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7. 22:08

신명기 22장 1-12절 말씀 묵상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일원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타인의 잃은 것에 대한 관심과 회복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데 기본이되는 속성들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공동체 안에 있으면 형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참된 이웃에 대하여 설명하셨듯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성이 성도들 가운데 구현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형제의 잃어버린 가축이나, 곤경에 빠진 가축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참모습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수치와 고통을 감당하시면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 모르는 성도라도 형제로 인식하고서,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곤경에 처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시대가 점점 더 남녀간의 경계가 없어진다.

성별의 구별은 창조 질서, 더 나아가 구속의 원리에서 중요하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교회를 예표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원리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성에 대한 구분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중요한 원리이기에, 성에 대한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아무리 동물이라도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 (레 22:28)”고 기록하고있으며, 신명기에서는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신 14:21)”고 기록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

동물들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표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속을 기다리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모습도  취하여서는 안된다.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의 땅의 유형적 표상이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구속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형태도 허용이 될 수 없다.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다.

안식의 땅에서는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떠한 모양이라도 허용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간섭하심과 배려에도 인간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사고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서의 여러가지 사고들은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이 성취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가나안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결국 새 옷을 입은 영원한 가나안에서만이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종자마다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공급되어야 할 환경이 있고, 종자마다 배타적인 특성이 있다.

서로 다른 종자가 같은 포도원에서 자란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해를 입힐 것이며, 좋은 결실을 보기 힘들것이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들도 각각의 특성에 따라 활동 영역이 구별될 필요가 있다.

성도들도 교회 공동체에서 각자가 가진 달란트에 따라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해야한다.

서로 다른 종자는 그 생육 조건과 특성이 다를 수 밖에 없듯이, 교인들에 대한 지나친 획일화나 관여는 오히려 불협화음을 야기할 수 있다.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는 자연법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한가지이다.

특성이 다른 동물을 같이 일을 시킨 것은 많은 불협화음에 노출 될 수 밖에 없다.

소나 나귀는 서로 다른 특성이 있기에, 한쪽의 발달된 점은 다른 쪽의 부족한 점이며, 한쪽의 부족한 점은 다른 쪽의 발달된 점이 있기에, 동물 간에 분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와 나귀의 특성이 다르듯,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성과 성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동업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장점이 다르기에 자신이 잘하는 부분을 항상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좀 열심히 하거나 잘함으로서 얻는 이익은 서로가 나누어 갖기에, 서로 항상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익을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또 다른 방식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교회 공동체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성도는 아직 죄성을 가진 이들이기에 자연법이 존중되어야한다.

세상에서 일을 해본 사람은 이를 알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조심하거나 많은 요령을 터득할 수 있지만, 교역자를 비롯하여 주로 교회의 영역에만 있어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일을 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해와 해결 방식이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난감한 경우는, 일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초자연적인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자연법이 무시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잠깐은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항상 요구되거나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자연법을 무시하다보니까, 교회는 상식이 가장 통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성도가 일상의 영역에서 목회자를 상대할 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교회 생활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자연법적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자연법이 존중되어야함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양 털과 베 실은 특성이 전혀 다르다.

특성이 다른 것은 조화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도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않는 것이나,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않는 것이나,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않는 것은 다 자연법에 속하는 것이다.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서도, 자연법과 상식은 존중되어야 할 기본법이다.

오목사는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면서 사회법을 무시한다.

하지만 반두르넨은,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백성으로서, 사회에서는 사회법의 지배를 받아야한다고 말한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목사의 발언은 지금 대한민국을 중세로마시대에서의 상황으로 칙각하고있다.

교회는 국가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교회를 국가 위에 놓으려는 작업은, 특성이 전혀 다른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려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특별법이 적용되는 곳이라고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은 자연법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에 장식 술을 만들지 않는다면, 겉옷은 쉽게 말려 올라가거나 형태를 유지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식 술은 옷의 형태를 유지해주면서 동시에 옷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준다.

장식술이 없다면, 옷의 모양을 제대로 줄 수 없을 뿐더러, 옷이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옷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을 넘어서, 미적인 감각을 살려서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

네 귀에 만들어진 옷의 술은 옷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있는 재능이나, 자신의 역할을 다듬고 잘 살려내는 작업을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7. 00:55

신명기 21장 1-23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무조건적인 용서는 성경적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공의라고 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라고 말씀하신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 대한 살인이기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이다.

땅에 흘려진 피는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을 하나님에 대한 살인으로 더럽히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는데 합당한 행동을 하여야한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주검을 만들어서 땅을 더럽히는 행위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행위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영원한 가나안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주검이 없는 거룩한 곳이다.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공동체에서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이 주어진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나 도움을 받아야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자에게 일차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삶 가운데 함께 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어려움이 생긴다면,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하는 것이 성경적 공동체의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은 가까이 있는 자들이 문제를 함께 공유함으로서 공동체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는 아직은 거룩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재물이 될 수 있다.

부림을 당하고 멍에를 맨 송아지는 이미 죄의 영역에 들어가있기에 속죄물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인자이시면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속죄물로 드려질 수 있었다.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도 흘려야하기에, 오직 깨끗한 곳에 흘려진 피로서만 정결케하는 효력이 있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창조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곳이다.

생명의 원천에 있으면서 아직 죄로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만 깨끗케하는 속죄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피흘림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셨다.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레위 자손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일정 권한을 위임한 자이기에 행함에 권위와 효력이 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가졌던 권한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상실된 직책이었다.

송아지의 목을 꺽음으로서 피살된 시체로 더러워진 땅에 대한 청결의식에 대한 공적인 판결이 레위 자손 제사장들에 의해서 판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암송아지는 피살의 죄를 감당함으로서 가까운 성읍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안수는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택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됨으로서 택한 자의 죄가 다 없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지만, 모든 인간의 죄가 다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은 아니다.

오직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장로들의 안수로 피살체에서 가까운 성읍이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정죄에서 자유케되었듯이, 성도는 믿음의 고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공의에서 자유케된 것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주의 속량하신 백성이 거룩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사람이나 짐승의 첫 태생을 죽이고서 속량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었다.

이러한 속량을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근원적 죄에 대하여까지 속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속량하신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되었던 상태에서의 해방이었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속량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듯이, 애굽에서의 속량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죄로부터의 속량을 예표할 뿐이었지 실체는 아니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해석을 하고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반면 새관점은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대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어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새관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지만, 기독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은 아담의 죄를 속량할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보혈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적 행동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10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가나안족속들과 달리 가나안 족속에 속하지 않은 족속들에게는, 대적하는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은 상태에서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준다.


포로를 결혼 상대로 맞이하는 것은 점령 당한 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생각하여야한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할 염려가 별로 없기에, 이들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인 대립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성도의 일상의 삶에서도 이원론적인 접근법보다는 일반 은혜의 영역을 자연법을 적용하며 살아야할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원리, 즉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야하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연법의 원리를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가 일반 은혜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성경의 원리를 따르도록한다면, 이는 결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랑은 객관적 진리를 넘어설 수가 없다.

편협된 사랑은 미움을 낳는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으면서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으로 마땅한 권리를 좌우하게된다면, 공동체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틀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결정이나 개인적 판단은 절제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키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객관적 진리의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한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토대에서 세워지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족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식에 대한 편애에서 출발된다.

자식은 모두 다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권리가 인정되어야만 한다.

자식에 대한 편애는 자식 간에 다툼과 미움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자식 간의 다툼이 꼭 편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편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가인의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가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패역한 아들의 첫번째 특징은 불순종이다.


불순종의 원조는 아담으로서, 아담의 자손은 모두 불순종의 아들이다.

불순종하는 아담의 자손을 교훈이나 두려움으로 다스릴 수 있다면, 성경은 교훈으로 끝나는 책이었을 것이다.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죽이는 방법은, 악한 아들을 다스리는 본보기가 되어, 다른 악한 아들에게 두려움을 낳게 하여, 악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이는 시내산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새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본질의 문제를 표면적인 교훈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사람이 교훈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있다.

톰 라이트는 인간이 꾸준한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간과한 주장이다.

복음은 교훈의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수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 명예까지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대속의 차원을 넘어서, 극단적인 모든 수치까지도 감당하신 것이다.

성도는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 때문에, 왜곡된 행동을 하는 것을 삼가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5. 22:24

신명기 20장 1-20절 말씀 묵상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를 넘어선다.

크고 대단하고 강하고….등등을 추구하는 세상의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하나님과의 대립 관계 가운데 추구함으로서 나오는 결과물들이다.

하나님께서 크고 강한 자를 사용하신다면, 쓰임받은 사람은 자신이  잘나서 쓰임받은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은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의 쓰임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시어 영광을 취하신다.

하나님께 사용받기 위해서 크게되고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욕심을 위한  것이다.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군대 장관이 아니고 제사장이 고하는 것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전투는 인간적인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의 확장이다.

이는, 비록 타락 후의 경우지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재연됨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가나안에서의 정복 전쟁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승리로 마침이 되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심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가 세상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구속 영역의 확장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치 영역이 모두 구속 영역은 아니다.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은, 대위임령을 수행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성도가 세상에 대한 싸움의 차이는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의 차이에 있다.

가나안 땅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졌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을 누리지 못함으로서, 땅은 구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성은 구속은 커녕, 통치의 영역 안에도 있기를 거부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진 가나안에서 안식을 성취하지 못함으로서, 안식의 성취라는 과제를 남겨주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실 종말론적인 안식의 땅에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관점의 주장과는 달리,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받은 백성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만이 참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백성이다.

성도가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한주를 살아가는 것은, 아담에게 안식의 조건으로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과 같이,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고서 이를 다시 수행하려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싸움에 임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권고는 믿음을 요구하는 권고이다.

싸움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싸움에 참여하지만, 승리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도의 일상에서의 성취물들은 인간의 공로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운명론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도 인간에게는 책임이 주어진다.

일종의 순종을 요구하는 책임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무책임한 운명론적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최선의 순종과 최선을 다하는 행위는,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의 고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믿음은 행위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가 아니듯이, 신자의 행위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하는 믿음의 고백이기에 공로적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구원을 위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논쟁이 끝이 없는 이유는, 행위를 공로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행위에 공로의 개념이 적용된다면, 행위는 구원과 연계되어서는 않된다.

하지만 공로의 개념이 아닌,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행위는 구원에 있어서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행위가 되어야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힌 자이기에, 행함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공로를 쌓는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

또 다른 행위구원론의 형태로 부각되는 “오직 충성에 의한 구원Saved by Allegiance Alone”을 주장하는 메튜베이츠Matthew Bates가 말하는 행위는,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행위구원론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5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은 믿음의 행위이다.

책임자들이 집에 돌아갈 자에 대하여 명령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형제들을 낙심시킬 것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근원에는 인간적인 염려가 믿음의 행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에는 자신에 대한 희생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성도의 행위가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옛 사람이 자신의 주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육적인 소욕은 육신을 입고있는 동안에는 필요하지만, 희생을 결단해야 할 때가 있다.

가나안 전쟁은 인간의 욕심을 쟁취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행위이기에, 손해 볼 것에 대한 염려를 버려야한다.

성도의 믿음의 행위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야하며,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야하는 것과 같다.

가나안 전쟁이 힘의 전쟁이 아니듯, 성도의 믿음의 행위는 자존감이나 이익의 싸움이 아니다.



9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이들을 구태여 진멸할 필요가 없다.

먼저 화평을 선언하는 것은, 먼저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기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전적인 상대방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화평을 선언하지만, 화평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세상에는 중립이 없다고도하지만, 일반 은혜의 영역이라는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이들을 적대시 하여서는 안된다.

귀신론에 집중되어있던 베레아아카데미는 세상의 모든 영역을 귀신의 영역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일반 은혜 가운데 성도들과 협력을 해야하는 영역들이 있다.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데이비드 반드루넨은 이러한 관점을 “하나님의 두 나라”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있지만,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일반 은혜 아래에서 자연법의 적용을 받는 모든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서까지 성도는 불필요하게 영적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다.

교회를 거부하고, 복음에 대항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기에, 성도는 이미 승리한 전쟁을 이들에게 선포하여야한다.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화평이나 전쟁 모두 다 통치를 위한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의 유형적 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성도의 세상에서의 삶은 아담이나 가나안에서와는 다른 것이 되어야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통치 명령을 근거로, 성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야한다.

성도가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의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이원론적 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일원화시키는 것이다.

이원론적 접근방식에서는, 성도가 마귀와의 싸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는, 흔히들 말하는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싸움을 통해서 통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있다.

성도는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서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변화를 시켜야한다.

하지만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된 신정통주의,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히나님의 단일한 구속 영역으로 봄으로서 우주적 교회를 추구한다.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은 곧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셨기에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듯이 진멸되어야만 한다.

남자는 여자와 아이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있다.

남자만 제거된다면, 여자와 아이의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에게 넘어온다.

멀리 떠나있는 성읍은 통치의 개념만이 적용된다.

이스라엘의 변방에 있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없다.

통치 영역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행사하면된다.

화평을 통한 지배는 조공을 받음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

하지만 구속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안식이 제공되는 구속의 영역을 예표하는 곳이다.

구속 영역에서는 남아있는 여자와 유아들이 이스라엘의 영역에 포함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속 영역은 배타적 영역으로서, 이방인들과 합류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전통적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배타성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 형태인 선교적 교회는, 배타성을 제거하고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일상에서의 예배를 추구한다.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가나안 족속을 진명하는 것은 일종의 에덴에서의 상황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성격을 가지고있으면서 동시에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헤렘 전쟁을 성격을 지니고있다.


가나안의 정복은 에덴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에덴에서의 실패를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는지를 검증해보기 위함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었으며 사단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공격을 시도하는 장소였다.


아담은 에덴에서 뱀을 쫓아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게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출애굽을 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나안을 허락받았다.


이미 가나안에서 살고있었던 족속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었기에 가나안에서 이들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은 마치 에덴에서 뱀을 존재를 허락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가나안 지역에 있던 족속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에 대한 배타성을 지니고있다.


가나안 지역의 호흡이 있는 자들은 다 하나같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이들이었기에 가나안 땅에 있는 이와같은 족속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와 공존할 수가 없다.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진멸, 즉 헤렘 전쟁은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이 마땅히 하였어야할 전쟁이었으며, 동시에 마지막 심판 때에 유기될 존재를 예표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찰 때 애굽의 이스라엘을 불러서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심판은 이들의 죄악이 보편적으로 가득할 때 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세상의 죄악이 가득할 때에 임할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이 땅에 임할 최후의 심판과 이 땅에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예표하고있다.


아브라함이 멸망받을 아모리 족속 한 가운데서 생활하였던 것과 같이, 이 땅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되기까지 이 땅에 거하는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악한 자와 공존은 마치 세균이 묻어있는 주사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면역력이 한계가 있듯이 오염된 것은 건강한 매체를 감염시켜서 죽음에 이르게한다.

비록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민족도 가나안의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지만, 가나안 족속들은 외적인 타락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내면의 죄성이 가장 활성화되어있는 상태였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깨끗하였을지라도, 전염으로 인한 부패의 가능성이 충분한 이들이었기에,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들을 멸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없이 성경을 보는 이들은 종종 기독교를 잔인한 종교로, 혹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잘못을 범하기도한다.



19  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과실을 맺는 수목 자체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환경이다.

다만 악한 인간이 이를 악용할 뿐이다.



20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수목은 전쟁도구가 될 수 있듯이 자연을 이용하는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다만 전쟁의 도구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결코 전쟁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전쟁의 방법을, 각 나라가 전쟁을 위해서 첨단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까지 적용해서는 안된다.

신약 시대의 인간의 전쟁은 단지 욕심으로 시작된 것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4. 22:52

신명기 19장 1-13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을 근거가 없는데도 축복을 받는 것은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일종의 살인한 자가 도망할 도피성과 같은 곳이다.

도피성에 도망한 이들은 반드시 판결을 받아야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판결을 받기 위해 검증 과정에 들어간 이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수 많은 살인을 한 자들이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죽인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의 행위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우러나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도피성과 같이,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만, 종국에는 그들의 행위가 세밀히 조사되어 형집행을 받게되는 것이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역 어디서나 쉽게 도달될 수 있는 곳에 세워졌으며,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만약에 광활한 지역 전체를 한 구역으로 정한다면, 살인자가 도피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며, 도피성의 개념은 이스라엘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이 되었을 것이다.

도피성은 이스라엘의 영역 확장과 더불어 확대되어 세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피성은 길을 닦아서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함으로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의 도피성의 역할은 한시적이었지만, 참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는 성도의 영원한 도피성이 되신다.

도피성이 가까이 있고 길도 닦여있듯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쉽게 열려있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가지 철학적 논리나 고도의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2)”고 하신 말씀과같이, 영원한 도피성이 되신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자에게만 구원자가 되실 것이다.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악행이 증명되지 않고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억울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드러내심으로서, 억울한 마음을 갖는 이들이 없도롱 배려하신다.

도피성은 구원과 심판을 위한 곳이다.

도피성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징검다리와 같다.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 이는 모든 인간에 해당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은 하나같이 복수심에 불타있는 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죽이고자 선악과 금령을 정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에덴 바깥으로 내어쫓으신 것은, 아담과 한 약속, 즉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을 지키셔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께 향한 복수심에 불타있다.

인간은 하나님없이도 잘 살수 있다는 반항위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배척을 당함에 대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삶을 시작함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에녹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개벽을 뜻한다.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은 스스로 만든 도피성이면서, 도시의 출발이 되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도시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살아가고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의식이나 생각을 안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에게 일반 은혜라는 또 다른 보호막으로서의 도피성을 제공하심으로서, 도시생활이 한시적으로 보호받게끔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도피성에서의 보호가 한시적이듯, 일반 은혜 가운데 있는 이 세상도 심판때까지 한시적으로 보호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이, 이스라엘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마지막 때에 일반 은혜의 보호막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삶의 문화는 스스로가 보아도 하나님께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세운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땅을 더럽히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다.

더럽혀진 땅은 저주를 받은 땅이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0-12)”

가나안의 풍요는 저주받은 땅과는 대조를 이룬다.

땅은 축복의 근원이면서 저주의 근원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땅의 소산을 풍요롭게 먹을 수 있었지만, 에덴 바깥의 땅은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로 가시덤불와 엉겅퀴를 내게되었다.

가나안의 풍요는 저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가나안은 도피성과 같이,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 한시적으로 보류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의 땅에서 잘못되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타락한 인간이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더 확인하는 곳이었다.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은 도피성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살인한 것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성을 쌓음으로서 스스로를 보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만들라고하신 도피성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에녹성으로부터 시작된 도시는 도피성의 역할과 같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도시에서 이루실 구원의 표식이 된다.

도시인들에게 주어진 일반 은혜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시에서 이루실 구원의 표식은 예루살렘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구원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제공해주진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거듭난 이들에게만 영원한 구원의 도성인 새예루살렘이 영원한 도피성으로 제공될 것이다.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영원한 도성을 예표하는 가나안은 지속적인 성결작업이 필요한 곳이다.

만약에 아담이 공로로 인하여 영원한 나라에 들어갔다면, 인간이 그곳에서 범죄의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 할 수가 없다.

마치 결혼 전에 연애를 잘하였다고 하더라도 결혼 후에 변화하듯이 인간은 변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존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이들에게는, 궁극적으로 기업으로 주실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다

그리스도의 피는 무죄한 자의 피흘림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이들은 영원한 죄용서 가운데 있게된다.

가나안에서는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피흘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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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3. 22:31

신명기 18장 15-22절 말씀 묵상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무수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호렙산 총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였으면서도,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거역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나마 모세로 인하여 죽음을 피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비록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선지자의 역할은 광야에서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땅의 수확을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가나안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단순한 선지자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가면서,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선지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비롯하여, 다윗의 범죄의 한 가운데 임해야만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일으키시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했기에, 이스라엘의 동족 가운데 세워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최종적인 선지자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어왔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요한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로 오신 그리스도는 죄악의 한 가운데 오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도는 그리스도가 담당하신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죄의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문제이기에 또 다른 각도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로서 짓는 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성전이 더러워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또 다른 차원의 심각한 문제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죄의 문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에 성도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하나님을 뵙는 것을 두려워하고 애써 하나님을 피하는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자로서의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새관점의 주장과 달리 이스라엘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구속을 필요로하는 상태이지 결코 구속된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에게 연약하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고 스스로 강해보이는 태도가 교만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라는 솔직한 고백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이러한 고백은 제사장이시고 왕이시고 선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무리 가운데서 사역을 하셔야만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는 예언자의 개념보다는 대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선자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면, 호렙산에 모인 총회의 날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없다.

호렙산 총회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호렙산 총회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쇼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쇼를 보는 이들은 두려워 떨 필요가 없듯이, 하나님의 관한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이들이다.

선자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하나님에 관한 말이냐는, 성경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된 사람의 말이냐, 아니면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냐의 차이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일종의 연구 자료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기록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약에서는 선지자의 입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사람의 책이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인 책일 수 밖에 없다.

칼 바르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철학적 사고로부터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칼 바르트의 신론, 기독론, 교회론은 이러한 바탕에서 정립된 것이다.

선교라는 용어로 인하여, 선교적 교회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선교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의 선교를 적용한 개념이다.

선교적 교회는 Missio-nal Church, 즉 미셔널 처치, 혹은 미션얼 처치라고도 불리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Dei”는 WCC에서 채택한 개념으로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WCC의 교회론이다.

선교적 교회에서 보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기록으로서, 교회의 중심에는 인간의 문화가 있다.

선교적 교회는 인간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이러한 변화는 호렙산에 총회로 모인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게 멀리 간 개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참고서적과 같이 사용하여서, 스스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선교적 교회의 발상이 얼마나 교만한 인간의 생각인지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주고있다.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즉 대언자들의 대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참고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은 사람들 앞에 구원과 심판을 선고한다.

성경이 인간 세계에 보편적으로 놓여있는 현재의 상황은 이 땅에 대한 구원과 심판을 선고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최종적 선지자는 그리스도이지만 이전의 가나안의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이었다.

다른 신의 이름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거짓된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만, 이러한 이적과 기사가 증험과 상취함과 구별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있는게 한정되어있다.

증험과 성취함은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구약과 사도 시대에 한정되어있다.

정경이 갖추어진 신약시대에는 모든 말씀이 성경으로 전달된다.

이적과 기사에 집중하는 신사도운동은 성경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방법이다.

인간은 분별력이 없기에, 정경이 갖추어진 시대에도 증험과 성취함을 찾는다면, 분별력의 상실을 가져올 뿐이다.

신사도운동이나 경험을 추구하는 이머징미셔널 처치에서의 관상기도, 혹은 레노바레, 트레스디아스같은 운동들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이머징처치의 선구자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진리는 나무테와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는 펜넨베르크의 제자인 스탠리 그렌츠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펜넨베르크의 자의적 만유내재신론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말씀은 주관적으로 점증되는 진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이며, 구원과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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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 22:57

신명기 17장 14- 20절 말씀 묵상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하였을 때에는 여러가지 긴장감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잠재되어있던 본성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일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나안에 입성하였을 때의 긴장감이 사라지게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성대로 가게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주변의 이방민족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들의 본성대로 왕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위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심성을 가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왕을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종속됨으로서 안정을 찾기 원하는 종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을 갈망하는 본성이 타락으로 인하여 왜곡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를 우상 숭배와 연결시킨다.

이스라엘은 므낫세의 범죄를 비롯하여 왕들의 범죄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상에 자신을 종속시키려는 백성들의 본성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면서,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노예 본성은 목사를 신격화시키려는 교인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목사는 결코 의지할 대상이거나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사는 날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예 근성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할 것이다.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권위는 전부 거짓의 영에 의한 것이다.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과의 혼인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상실시켰다.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는 것이며, 이는 아담 안에서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시키며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보여준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의 타락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타국인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맥락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할 왕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아브라함의 자녀에게서 나와야한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왕같은 이들이다.

성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땅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종속시킨다면, 이는 자신 안에서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왕권을 실추시키는 것이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솔로몬은 가장 지혜있는 자였지만, 그 지혜가 교만이 되어 타락의 길로 빠져 들 수 밖에 없었다.

병마가 많아진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세상을 의지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솔로몬의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버렸다.

애굽을 비롯한 각국에서 보내온 말들을 비롯하여, 병거와 마병의 규모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이방의 부정적인 것들도 같이 들어온다는 것에 대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인간적 시행착오로 얻은 지혜를 모두 가질 수 있었지만, 이미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얻은 지혜는 이스라엘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성공한 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타락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풍요는 이스라엘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결국 패망 직전에 애굽에 돌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수치를 행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소욕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한다.

성공한 이들은 솔로몬과 같이 지혜의 한 가운데에서 지혜의 그늘에 파 묻혀버릴 수 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겸손하고 조심해야한다.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모세의 본론은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차게 들어갔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상은 행함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시야왕은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을 보수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서야 옷을 찢고서 통곡을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에서도, 요시야왕의 통곡을 기뻐받으셨다.


율법책이 성전을 보수하다가  발견된 것은, 모세의 명령과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율법 책이 왕의 곁에서 읽혀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왕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구현하여야하는 의무를 가지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드러내는 자로서,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곁에 두고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할 자였다.


이스라엘 왕들의 실패는 왕으로서의 아담의 타락을 기억하게하며,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타락된 존재임을 드러내주고있는 것이다.


왕은 백성을 대표한다.


처음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


처음 아담의 반역이 모든 인류의 타락을 초래하였듯이, 이스라엘 왕들의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타락을 초래하였다.


모압 땅에서의 모세의 강론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면서 그리스도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들의 타락의 역사였으며, 왕들의 타락을 통해서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타락을 증명해주고있다.


타락한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이 된 존재이기에,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말씀을 곁에 두려고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에게 행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있던 모세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였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왕권을 회복하심으로서, 신자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해내어 자기 백성 삼으셨다.


신자는 왕되신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이미 창세 전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시고자 작정된 자들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된 명령과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요구되었던 순종이다.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 가운데 택한 자를 그리스도께 주심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왕으로서, 그리고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택한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왕들의 범죄로 인하여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 왕되신 그리스도는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성부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심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다.


신자의 삶은 모압 땅에서 모세를 통하여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향기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성도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처음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성도가 매일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한 첫번째 요구 사항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성도 안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왕위가 장구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품고 이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는 비록 이를 다 실행할 수 없지만,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구한 날을 살아갈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 백성일 수 있다.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하며, 선포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와 불순종은 양립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불순종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듯,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들의 실상을 대표해서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불순종은 순종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필요성을 제기해 준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지만, 다윗의 범죄는 육신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구원자의 필요성을 제기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레위지파를 따른 거시 아니라 멜기세댁을 반차를 쫓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은, 이 땅에서의 가나안을 완성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육신에 속해있는 이스라엘을 영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과 이에 속한 백성들만이 장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성도에게 참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눈물이 없을 것이다.


전쟁과 서로를 상하게하는 일들과 환경의 재앙과  낙담과 슬픔과 이별과 외로움과 질병과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에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리워졌던 천상의 세계가 드러날 것이며,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인간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성도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이 땅을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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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31. 21:45

신명기 16장 18절- 17장 5절 말씀 묵상



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공의로 재판하는 것은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공의의 재판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결이 유지 될 수 없으며, 불의한 재판에 의해서 자리잡게된 악이 독버섯 처럼 자라서 공동체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공의의 재판은 암세포를 제거하여 건강한 세포를 보호하는 것과 같다.

불의한 재판은 암세포를 보호함으로서 암이 몸 전체에 퍼져나가게 함으로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시행되는 공의의 재판은, 악한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기에, 가나안이 완전한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는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가나안은 에덴에서 성취되었어야할 영원한 안식의 모형으로서, 에덴에서 실행되었던 하나님의 공의가 재연되는 곳이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근거가되며, 처음 행위 언약인 아담 언약을 근거로하여, 범죄한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죽으리라한 약속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공의가 실행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의의 실행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은혜는 아담 안에서 약속된 죽음이 실행됨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 언약을 약속하실 때 이미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하나님이 공의를 실행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댓가를 치루지 않고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의가 실행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악에 대해서는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다.

가나안 땅에서 실행되는 공의의 재판은 아담에 대한 공의의 재판을 상기 시키면서, 최종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한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새관점은,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는 일단 무시하였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무시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기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행위에 의한 최종적 심판을 받게된다는 이론을 펼치게 된다.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범죄의 문제와 재판의 문제는, 이미 받은 은혜와 대립되는 모순이 생긴다.

행위에 의한 심판이 남아있다면,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은혜이며, 이는 구원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이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반펠라기우스semi-Pelagius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로서, 신약의 성도라 할지라도 그 행위로 말미암아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는, 어떻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본을 보여주신 분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에서의 공의의 재판은,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범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음을 유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만이 최후의 심판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에, 굽은 재판은 하나님의 공의를 손상시킴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곳이 되지 못한다면, 가나안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실현함으로서 이 땅에 완전히 임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곳이 되어야한다.

국가의 사법부에서 돈이나 권력이 있는 자가 이긴다면, 그 국가는 공의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교단 재판국에서 돈이 많은 자가 이긴다면, 상황은 더욱 참담하고 암울하겠지만,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계의 현실이다.

S교회의 O목사 사건이 사회법의 판결을 받아야만 했던 것도 그만큼 교단 재판국의 공의와 권위가 상실되었음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공의가 상실된 이스라엘이 패망의 길을 걸어가야 했듯이, 공의가 상실된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굽은 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교회가 세상의 걱정이 되고있는 것이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공의와 우상 숭배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대부분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있으며, 가나안에서의 우상 숭배의 근원에는 아담의 불순종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상과 겸하여 섬김을 받지 않는다.

인도에서 복음 전파가 힘든 것은,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하여 포용적이지만 정작 기독교는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배타적이다.

현대신학자들은 타종교와의 불화보다는 평화와 타협을 추구하려한다.

세상적으로는 포용적인 것이 바르게 보여도 하나님은 우상에 대하여 배타적이신 분이시다.

무슬림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일한 하나님으로보면서, 인종 간의 평화를 위해서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시도는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신학자들의 한 가지 시도에 불과하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옳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가장 큰 악은 우상 숭배이며, 이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대상이다.


1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제물이 될 수가 없다.

제물은 죄를 없이하여주는 것으로서,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흠은 죄의 결과물로서 이미 죄 안에서 죽어있는 것이다.

흠은 일종의 죄의 결과물로서 결코 깨끗한 것이 아니기에 제물로서의 효력이 있을 수가 없다.

제물은 궁극적으로 단번에 드려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흠이 있으면 안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죄로부터 깨끗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최초로 언약은 어긴 자는 아담과 이브였으며, 이들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섬겼다.

므낫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여호와의 전의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러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졌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는 자신들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하였다.

므낫세의 죄악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의 근거가 되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할 백성임을 증거해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교만을 버려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아들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이들일 뿐이다.


4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단호하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증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선진국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면서,  사형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있다.

이로 인하여 성경의 죽이라는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기 위한 일반 은혜의 시대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명령과의 차이는,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가증한 악으로 여기시지만,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문화의 한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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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 2018. 5. 30. 22:35

신명기 16장 1-17절 말씀 묵상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유월절을 행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현재는 과거를 통하여 있게 마련이며, 과거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규명해준다.

유월절에 대한 기념은 구속을 통한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황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상황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있다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져야했다.

현재의 상황의 문제점은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문제의 원인을 파악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돌아보아야만 하는 과거의 큼지막한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창조 타락 구속의 사건 가운데 어느 정도는 해석 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기념을 통하여 현재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교만해 질 수 밖에 없다.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유월절을 행하는데 있어서 소와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민족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민족이면,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함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한다.

출애굽이 완전한 구속의 사건이었다면,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념하는 유월절은 완전한 구속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제사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위한 그림자로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으며, 그 가운데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도 구속의 은혜의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은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용서를 받고 이 땅에 새롭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확장된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식으로는 언약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안에 머무를 수가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단번에 드려짐으로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념하는 유월절이 완성된 형태라면 유월절 제사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읺을 것이다.

유월절 제사는 출애굽에 대한 기념이면서 동시에 실체로 오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표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성전에서의 제사 모두는 유월절 제사가 재현되는 것이며,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실체이며, 이스라엘이 행하는 제사는 구원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단지 희생적 본을 보여주신 분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증거를 가지고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의한 속죄 사역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의미까지 왜곡시키고있다는 것이다.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급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위해서 인간적인 온갖 것들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위에 자신들의 인간적인 욕심들을 더 하였을 것이다.

누룩과 같은 인간적인 욕심은, 바리세인이나 사두개인들을 교훈과 같은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출애굽에 자신들이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으며, 순전하지 못하고 진실되지 못한 생각들이 그들을 혼란케하였을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심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는 구속을 위한 모형이었다.

한 주의 수고를 통한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고를 통한 안식이었다.

진정한 출애굽은 이레동안 무교병을 먹음으로서, 오직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서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4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유월절에 고기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잔을 먹는 것과도 연계시켜 생각해야 한다.

성찬은 오직 단번에 이루신 구속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지,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룩이 보이는 것이나, 고기를 아침까지 두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인간의 욕심을 성취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성도가 누룩과 같은 바리세인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기 때문이다.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자신이 편한 시간에 유월절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통로가 다양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희생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는 배타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애굽 안에서 모임을 가지지 않고, 애굽을 나와 시내산에 성회로 모인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

배타성이 상실된 교회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수용하면서 또 하나의 종교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종교 포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다양한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시내산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게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라는 의미로 쉽게 다가올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모이는 교회와는 달리, 교회가 삶의 현장으로 이동된 교회를 말한다.

선교적 교회는 모든 이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모이는 교회에서도 불신자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세례교인이 되기 이전의 준비되어지는 단계이다.

세례는 주를 믿음으로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선포되는 것다.

선교적 교회의 구성원에게는 세례의 의미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예배는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이들만이 드린다는 배타성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들은 선교를 위해서 스포츠센타나 커피샾, 심지어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드리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어진 배타성을 존중해야한다.



8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유월절의 결과로 성취된 가나안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성취된 곳이었으며, 누룩이 없는, 즉 오직 인간의 욕심과 공로가 제거된 오직 그리스도만의 공로로 성취될 안식을 예표하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영원한 나라에 대한 기다림의 장소였지 결코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9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칠칠절은 보리와 밀의 단순한 수확을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물질적으로만 축복하시기 위해서 가나안에 입성시키신 것은 아니다.

가나안이 진정한 영적인 가나안이 되기 위해서는 칠칠절이 영적인 추수를 하는 날이 되어야한다.

시기적으로는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시기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칠일이 일곱번 반복됨으로서 완전한 희년을 선포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먹고 배불러서가 아니라, 애굽에서 종으로 있었던 자신들이 해방되었음으로 인해서다.

이 땅에 임한 진정한 기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성령의 강림이라는 결실과 연계되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로 인하여 육적인 만족을 얻었을지라도, 신약의 성도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영적인 충족을 얻게 된 것이다.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초막절을 기념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풍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오게된 것이지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풍요가 있기까지는 과거의 고통이 기반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 직전에 예레미야로부터 교만에 대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초심을 잊어버렸기에 교만해진 것이다.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알면 인간은 쉽게 교만해질 수 없다.

성도는 자신이 초신자시절과 불신자였을 때 어떠했는지를 기억함으로서, 교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만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초심을 잃지 말아야할 것이다.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에서의 복된 생활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 일 년에 세 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뵙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고 의무이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인간은 쉽게 나태해지고 과거를 잊게 마련이다.

받은 복을 힘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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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9. 23:25

신명기 15장 1-23절 말씀 묵상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매 칠 년 끝에 면제해 줄 대상은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려면, 서로에 대하여 빚진 관계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다.

안식은, 모든 과제가 완성된 곳에서 이루어진다.

안식은 창조주로부터 시작된 창조 사역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두 가지의 빚을 졌다.

하나는 에덴에서 주어진 통치명령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 선고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있으며, 주권자는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피조물은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창조주의 요구 조건은 순종이다.

순종은 일종의 종속을 의미하기에 주권자에게 귀속되는 피조물의 표현 방식이다.

하나님께는 창조주로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에 안식을 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불순종한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대신 속죄 사역과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심으로서, 믿는 자에게 안식을 허락하심으로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충족시키신 하나님의 요구조건은 통치명령과 선악과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은 존재 자체에 주어진 통치명령의 과제로서의 빚을 감당하심 것이고,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마땅히 죽어야할 빚을 감당하신 것이다.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서 출발된 생활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선취하신 안식일은 주일로서, 한주의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일인 주일로부터 한 주가 시작된다.

토요일은 제 칠 년을 뜻하는 종되었던 수고의 끝으로서, 참된 안식일인 주일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빚을 청산하기 위한 종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제 칠년의 끝은 수고의 끝이며, 종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기초 위에서 출발되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 칠년의 끝에 빚진 자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주실 구속 사역을 통한 안식의 그림자이다.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되지 않은 이들로서, 그들에 대한 구속과 안식이 준비되어있지 않기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그리스도르르통해 성취될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기에, 이방인에게 이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제 칠년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단순한 사회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 종사자들이 제 칠년, 혹은 희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면제해주는 것을 사회에 적용하려고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안식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말씀하심으로서 거룩한 진리가 남용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명령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한 한시적인 것이었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이 재연된 것이었지만, 에덴에서의 축복이 한시적 명령에 대한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은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나라를 예표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미성취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명령이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타락으로 인한 새언약을 예비하여야하는 명령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으로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이다.

조건적 축복의 성격을 갖는 행위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복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하는 조건이 달려있는 것이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 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신학 출발의 핵심으로 두었던 것은 올바른 관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패의 진행형의 상태였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약속되지도 않은 이방신들의 복을 바랐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섬겼던 우상들은 풍요를 위한 신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된 통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음란한 신의 통치를 받기를 바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하여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을 연합을 뜻하는 남녀의 결합, 즉 음란을 일삼았던 것이다.

음란은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우상들의 신전을 중심으로 횡행하였으며, 우상의 신전의 여사제들은 바로 창기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이미 간음한 자이었기에 간음과 음란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렸다.

여러 나라에 대한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 (창 1:28)을 통하여 제대로 실행되었어야했는데, 통치를 하여야 할 대상으로서의 생물의 일종인 뱀으로부터 속임을 당하여 통치를 받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사단의 통치를 받는 존재였음을 확인해주고있는 것이다.

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공동체의 일원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가난을 방치하게되면 가난한 자는 가진 자에 대한 원망이 쌓이게되며, 빈부 격차의 증가는 공동체성의 파괴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연합이라는 원리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의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가난한 자인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의 풍요를 인간들과 나누심으로서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셨다.

리스도의 나눔이 교회공동체를 이루셨듯이, 가난한 자에 대한 공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연합을 위한 공평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풍요를 나누시는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한정된 것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나눔은 보편적인 자연법을 근거로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의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세상에서 나눔의 원리를 실행하여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가나안에서의 나눔과 구제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듯, 교회에서는 사회에 대하여 나눔과 구제를 행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사회에 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교회 건물의 확장 만큼이나 나눔과 구제를 실행하였다면,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일꾼들을 모으실 때 아침 9시에 온 자와 오후 5시에 온 자에게 동일한 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대상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심지어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경우도 있다.

나눔과 구제는 경제 원리로 적용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할 만큼, 나눔과 구제는 가진 자의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나눔은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 못지 않게 나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게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은 자칫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키며, 결국 불편한 관계로 서로를 멀리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된다.

도와주는 관계와 도움을 받는 관계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관계이다.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좀 더 지혜롭게 앞장선다면, 개인간의 나눔보다는 교회 차원에서의 나눔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인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자본주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개인보다는 교회가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공동체적 나눔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가 않다.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하기에 아끼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나눔을 통한 공동체적 사랑의 표현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할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던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나누는 자의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희생이 없는 나눔은 자칫 자신의 과시일 수 있기에, 사랑하는 자를 위한 희생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과 다시오심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과 육신이 거하는 땅의 연합으로 완성된다.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는, 이 땅에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이 땅이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참여되어있지 않았음을 표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 땅에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치는 것은, 천상의 풍요를 이 땅의 가난에 대하여 손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일곱째 해에 종을 놓아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이 이 땅에서 종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것이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

종에서 해방될 때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단에 빠져들었던 어떤 교수는 자신이 공부하던 책들을 전부 불태우고 이단교회의 목사가 된 이도 있었다.

이는 잘못된 극단적인 이원론 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닦아 놓았던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어도, 성도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맺던 세상의 산물을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사용하여야한다.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핵심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과 하나님의 명령의 수행이었다.

성경의 주요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종에서의 해방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한 개념이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노예 의지 개념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새관점주의자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 할 수가 없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증명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고 증거를 보여주시고 간섭을 하셔도, 인간이 행함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하는 것이 노예 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노예 의지를 가진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고 성령의 내주하심만이 노예 의지에서 벗어나 거듭난 자로서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자유를 얻은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기를 즐겨하여야하며, 공적으로 이를 증거하여야한다.


18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섯 해 동안의 섬김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충만한 기간의 순종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받은 성도가 자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처음 난 것은 그 다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처음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모두는 타락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 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성막은 시내산의 모형이었으며, 성막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성되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성도들이 같이 먹으면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시내산 앞에 모인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궁극적으로 성도의 교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면서 완성될 것이다.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흠없는 성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같다.

그리스도가 흠이 있으신 분이시면 우리를 대신할 구속주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흠이없게 창조하셨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었지만, 모든 문제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서 시작된 것이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흠이 있는 존재들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불결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성물로 드려질 수가 없다.

대속을 위한 속죄물은 그 자체로 흠이 없어야 대속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부정한 자이기에, 표면적인 부정함은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피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기에, 거룩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정한 자이기에 거룩함이 없이 생명에 참여될 수 없는 존재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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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8. 22:14

신명기 14장 22-29절 말씀 묵상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가나안이 하나의 자립적 공동체의 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만을 먹었기에, 땅에서 수고하고 소산을 먹는 것은, 직접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은, 과연 인간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지 점검이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를 제대로 완성시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제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적합한가에 대한 검증의 매개체가 되기도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는 신정체제라는 제도적 이스라엘의 기반을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제도적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향하는 그림자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 안에서 구현되어야만 했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손상됨과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궁극적 목적지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의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기 위한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어야하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의 복합성의 유지를 위한 것이다.

십일조는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며, 십일조는 자신의 소산에 문제가 안될 정도의 나눔의 몫이 정해진 공동체의 운영원리이다.

십일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적 원리의 표현 방식이다.

구약에서 십일조가 성전을 중심으로한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면, 신약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한 교회공동체의 틀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십일조가 외형과 형식을 갖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제라는데 수직적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듯이, 신약의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중심으로한 각종 헌금이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만큼이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여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이 없는 십일조의 강조는,  교회가 세상의 경영원리를 따르는 세상적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국가에 바쳐지는 조세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용되어지지만, 신정체제를 이룬 가나안에서 바쳐지는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십일조를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만 먹어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 모여서 여호와의 강림하심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가리키고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곳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식탁 교제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한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한 유형의 교회는, 교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문제를 안고있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는 유형의 교회는, 십일조가 주로 외적인 교회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지고있다.

도시 교회는 공동체 내에서의 수평적 교제가 약화되면서 십일조는 강화되는 왜곡을 수정할 과제를 안고있다.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십일조를 먹고 즐거워하는 곳은 반드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되어야한다.

아무 곳에서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만의 즐거움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 거리가 멀어 소산의 십일조를 옮길 수 없을 경우는, 돈으로 가지고 가서 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려를 악용하여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 중심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기보다는, 외적인 형태만 남기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악용한다.

가나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담아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만한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곳이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멀면, 이를 핑계로 십일조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는, 인간의 입장을 배려하심이면서 동시에 핑계거리를 차단하기 위하심임을 알 수 있다.

돈으로 성물을 사는 것이 허용된 근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하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인간은 이마져도 악용하며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이 중심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은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따르지 않는 형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외식과 허영, 욕심등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성전을 청결케하신 것은, 인간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그릇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도적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면서, 제사의 개념 대신에 예배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비록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목회자는 전임 사역자로서 성도들이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의 일원이 책임을 져야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구성되어있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성된 것이다.

최초의 나눔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일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은 이 세상을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고아이며, 신랑되신 예수님이 필요한 과부의 인생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고아이면서, 나그네요, 과부인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감당하신 것이다.  

공동체적 책임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도우심을 베푸시는 것이다.

성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공동체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적 희생을 돌아보는 행동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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