이 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36년은 이조 500년의 뿌리깊은 유교 사상의 맥을 잘라내는 역할을 함으로, 대한민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으며, 한국전쟁은 각 지역의 뿌리깊은 배타성과 지역 텃세를 없애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아직도 지역 텃세가 남아있는 경주와 제주와 강릉이 가장 복음화율이 낮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일제와 한국 전쟁도 어디까지나 애굽과 바벨론 세력과 같은 존재로서 결코 미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이유로 미화될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더라도 악일 뿐이다.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원동력이 된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인격적 반응이며, 응답으로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기도한 이들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기도를 원하신다.

기도 없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인격적 반응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중보자의 기도가 있었지만, 구체적 응답을 위해서는 당사자의 기도가 요구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에서 출발된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존중되어야하며, 기도 응답은 인격적 존중으로 인한 반응이다.

말을 하는데도 반응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부여한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시기에, 결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출애굽 과정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간섭은 애굽에 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미 애굽의 문화에 깊게 물들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내에 자리잡고 있던 내면의  세계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보여주시는 것은 외부의 세력 못지 않게 내면에 자리잡은 세계관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이들에게까지 항상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기도하지만,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방법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신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을 끊임없이 구해서는 안된다.

지속적으로 부흥회를 쫓아 다니거나, 신사도 운동에 심취하거나, 관상기도에 몰입하여 잘못된 인위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한다면, 이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성한 신자는 오직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 요구되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안식의 땅이다.

가나안에서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거룩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능력 밖에 것이었다.

가나안과 달리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도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교회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거룩함의 요구라는 점에서 가나안이 애굽과 구별되었듯이,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곳이다.

외적인 건물 위주의 유형의 교회는 무형의 교회를 제대로 표현해주지는 못하지만, 세상 속에 들어가는 무형의 교회는 거룩함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한다.

무형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세력이 커지면 경계의 대상이 된다.

이는 애굽에서 번성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결코 교회를 수용하려고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변화시켜서 거룩하게 만드시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구별된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상에서 성도를 구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거룩함에 참여한 구별된 사람들이 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만,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탄생된 교회가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이며,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구별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려는 전통적 교회와 구별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문화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은 모든 피조세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One Kingdom개념이며,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두 나라Two Kingdom와는 구별이 된다.

One Kingdom개념의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되었기에,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를 종식시키는 안식의 땅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안식은 거듭난 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피조세계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으며, 새옷으로 갈아입을 헌옷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이라면, 이미 이 피조 세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어야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신앙의 고백 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산물을 가지고 왔다.

성도는 이제껏 자신을 인도하신 것에 대한 고백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성도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13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는 공동체적 풍요로 이어져야한다.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는 빈곤한 자들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풍요를 어느 정도만 나누었다면 세상이 교회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이다.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풍요를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성물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애곡하는 것과 부정한 것과 죽은 자는 생명과는 반대되는 것들이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풍요를 제대로 누릴 수만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의 요구가 성취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곳이 될 수 있었다.

가나안은 생명으로 향하여있기에,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의 소산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덧입혀져서는 안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감사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에덴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면, 하늘과 땅은 완전한 연합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이 땅에서 특별하게 구분되어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과의 연합을 준비하는 거룩한 안식의 장소로 준비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하늘의 풍요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된 가나안에서, 정작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아담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참이스라엘이 되시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도록 필요성을 제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도는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현재적으로 임한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한다.


16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살기에, 규례와 법도를 넘어서는 안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가나안은 한 가지로 획일화 되어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법도이며 삶의 방식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여야한다.

가나안과 달리 이 세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진리의 기준이며, 자신의 생각이 삶의 방식의 기준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말하는 자를 용납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는 이스라엘의 종말과 유사하다.



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구이다.

가나안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먼저 들어가게 하고서 자격이 있는 삶을 살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 응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된 것은, 이들이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하시고, 후에 가나안에 합당한 삶을 요구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서 모든 명령을 지키라고하는 것은, 마치 돈을 벌어서 물건을 사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물건을 주고서 후에 갚으라고하시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애굽 땅에서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간구에 응답하시고 명령을 지키라고는 요구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이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전부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인 공급만  하신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였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도 누구나 다 하나님께 간구한 응답으로 구원에 참여하였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의무가 있다.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선택받은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뛰어나게 하신 것이지 원래 뛰어난 민족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만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기대되었던 성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성도들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백성인 성민이 된 것이다.

성도의 존재와 위치가 어떠한 지를 생각할 때, 최소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은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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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2. 23:24

신명기 25장 1- 19절 말씀 묵상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아무리 사람이 범죄를 하였을지라도 인격체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손상된 형상이 회복되어야 할 땅이기에, 범죄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경히 여김을 받으면 안된다.

공정한 재판에 의한 판결이라도 사십이 넘는 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는 집행이다.

재판은 공정하게 하되, 인격에 손상을 입을 정도의 지나친 집행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십은 더 이상이 필요없는 충만한 숫자다.

성경에는 사십에 관한 숫자는 수 없이 많이 나온다.

모세는 사십세에 광야로 도망을 갖고, 사십년을 광야에서 지낸 후에 사십년을 사역했다.

노아 때에는 사십주야를 땅에 비가 내렸으며,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가나안 정탐꾼들은 사십일 간을 정탐하였던 것과 같이, 사십은 더 이상이 요구되지 않는 충만한 숫자임을 볼 수 있다.

죄인에게 사십 이상을 때리는 것은 인격의 손상을 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존중받아야할 사람을 경히여기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예표적으로 회복되는 곳이다.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일을 하게하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는 것은 비열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성이 상실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가나안은 모든 피조계물의 탄식을 씻어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선취적으로 경험하는 곳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선취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곡식을 떠는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한 하나님 나라를 떠는 사람으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는 특혜를 누릴 수가 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바울은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라고 남편이 죽으면 자기 뜻대로 시집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부러 형수치수제를 거부하는 것인가?

바울이 전하는 말에 형수치수제를 지키고있던 이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바울은 반율법주의자가 되고말 것이다.

하지만 형수치수제가 원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에까지 존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구속을 약속하신다.

흔히들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속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할 것을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고자, 헤롯을 이용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가나안은 영원한 구속의 나라를 예표하는 곳으로서, 구속주가 오실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원시복음이 실현되어야 할 곳이었기에, 형수치수제는 꼭 필요하였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룻이 들어간 것은 형수치수제에 의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신약에서는 이미 원시복음이 실현되었기에 더 이상 형수치수제가 필요치 않다.


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정당 방위나 성적인 개념보다는 대를 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위를 손상시킴으로서 대가 끊길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이러한 조치를 취함으로서 사단의 계략을 사전에 막고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대를 끊는 행위를 한 손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이므로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두 종류의 저울추는 상대방을 속임으로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속임수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은 가나안이 받게될 심판을 왜곡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속이는 것은 비단 저울추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것도 일종의 속임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학위라든가 경력등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나간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가치 평가는 경제 활동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하는 위선적 행동은 일종의 속이는 저울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에게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속이는 행동이다.

서구에서는 종종 기독교인을 hypocrites라고 부르기도한다.

즉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이해한다고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으로하여금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공정하지 못한 저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사회이기에, 가나안의 속성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막는 행위는 단순한 방어 전쟁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가로막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다.

아말렉이 악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고자하는데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서 산꼭대기에 선것은,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이 일종의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 속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뱀이 되어 애굽 술사들의 뱀을 잡아 먹었던 지팡이였다.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수아의 승리는 사단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아말렉이 천하에 기억되지 않으리라는 모세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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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1. 22:44

신명기 24장 10-22절 말씀 묵상


10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약자,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규정된 법이다.

비록 가난하여 돈을 빌렸을지라도,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을 당하면 안된다.

집 안의 영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 되어야 할 영역이다.

집 안의 영역은 공개적으로 노출되어서도 안된다.

초대받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오는 행동은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옷을 해입히심으로서, 수치를 가리우셨다.

벌거벗겨진 아담의 수치를 가림으로서, 아담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셨다.

아담의 인격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담의 수치는 하나님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약자건 강자건 간에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 이들의 고유 영역에 대한 침범은 하나님의 인격적 영역까지 침범하는 행동이다.

약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침범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동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수치를 가리우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수치를 가리우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희생을 넘어서, 인간이 받을 모든 수치를 받으시면서, 수치를 직접 담당하셨다.

집 안의 영역을 침범하여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립이 된다.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함으로서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빚진 인간의 수치를 가리시는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에서 시행되어야 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실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담겨있는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격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현대 문명의 악함은, 상대방에 대한 영역 침범 방식에서부터 볼 수 있다.

19세기말 산업의 발달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과 자원이 필요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일찍 발달된 산업으로 말미암아,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고, 산업 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다른 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뒤늦게 산업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나머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늦은 독일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이미 산업화가 된 나라를 침략하면서 제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었다.

현대 문명 사회는 산업의 발달로 특징 지워지며, 시장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영역 침범만이 생존의 길이 되었다.

시장 경제 원리로 운영되는 현대 사회는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빚진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일제 식민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외국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IMF기간에는 나라 안의 영역을 외국의 자본가들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원칙은, 역으로 현대 사회가 하나님의 구속 원리를 거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회 개혁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해방신학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만 사용될때는, 그 안에 담겨있는 구속의 원리를 상실하게 된다.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인간에게 매일의 안식은 그 다음의 생활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매일의 안식은 한 주의 안식을 이루어가고, 매주의 안식은 점진적으로 희년으로까지 나아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 주지 않으면, 그는 그 다음날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다.

해질 때에 가나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은, 자연법적 일반 은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행동이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행동이 될 때,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면 안되는 것이나, 해질 때에는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은, 가나안이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일상의 삶 가운데 적용되는 자연법적 원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안식이 전파 될 때,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비록 가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었지만, 땅에서는 빈부 격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빈부 격차는 제도로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속성을 가지려면,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이방 민족들에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공동체적 연대감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 사역과 같은 속성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가나안에서는 학대가 재연되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의 학대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를 망가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당일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매일의 안식은 성취 후에 가능하다.

에덴에서의 매일의 삶은 매주,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있었으며, 이는 아담의 수고를 근거로하였다.

에덴에서 수고의 결실로 안식이 약속되었듯이, 가나안에서의 수고에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수고에 의한 안식으로 귀결된다.

타락한 인간은 품삯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공급하심 가운데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있는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은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다면, 매일의 안식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 가운데 놓여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더 이상 죽음이 전달되지 않게 생명을 공급해 주신 것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죄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곳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실제 가나안에서도,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원의 범죄로 말미암아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의 죄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불순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대립된다.

아간의 범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아간의 범죄는 마치 암조직과 같아서, 제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암수술을 할 때는 암조직만 제거하면 쉽게 재발된다.

건강한 조직이라도 암조직 주변의 조직들은 이미 암 조직의 영향을 받은 상태이기에, 주변의 건강한 조직도 어느 정도는 같이 제거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아간에 속해있는 것들은 이미 아간의 범죄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이다.

이 부분도 같이 제거되지 않으면, 또 다시 아간의 범죄와 같은 죄가 재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은 언제나 환경만 조성되면 죄악으로 나타나게된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고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가나안에서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식이 죽은 것을 이해하려면, 내면의 본질적 죄와 죄를 짓는 악행을 구분하여 이해 할 필요가 있다.

가나안에서 행함의 죄가 없었다면,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행위 언약은 본질적 죄에 대한 것보다 행함의 죄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란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본질적 죄의 단절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내면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문제 해결이 없이 외적인 행함의 죄가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의 문제에까지 접근한다.

그리스도는 행함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면서,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하게하신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인간은 거듭났다고하더라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체질 자체가 사망의 몸이다.

본질적 죄는 해결되었어도 죄의 체질은 그대로 가지고있다.

성도는 행함의 죄와 본질적 죄, 즉 아담으로 인한 죄의 문제는 해결 되었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해결 될 것이다.

완전한 죄의 단절은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을 하셨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약자에 대하여 강퍅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였다면, 인간의 교만은 통제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자유인이 되었다면, 이는 평생에 기억에서 잊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되며, 교만의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속량 받았음을 인식한다면, 결코 약자를 괴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는 자신이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자신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소득의 일부를 남겨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의 부요를 자신에게 나누어주신 것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고아였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홀로 지냈었지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이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지만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있는 부요한 자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0. 21:15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자를 받는 행위는, 꾸어주는 대상을 상대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세계는 경제 원리로 운영이 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경제 원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 유지된다.

이자를 받는 행위가 조직화 되고 확대된 것이 은행이다.

은행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주체이다.

가나안에서 형제에게 이자를 받는 행위가 공식화될 때, 가나안의 공동체는 이익 공동체로 전락 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투영되는 곳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기에, 이들에게까지 이자를 받지 않을 필요는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려면,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창업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줘서 청년 실업률을 낮추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청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경제 원리도 도입되면 안되며, 도와주려면 차라리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도와 주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하지만, 경제 운영의 원리에서 교회가 사회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경제공동체는 단지 자연법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될 뿐이다.

무슬림 국가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가 된 곳이다.

무슬림들은 국가를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은행에서 서민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대출해주는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이를 본받아서 시행하려고하지만, 신정국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한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은 생각이 그리스도에까지 미치지 못하고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희년에는 꾸어준 것까지 면제해주는 제도를 가지고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은, 더 나아가 이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전가받아야할 것을 예표한다.

이자를 받지 않는 행위는, 희년제도로 이어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은 언약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쪼개진 짐승과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일종의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행한 서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갚겠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이다.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말라는 구절은, 교회에서 약정한 헌금을 독려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약정의 성경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서원에 적용된 구절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이며, 돈주고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원한 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이유로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였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나의 경우는 하나님께 수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행한 약속이기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입다는 그러하지 못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주님의 소유이기에,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 부재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전에 예배당 건축 후에 있은 부흥회에서, 부흥 목사가 와서 갑자기 쪽지를 돌리면서 그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약정하도록 쪽지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부인은 성가대석에서 떨어져있는 남편과 손짓으로 서로 싸인을 하면서 적어내는 것도 보았다.

부흥회가 교인들을 상대로 협박하며 삥뜯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성도는 결코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며, 성경 말씀이 헌금 강요에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잘못 약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깊이 회개하며, 정리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서원을 무조건 지키어야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서원을 하지 말아야하고, 서원을 했을 경우에는 가능한 지켜야하겠지만, 능력이 없을 때에는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서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주고 얻어내려는 잘못된 방법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정헌금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나쁜 방식이다.

약정을 해놓고 교회의 여러가지 낙담되는 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도 보게된다.

헌금은 오직 감사를 기초로하는 것이며, 이미 주어진 능력 안에서만 하면된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헌금을하게 하고서는 대단한 신자라고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한다.

목회자의 의도도 나쁘고, 성도도 자신의 욕심과 명예, 체면을 위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헌금을 독려하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교인이 마음에 낙담이 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 보면 안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헌금은 서로가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보면서 나오는 결과이며, 교회 변질을 가속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려면, 이제껏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고치면서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도 가장 잘 써먹는 나쁜 관행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칭하면서, 헌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헌당예배를 성전 봉헌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다.

예배당은 절대로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단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을 볼 때, 아직도 교회와 교단이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부흥의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러한 제도를 이방인과 나그네를 위한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포도원과 곡식밭의 이웃 사람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

전혀 못먹게 하면 서로 각박해지며, 그릇에 담아가면 대책이 없다.

도움을 받는 규모를 정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규모가 없는 과도한 요구는 서로에게 해를 줄 수가 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가끔 가진 자나 능력있는 자가 교회의 과도한 기대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적용하면 대책이 없어진다.

교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좋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해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이 거룩한 안식의 땅이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강한 제도적 규제가 없으면,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님을 드러낼 뿐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고,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생길 수 있는 악행을 규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재결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내를 맞교환하고서 즐기다가 다시 돌려받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내를 서로 바꾸어 일주일간 생활해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다.

이것이 좀 더 발전 된다면, 충분히 아내를 교환하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 8)”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제도를 악용하여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다.

스와핑같은 극단적인 예를 보게되기도 하지만, 이는 순결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희롱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가나안은 거룩함에 부합된 행동만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심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여도,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가 없이는 어떠한 대책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값으로 성도를 사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남으로서, 더 이상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를 예표하듯이, 교회는 거룩함을 입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이 땅에서의 가나안은 많은 대책을 세워도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율법의 규제가 없어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혼인의 귀함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일 년이라는 기간은 일반 군대에서 결혼한 이에게 주는 며칠간의 휴가와는 비교가 안된다.

1년이라는 기간은 혼인하고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후에 산모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이다.

일 년의 휴가는 혼인한 이에게 단순히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도 출산과 더불어 생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혼인하고서 바로 군대에 간다면, 모든 힘든 상황은 아내의 몫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혼자 놓아두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성하게된다.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땅에서 실천하여야한다.

맷돌의 위짝을 전당 잡는 것은 가나안을 야박한 사회로 만드는 행위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본래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그나마 가나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생존의 기회를 얻게하심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생존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는 자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한다.

사단은 현대인들이 자신에게 종속되도록, 온갖 유혹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의 필수적인 문명의 기기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걸려들게 하는 속성들이 있다.

현대인들은 발달될 문명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시간과 공간을 사단에게 종속시키고있다.

현대 기기들의 편리하고 빨라진 처리 속도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더욱 시간이 모자라게된다.

더욱 편리해진 기기들은 사람들의 모든 관심들을 빼앗아가면서 하나님께 향할 시간을 없애버린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사람을 더욱 더 바보로 만든다.

얄팍한 정보들은 결코 사람을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가나안이 심판을 받은 것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였을 때이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죄악의 보편성은 마지막 심판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나병 환자가 진영 안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에 나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

나병 환자를 진영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미리암의 경우와 같이, 나병은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병 환자가 격리되어야 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격리하는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을 치리하여야한다.

요즘 교회에서 치리가 사라진 것은, 잘못한 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교회가 치리를 행사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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