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7. 22:44

신명기 4장 1-14절 말씀 묵상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준행하라고 들려주는 규례와 법도는, 가나안에서의 생존과 존속을 위한 조건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 것은 자연법적 생존 원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이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이 생존하기 위해서 제시된 명령과 유사한 형태를 띄우고 있다.

아담과 이스라엘은 동일하게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 관계에 있으면서도, 행위 언약을 맺은 시기가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점에서, 구원을 위한 은혜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행위 언약으로서의 규례와 법도는 자연법의 모체가 되기에, 일반 은총의 영역과 특별 은총의 영역이 혼재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세 언약은, 본질적으로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은혜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생존을 위한 조건적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다고 할 수 있다.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타락하기 전의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였는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도 자기 중심적으로 한다.

하나님을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데 반하여,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이 기록한 책으로 보고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타락한 인간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음으로 인하여, 성경은 인간적으로 해석하면서 나타나게되었으며,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성경을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식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함으로서, 옛 뱀의 유혹을 재연시키고 있다.

인간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또한 시내산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서, 비로소 사도들이 복음을 깨닫고서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가 없다.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불순종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보다는 대부분 유혹에 의한 분별력 상실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에 이끌려 그들의 신에 분향하게된다.

모세가 언급하는 불순종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좇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권위까지 올라갈 수 있기에,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순종을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다.

권위자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의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있고,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모세가 자신의 역할을 분산시켜 위임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기도한다.

순종은 단순히 권위자의 말을 듣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따르는 것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 타락한 시대에  이를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 자기의 말에 순종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목회자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도 자기를 섬길 것을 요구하는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다.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이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민수기 25장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바알브올을 섬기는 것은, 행위 언약을 어긴다는 관점에서, 성격상 에덴에서의 유혹에 의한 반역과 같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다.

너무나도 보편화되어있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베푸시는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한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고, 생존의 조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관한 것은 아니다.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가나안에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생존의 조건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킬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규례와 법도를 지킬 능력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규례와 법도를 매우 잘 지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기에,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뿐만이 아니라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고 한다.

윤리적 기독교는 다시 가나안의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를 유대교로 편입시키려는 유대인들의 계략에 말려드는 현상이다.

이는 새관점을 배우는 많은 이들이 유대인의 장학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누리는 풍요는, 하나님의 공급 하심에 의한 것이다.

단순한 삶의 원리라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누리는 풍요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에 의한 것이기에, 성도는 풍요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해 나아가야한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도가 누리는 풍요는 단순한 형식적인 삶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관계성에서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들이다.

성도의 풍요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자족하면서 누리는 평안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는 삶 가운데 누리는 평안으로 인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

현재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은 분명 교인들의 삶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는 것이다.

출애굽 여정은 단순한 애굽에서의 탈출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여정이었다.

신자의 삶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통해서 풍성해진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타락은 인격의 손상을 가져왔으며, 구속은 인격의 회복을 가져온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는 인격적 관계에 있다.

인격은 서로를 존중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된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자신의 행동 방식을 존중하셨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는 잘못된 결정도 존중되었던 것이다.

인격적 관계는 서로를 존중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신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존종해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신자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누리는 삶의 기쁨을 경험할 특권이 있다.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자연법의 모체가 되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인 것과 같이,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공의는 이 세상을 지탱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하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없으시다면, 이 세상에서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적용이 되고,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인 율법 앞에서 어떻게 불의한 존재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있기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모든 인간들에 대한 심판을 예표하고있다.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성경의 진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확증된다.

전통적 역사에는 진리와 교훈이 담겨있다.

해체와 재건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전통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진리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대인들은 만물보다 부패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인간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말씀하신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쳐야하듯이,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 하였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속주이심을 가르쳐야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역사의 가르침 가운데 알게될 때, 지금과 같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들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넘치는 인터넷 정보의 한 가운데 살고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첨단 문명일수록, 하나님의 가르침이 배제되는 길로 달려가기에, 심판의 시기를 더욱 앞당기고있다.

찬란한 첨단 문명이 진리의 암흑시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거느심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극도의 두렵고 떨림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어야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불길과 어둠과 흑암 가운데 호렙산에 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는 대조를 이룬다.

호렙산에 임하신 하나님의 모형으로 이루어진 성막과 지성소는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가야했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세워진 성전되신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형식을 통하여 기쁘고 평안함으로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는 심판하시는 두려우신 분이시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성도에게는 기쁘게 다가갈 수 있는 간절한 사모의 대상이 되신다.

이는 행위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과 새언약 안에 있는 성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가까이 다가오시지만 가까이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언약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임을 증명해주고있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새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뿐이다.


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십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자연법의 모체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이 주어졌듯이, 자연법 아래에 있는 모든 인류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가나안이라는 특수 상황은 궁극적으로 성도가 바라보아야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조건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가나안에서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은 아무리 깨끗하게 정화되어 가나안에 들어간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가나안에서 살 자격이 없는 죄성을 가진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안식의 주인이 되신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6. 22:16

신명기 3장 12-29절 말씀 묵상

12  그 때에 우리가 이 땅을 얻으매 아르논 골짜기 곁의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 산지 절반과 그 성읍들을 내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주었고
13  길르앗의 남은 땅과 옥의 나라였던 아르곱 온 지방 곧 온 바산으로는 내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노라 (바산을 옛적에는 르바임의 땅이라 부르더니
14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경계까지의 아르곱 온 지방을 점령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이 바산을 오늘날까지 하봇야일이라 불러오느니라)
15  내가 마길에게 길르앗을 주었고
16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길르앗에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었으되 그 골짜기의 중앙으로 지역을 정하였으니 곧 암몬 자손의 지역 얍복 강까지며
17  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지역이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기슭에 이르기까지의 동쪽 지역이니라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 땅은 그들만의 공로에 의한 댓가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주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땅을 취득해서 거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인간이 자본주의 사상을 근거로 땅을 독점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토지를 공유하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인간의 죄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지만 경제 논리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토지 개념은 자칫 사회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해를 가져올 수가 있다.

죄인이 살아가는 현 세상에서의 토지 제도는, 하나님의 법칙과 인간의 죄성을 적절하게 고려하는 가운데 완성시켜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의 토지 제도는 한시적인 것이며,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이상적인 제도가 있을 수가 없다.

요단 강 동편에 자리를 잡으려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에게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토지가 주어진 것을 볼 때, 토지로 인해 사회의 공동체성을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지 못하느냐는, 토지의 공개념이 얼마나 손상되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가나안 땅에서의 토지 공개념은 장차 이 땅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18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먼저 땅을 할당받은 이들이 자신들은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데, 오히려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이 되라는 지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의 유지를 위해서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먼저 받은 자들의 기득권 주장은 자칫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먼저 받은 자가 나중 받을 자들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앞장서야하는 것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선봉이 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성도는 가장 먼저 앞장 서신 맏형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제들로서, 항상 복음에 빚을 진 자들로서,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가 있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순교적 자세로 사회에서 희생이 되는 이들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의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환경은,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의 기득권 주장에 의한 부작용에서 나타난 것이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은, 가나안 전쟁에 앞장선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와 같이, 희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19  너희에게 가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게 하라

처자와 가축은 앞장 선 군사에 합류할 수가 없다.

이들과의 동행은 효율적인 전쟁을 방해한다.

종종 가족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가 있다.

가족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은 가족이라는 안식처와 삶의 현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형제가 안식을 얻기까지 함께하는 과정은, 공동체에 연대감을 더해준다.

공동체의 형성 과정은 가장 어려운 과정이며, 가장 어려운 과정에서 함께한 형제들이 진정으로 참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확장은 안식을 향하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교회의 개척멤버나 교회 건물의 건축에 함께한 이들은, 후에 교회 분열의 한 가운데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공로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투에 앞장섰던 이들은, 가나안 전투가 끝난 후에, 그 곳에서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교회의 개척과 건축에 앞장섰던 이들은, 가나안 전투에 앞장섰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와 같이,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갈 때 공동체에 덕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개척이나 교회 건물의 건축은 안식의 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안식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동료들이 안식하기까지 함께 한것은,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체로서 공동체적 연대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교회의 확장에 참여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공로의 터 위에서 세운 것이며 공동체의 연합을 위핱 것이기에, 여기서 자신의 공로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21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가나안 입성 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행하여진 아모리 족속에 대한 진멸은 믿음직한 모세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배려하심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치아도 젖을 먹는 유아의 발육에 필요한 젖니는 성인이 되면서 교체된다.

젖니의 역할은 영구치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자상하심은 육적인 창조와 영적인 창조 원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섬세하고 자상하신 간섭하심은 초신자들에게나 아니면 처음 진입하는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성도는 일상에서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불필요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앞서시며, 성도의 길을 예비해주신다.


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아모리 족속에 대한 진멸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미리 준비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겠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 있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체질적으로 자유할 수는 없지만, 성도는 믿음 안에서 이를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한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비슷한 상황이 다가올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갖게되지만,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는 이러한 상황을 직면하여야만 극복 할 수 있다.

상황을 피하면 해결책이 없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족속을 진멸시켜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대하게 상황을 직면하고 돌파해나가듯이, 성도는 주어진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훈련을 할 때 더욱 담대하면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모세는 자신의 바램을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적절하게 행하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능력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을 제한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능력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지혜의 부족에 있다.

사회에서는 많은 능력을 가진 재력가들이나 박사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에게 절대 권한이 주어진 교수들은, 주어진 많은 권한에 비하면, 이를 부적절하게 사용함으로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간구의 기도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하여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고 분별하며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한다.

성도는 많은 능력을 소유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주어진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할 것이다.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는 자신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한계가 있다.

모세가 바라보는 가나안 땅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상황은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체가 드러난 후에 희미했던 그림이 명확해 질 수 있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역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은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인간적 감정과 연민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속 언약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게,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연민이나 감정, 혹은 의리에 근거하여 이루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감정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실수를 하였다.

박영선 목사는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두드림으로서 참된 반석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라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한 인간적인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이다.

성도는 종종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분노함으로서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실수를 하게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불의에 대하여 분노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부정적 상황에 휘말림으로서 인간적인 범죄를 하여서는 안된다.

성도는 부정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데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모세는 안식으로 인도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지 않았으며, 가나안 직전까지만 인도한 인물이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복할 가나안을 정탐하였기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식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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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5. 22:22

신명기 3장 1-11절 말씀 묵상

1  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고자 하는지라

바산의 아모리 족속들이 싸우러나오지 않았다면 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성읍들은 상식적으로 쉽게 함락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신여기며, 자신들을 과도하게 믿었기에, 성에 숨어 있지 않고 싸우러 나왔던 것이다.

기회는 오히려 대적들이, 자신의 영역에 꼭꼭 숨어있을 때보다는, 정면으로 도전해 올 때가 될 수 있다.

성도에게는 악이 드러나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날때 해결책이 있을 수 있다.

교회 내부의 문제도 외부로 드러날 때 해결책이 있다.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시대가 오히려 문제에 대한 해결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하시고

비록 아담은 에덴에서 통치 명령(창 1:28)에 실패함으로서, 사단의 종이 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실패를 완성하시고 성도에게 안식을 허락하셨다.

성도에게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여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산의 아모리 족속을 넘기셨듯이, 세상은 이미 성도에게 넘겨진 영역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하는 곳이다.

성도는 축귀 사역이나, 관상기도와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넘어서,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여야한다.



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넘기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인간적 연민과 하나님의 심판은 구분하여야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어린 아이까지 멸할 수 있으며, 인간을 영원한 지옥으로 멸하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의 사고체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성도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신본주의적 사고에서 출발되어야한다.



4  그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았는데 그 성읍이 육십이니 곧 아르곱 온 지방이요 바산에 있는 옥의 나라이니라

인간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성을 쌓고서 견고하게 자기 방어를 하면서 살아야만 할까?

세상이 이렇게 약육강식의 원리, 혹은 적자생존의 원리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은 이성과 감정, 연민과 슬픔, 죄의식과 선에 대한 갈망...등등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아담의 불순종과 타락,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상실 말고는 설명될 수가 없다.

성은 죄인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쌓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최초의 성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고자, 새롭게 시작한다는 에녹의 이름을 붙인 에녹성이다.

성을 쌓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죄인이 살아가는 행동 방식이다.

이스라엘이 바산의 옥의 나라의 성읍들을 무너뜨렸듯이, 하나님은 성으로 막힌 담을 무너뜨리시고 인간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하신다.

인간은 결국 성에서 나와 심판과 구원의 길림 길에서 선택을 하여야한다.



5  그 모든 성읍이 높은 성벽으로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

바산의 아모리 족속들의 수 많은 성읍은 누가 보아도 굉장하였지만, 이 모두가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에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수 많은 건물들과 거대한 경제력과 수 많은 사람들로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께서 흔드시면 모두 다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성도가 외적인 굉장함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아야한다.



6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
7  다만 모든 가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바산의 옥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정착할 곳이었기에, 그 지역의 소산까지 다 없앨 필요는 없었다.

이는 여리고 성을 멸한 후에 우상과 연관된 시날산을 숨긴 것과는 구별이 된다.

 
8  그 때에 우리가 요단 강 이쪽 땅을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헤르몬 산에까지 아모리 족속의 두 왕에게서 빼앗았으니
9  (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부르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불렀느니라)
10  우리가 빼앗은 것은 평원의 모든 성읍과 길르앗 온 땅과 바산의 온 땅 곧 옥의 나라 바산의 성읍 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이니라
11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니라)

(이 시대의 성벽들)

아모리 족속들의 거주지는 성벽들로 특징을 이룬다.

이렇게 성벽을 쌓고서 살아가는 생존 방식은 인류 역사의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성벽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지만, 성벽들은 자신들의 악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하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많은 이들일수록 악한 짓을  더욱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높은 성벽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수단을 넘어서 인간으로하여금 거침없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 해준다.

현대는 무기가 발달되어 성을 쌓는 대신에 무기를 많이 보유하려고한다.

세계 각국이 핵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의 문제는, 핵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넘어서 불법적 행동을 조장해주는데 있다.

핵 보유국의 불법적 행동은 쉽게 제어할 수가 없다.

악인들이 가지고있는 힘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을 넘어서, 악행을 쉽게 자행할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 대한 심판은 세상의 철옹성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세상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비켜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불법이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의 희망이다.

악에 대한 심판이 없이는 이 세상에 희망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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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4. 22:14

신명기 2장 26-37절 말씀 묵상


26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  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겸손하고 온유한 모세와 교만한 시혼)

모세의 행동방식과 시혼의 행동 방식은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의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은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족속들로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죄악이 가득한 족속이다.

에돔과 모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실질적으로 에돔과 모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아모리 족속이 멸망받을 족속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로서, 먼저 아모리 족속에게 심판을 선포하지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유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죄인이기에 결코 정죄하는데 앞장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바로의 아들로서 가장 정의감에 사로잡혀있었을 때, 가장 큰 실패를 하였던 것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는 행동은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화평을 선언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아모리 사람들은 공격받을 만한 행동을 하게된다.

표면적인 전투의 상황은 아모리왕 시혼에게 주어졌지만, 주권적 상황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교계나 세상이나 죄악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인간이 자의적 판단으로 심판의 도구가 되려고해서는 않된다.

모세와 달리 아모리왕 시혼은 교만이 극에 달하였던 자이다.

세상을 대변하는 교만하고 악한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악한대로 자신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아니라 굴복이었던 것이다.

종종 세상의 운영 원리는 지혜보다는 힘이며, 이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승리이기에, 세상은 이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전쟁은 힘의 과시와 자존심의 싸움이며, 개인도 이러한 속성에 대부분 동참하고 있다.

개인도 이러한 이유로 망할 수 밖에 없기에, 성도는 제일이 되고자하는 세상 욕심을 피하는 것도 중요한 지혜 가운데 한 가지이다.

아모리 족속인 시혼은 에돔과 모압과 같이 세상에 속하여있는 자이지만, 에서와 모압과 달리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에서 자손과 모압 사람은 비록 구원의 영역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응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제일을 추구하는 아모리인의 왕 헤스본의 시혼은, 양보가 있을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악행을 행함으로서, 일반 은총의 특혜를 누릴 수가 없었다.


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

애굽의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헤스본 왕 시혼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민족이다.

순탄한 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대적자를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기에 앞서서 자신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고 축복하시는 방법의 한 가지로 대적자를 일으키신다.

지혜로운 자는 인생의 대적자들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혈기로 자신을 통제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의 자녀를 연단시키고 성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부정적 상황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자숙하기보다는, 문제의 초점을 자신이 아닌 외부 상황에 돌리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정적 상황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

부정적 상황을 만났을 때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는 상황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종종 기독교인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사회 운동을 하곤하지만, 장작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헤스본 왕 시혼이 지배하던 영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고 루우벤과 갓 지파의  기업으로 삼은 것은, 이미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었지만, 이는 아담에게 에덴에서 통치 명령을 실행함으로서 에덴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비록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인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속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지도자 랍벨은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부분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혼동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이는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한다.



32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모압의 땅이었던 야하스에서 이스라엘에 패한 시혼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시혼은 모압까지 자신의 관할로 다스리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악의 세력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악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강해지려고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세상 사람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속성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추구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외적인 강함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내적인 강함을 추구해야할 것이다.

교회 건물 외적인 규모의 확장은 세상의 풍습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유아까지도 진멸하게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담겨있는 악의 씨앗이 가나안을 부패시킬 수 있었기에,  전부 멸하라고 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평화는 종종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됨이 될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이 여러가지 매체를 통하여 하나된 지구촌에서 평화를 말하고있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서 선이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지만, 세상적인 윤리로는 결코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아모리 족속 전부를 멸하라고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진멸은 마지막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다.

심판은 죄악의 보편성과 충만함으로 때가 찰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아모리 족속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성도는 모세와 같이 아모리 족속에게 바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세상을 심판하려고해서는 않된다.

성도는, 온유한 모세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화평을 추구해야한다.


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중간하게 점령하였을 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배울 수가 있었을 것이며,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가 되려고함으로서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량을 아시기에 적절한 분량만을 허락하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기에 종종 적정선을 넘음으로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교회의 규모를 적정선으로 유지하면서, 그 이상으로 커질 때에는 분립을 하여야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같이 욕심에 파묻혀 파멸에 이르곤한다는 것이다.

교회 명칭에서 곧잘 사용하는 제일이나 중앙이란 명칭은 최고가 되고자하였던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를 지향하는 세상의 원리를 교회에 도입한 어리석은 명칭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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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3. 22:35

신명기 2장 1-25절 말씀 묵상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모압 땅은 지나가야할 땅인데, 모압 땅 세일 산에서 두루 다닌 것은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가 표류하는 모습이 연상이 된다.

이렇게 목적도 없이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닌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가 덜 된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잔재를 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훈련소에서 가스실에서 나온 병사가 두 팔을 벌리고 가스가 다 바람에 날려가기까지 기다리듯이,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애굽에서의 우상 숭배의 잔재를 씻어 버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애굽의 잔재를 버릴 수가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일제 시대에 한 가지 역할을 생각해 본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압제 그 자체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일제의 36년이란 압제 기간은 이조 500년의 뿌리깊은 유교와 성리학 사상의 잔재를 없앰으로서 대한민국에 교회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00년 일찍 들어왔던 카톨릭은 환경이 조성이 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피흘림에도 불구하고 별로 결실을 볼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지금도 유교의 뿌리가 깊이 남아있는 강릉이나 전통에 파묻힌 경주와  배타적인 제주가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일제라는 세상의 악을 사용하셔서 택한 자를 깨끗케하시는 섭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일제가 한국이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고 하더라도  악은 악일 뿐이다.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을 연단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고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인간은 자기의 길의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스스로가 알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생각하거나 이해 할 수가 없다.

사람이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가야할 때가 있다.

머물러야할 때 가려고하거나 가야할 상황에서 머무르려고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길이 열리지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갈 바를 제시해주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가 가는 여정은 왜 그러한 여정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길을 인도하시기에,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순종하며 나아가야한다.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에돔왕은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에돔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다.

다른 족속 같았으면 이미 싸움에 휘말렸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존중해주는 만큼 에돔을 배려해주셨다.

세일 산에 거주하는 에돔 사람들은 야곱의 형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의 배려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대적하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민족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적자를 남겨놓은 것은, 마치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와 같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축귀 사역에 익숙한 이들은 종종 자신은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이원론적 논리에 파묻히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로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악을 허락하시기도 하신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angel of satan는 악 자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로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악을 허락하셨다.

성도에게 주어진 가시와 같은 악한 환경들은 종종 성도를 겸손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겸손을 위해서 상황을 수용하고 같이 존립 할 필요가 있다.


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위해서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동들을 정당화시키기도한다.

십자군의 경우, 예루살렘 회복 전쟁을 정당화시키면서 자신들이거쳐가는 도시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수단으로 특혜를 빌미로 상납을 강요하기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어느 누구도 결과가 좋지 못했다.

무력에 의한 갈취는 상대를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상대에 대한 존중만이 악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는 후에 에돔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가나안의 진입 과정에서 원한을 산 적대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에게 양식과 물을 탈취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가나안 생활 시작부터 에돔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지 않도록 하신다.

과정 가운데서의 원한 관계는 지속적인 적대관계의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풍요라고 할 수 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는 모든 풍요가 당연하게만 여겨질 것이다.

가장 풍요로운 환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져오는 가장 열악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이 풍요로우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려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열악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 할 수 있었지만, 정작 풍요로운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빈곤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종종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하여 간증하는 것은 대부분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서 충성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신다는 말들은 목사가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연단시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에 온갖 험난한 여정을 극복하여야만 했듯이, 삶의 환경에서의 고난을 주시며,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주시곤하신다.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다.

모세는 40의 젊은 나이에 편안했던 바로의 궁을 떠나 40년간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을 비우는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든 기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자신과 다르다고, 아니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대적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압도 에돔과 마찬가지로 장차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녀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어려움과 장애물들을 말끔하게 제거하시지 않고 놓아두신다.

성도는 대적이나 자신을 힘들게하는 이들이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지려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임을 인식하여야만 한다.


10  (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시내까지 38년동안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는가?

가나안을 바로 앞두고 그 앞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거나, 모세가 무능해서 자신들을 인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효율성과 능률이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빨리 빨리”로 표현되는 급박함은 정작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상실하고있다.

밥 버포드의 “하프 타임”에서는 중년의 나이에서의 인생의 실패를 통해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삶의 의미”로 관심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상황은 최악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을 때의 성공은 최악의 인생이 될 수 있으며, 중년의 실패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인생은 더딜 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대부분 멸망받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멸망은, 뿌리 깊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은 안식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인생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에 대하여 교만하면 않되고, 타인에 대해서도 쉽게 비난해서는 않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인간들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은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뿐이다.


1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암몬 족속도 아브라함의 조카들의 족속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족속이다.

이들도 모압과 마참가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하기 위해서 세우신 족속이다.

인생에게 육체의 가시와 같은 존재는 도처에 깔려있다.

인생은 이들과 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생은 오직 자신을 돌아볼 때 바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


20  (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  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이 명성이 있다고 이스라엘이 잘난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들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너무나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는 신약의 성도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맥락의 성격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스데반과같이 순교의 피를 흘리는 것이 승리의 삶이라고 규정하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중요시하는 것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이다.

광야의 여정에서 보여주는 승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새하늘과 새땅을 소망하는 가운데 이룰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2. 22:54

신명기 1장 34-46절 말씀 묵상

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원망은 단순한 생각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죄성이라는 본질적 속성의 문제임을 보게된다.

어떠한 계획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구상이 있다고하더라도 페러다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음과 생각이 체계화되어 구성되어있는 페러다임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전체 행동 방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문제는 페러다임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가지 면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인간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가 뿌리 깊이 박혀있다.

단순히 가르쳐서 될 문제라면,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신 분이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페러다임을 넘어서는 죄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표면적인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세계관을 넘어서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행하심에 대한 이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행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속에는 아직 그려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를 깨달을 수가 없기에, 패러다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킨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미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인간은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 할 수가 없기에, 그들의 행함은 단지 자신들 안에 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증명하고있을 뿐이다.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을 고려할 때, 기독교는 단순히 세계관의 변화로 접근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홍해를 건넜다하더라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증명해주고있다.

홍해를 건너는 과정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해주는 모형일 뿐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구속 과정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이스라엘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하지만 출애굽을 하였다고하더라도,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해결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하여야하는지 예수가 십자가에서 삶의 본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삶의 방식을 제공해주는 방편일 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그리스도가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고 그것을 따라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무모할 뿐이다.

출애굽과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세대로서, 인간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과정이었으며,  이스라엘은 결코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도 아니었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다.

생각과 행함에 대한 선과 악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갈렙의 의로움의 핵심은 순종에 있었다.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증명해주고있다.

갈렙과 여호수아의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다.

갈렙의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데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마음 중심에서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선함의 기준은 순종이 되어야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고는 관계없다.

순종의 기준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불순종의 자녀이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고는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37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 20:11-12)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집 “하나님의 열심”에서는 민수기 20장11-12절을 근거로 모세가 흥분하여서 반석을 두 번 쳤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설명하고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에 대하여,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에, 이로 인하여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관찰일 수도 있고, 비약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는 행동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공인이라는 위치는 대표성을 가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있어야한다.

지도자의 타락은 많은 이들에게 죄에 대한 합법성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지도자에게는 엄격한 기준이 적용이 되어야한다.

성공한 목회자들은,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법과 도덕적 기준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것이 자주 볼 수 있다.

법에 대하여 가장 무관심하고 불법적인 사람들이 목회자들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도자들의 음란이나, 부정직, 부도덕등이 간과된다면, 그 다음은 공동체적 타락의 문이 열릴 수 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결코 자유할 수 없을 것이다.


38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39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누군가는 가나안에 들어가겠지만,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자신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도 동반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들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 안에 있었지만, 현재적으로 은혜 언약 안에서 선택받은 성도라고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종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은 아니지만, 자녀에게 묻는 책임은 종에게 묻는 책임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40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41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우러 올라가는 것은, 세상에 대한 현대인들의 선교 방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선악의 기준은 오직 순종이되어야한다.

아무리 상황에 적절한 올바른 결정이라고하더라도,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이차적인 존재로 만드는 불순종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의 일차적 주체가 되신다.

인간이 주체가되어 판단하는 선악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판단하시는 선악의 기준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똑같은 일이라고하더라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의 일차적 기준이 자기 자신이다.

인간 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되는 현대문명은 불순종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주의 철학을 기반으로하여 해석되어지는 성경은, 인간을 불순종으로 인도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예로, 많은 선교 단체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 방식으로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를 추구하지만, 이는 인간의 철학적 사고에서 출발된 인본주의적 교회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아모리 족속들을 공격할 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인간의 철학이 바탕이 되는 WCC의 교회론에서 나온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는 세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무슨 중요한 일을 결정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에는 성도가 알만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인간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만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 많은 경우, 실은 자신의 뜻이 정해져있어서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독단적인 결정을 할 때 커다란 쓴맛을 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경험은 평생 돌이키기 힘든 중대한 위기가 되기도한다.


43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인간은 종종 자신을 표현하는데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곤 한다.

똑같은 일을 하여도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은 하기 힘들어한다.

인간은 누구시켜서 하게되면 자존심이 상하게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동이다.

인간의 자존감은 필요하기도하지만, 종종 자존감을 표현하는 것이 상대와의 친밀감에 손상을 입히기도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까지도 자신의 자존감을 앞세운다면, 이는 지혜롭지 않은 처신인 것이다.


44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백성은 더 이상 아무 능력이 없다.

단지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백성은 사단의 종 이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5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아모리 족속에게 패한 이스라엘의 통곡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슬픔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모리 족속과 싸우러 갈 때의 감정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무너지거나 좌절된 인간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하나님께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에 의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세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감정적으로 통곡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전을 이루기가 쉽지가 않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이 어려울 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되면, 이는 어려울 때 뿐이다.

평안할 때의 인간의 본능은 항상 하나님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46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 23:45

신명기 1장 19-33절 말씀 묵상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에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40년 간의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훈련 과정을 거침으로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 할 수 있었다.

40년의 세월과 40일간의 정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의 금식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감당하신 것과,  부활 후에 40일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심으로, 다가 올 일들을 준비하게하는 충만한 숫자인 40과 연계시켜 생각 할 수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인간적인 것을 없애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준비되어지는 숫자다.

광야에서의 40년은 광야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가장 연약하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만히 준비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십일 간 광야에서의 금식 후에, 인간적으로는 가장 지치고 연약해진 상태에서 사단을 물리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 영원한  가나안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40일간 말씀하심으로서, 가나안을 준비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원형이 되실 수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 속하여 있는가?

가장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함이냐 아니면 아모리 족속과 같이 가장 강함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불신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존재로 살 것인가를 선택하여야한다.

참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었기에, 더 이상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거나 세상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인생의 여정 가운데 넘어야 할 험난한 난관들이 결코 성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여야만 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아모리 족속의 죄악에 대해서는 이미 아브라함 때에도 언급되어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승리가 선언된 곳이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세상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여야한다.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하여야할 일을 못하는, 아모리 족속들 앞에 선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이들이 아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스스로 강한 자가 되어야겠다는 유혹은 물리쳐야한다.

성도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의지하며 교만해진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외적인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논리도 지극히 인간적인 논리인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표현되어야 할, 왕으로서의 직책을 상실한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이미 아담 안에서 실패한, 왕으로서의 역할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3중직, 즉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어야했지만, 이 3중직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흔히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실행하는 통치 명령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 가운데 속하여 있었던 들짐승으로서의 뱀을 다스리는데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선악과 금령을 범하게 되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죄악이 가득한 아모리 족속을 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이 뱀을 다스렸어야 했던것과 같이, 우상을 멸하고 다스려야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담과 같은 실패를 한 것이다.

아모리 족속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권을 상실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궁극적으로 사단을 제압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더딘 반응으로 정탐군을 보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에 의지하여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서 믿고자하는 것과 같이, 불신이 행동의 동기가 되고있다.

이는 만약에 그 곳에서의 소산이 보잘것 없거나, 환경이 열악하다면 정복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에덴에서 실패한 아담의 역할을 재연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된 정복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중요한 과정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왕으로서의 역할은 에덴의 확장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정복은, 실패한 아담의 역할에 대한 재연이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되어야 할 모습의 유형적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이 정복할 가나안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야할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이다.

열두 지파의 대표들의 정탐은, 그 땅이 정복할 만한 땅인가에 대한 정탐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땅을 준비하셨는가를 확인하는 정탐이었으며, 정탐한 땅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에 대한 정탐이 되어야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아모리 족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약속하신 땅이었으며,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앞으로 있을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설레임 가운데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통치 명령(창 1:28)을 근거로하여, 대위임령이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사도행전의 역사의 유형학적 모형이었다.


23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열두지파의 역할의 원형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창 1:28)을 통한 에덴의 확장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열두지파는 세상을 정복할 하나님의 군사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제자를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심으로 에덴과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완성하셨다.


24  그들이 돌이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지상 명령을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 나라는, 자연법 아래에서 이미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온갖 문화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경험 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풍요로운 공급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상 숭배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만 배타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하나님에 대한 왜곡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발전되고있는 것을 본다.

성령에 의한 믿음이 없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성과 논리와 자연법은 존중되어야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가 임할 때도 분별하여 받아들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아담은 처음 타락 한 후에 바로 여자를 원망하며, 하나님께 불평을 하였다.

성도는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힘든 환경을 만날 수 밖에 없지만, 힘든 환경은 성도를 더욱 성숙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임을 기억하여야할 것이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도우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도우심이다.

성도가 세상을 향해서 선한 싸움을 하여야할 상대들은 결코 인간적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이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감당 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있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믿음에 대한 훈련을 받았지만, 이는 거듭나지 않고는 훈련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힘입어, 모든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이러한 난관들을 감당 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된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어서 사단의 방해를 물리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하였고, 아담도 에덴에서 유혹을 받아 실패를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희생을 통하여 승리를 하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신자에게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기에, 성도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위축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영역의 확장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이라면,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하신다.

인간은 결코 주체가 될 수가 없다.

다만 순종이 요구될 뿐이다.

순종은 승리를 위한 조건이다.

비록 에덴에서 아담은 정복을 통한 에덴의 확장에 실패를 하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앞서서 싸우시기에 승리 할 수가 있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성도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순종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도행전의 역사와 같이, 성령의 강림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사도들이 승리를 경험 할 수 있었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들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장차 아들로 부름을 받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즉 성도들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이어주는 아들의 신분이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스라엘은 아들로 부름을 받아 출애굽을 하였지만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두 번의 구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성취하셨으며, 동시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모든 과정을 단번에 이루셨기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된 것이다.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순종은 아들에게 요구되었던 절대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있다.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수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다고하지만 이는 거짓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았던 아담도 타락 할 수 밖에 없었고, 광야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은 우선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기에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불행한 상황에서 일차적인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모를 뿐이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셔도 따라올 능력과 자격이 없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하시기에,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행위나 충성을 통해서 구원의 조건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4. 30. 23:09

신명기 1장 1-18절 말씀 묵상

1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시내산에서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모세를 통하여 모압 땅에서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비록 세대가 바뀌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이 언약의 말씀은 모세 앞에 서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말씀으로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근거가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가 존재하는한 영원한 것이기에 문화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세대차로 인한 대화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바뀔지라도, 해석은 동일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화에 순응시켜 재해석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현대 신학자들의 시도는 자칫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질시킬 수 있음을 걱정해본다.


2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3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나

모세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하였던 것은, 처음 아담이 에덴에서 맡았던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 했어야했다.

아담은 모세와 대조적으로, 에덴에서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악과 금령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또한 들짐승 뱀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사단에게 말하였던 것과 같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였기에, 선악과를 범하는 사건의 유발 요인 가운데 한 가지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에덴을 관리해야했던 아담에게 주어진 말씀과 같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속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었던 것이다.


4  그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길을 막았던 이들이다.

이들과의 전쟁을 단순히 세상의 일반적인 전투에 적용하면 안된다.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전쟁은 강자가 약자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인간적인 싸움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간혹 아모리 족속에 대하여 어린 아이까지도 진멸하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성경에서 상처를 받고 기독교를 떠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전쟁을 세상적인 관점으로 해석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와같은 패러다임의 충돌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하나가 되기 어려운 한가지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왜 모압 땅에서인가?

모압 땅에서의 선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단계에서의 선포이다.

의사가 수술을 하는데 있어서, 수술 중에 요구되는 협조사항을  수술을 하기 전에 환자에서 말하는 것은 설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술 중에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의사의 책임이 경감되는 반면에, 만약에 수술 후에 문제가 생긴 후에 설명을 한다면 이는 설명이라기보다는 변명이 된다.

이러한 변명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가나안에서의 협조 사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선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더 나아가 언약으로 말미암아, 비협조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서 생기는 문제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잘못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미리 알만한 말씀을 하신다.

의사가 사전에 협조사항을 설명하였는데도 협조를 안하여 생기는 문제로 의사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양심과  자연법등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기에 인간은 삶 가운데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과정은 과정일 뿐이기에 머무르거나 지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호렙 산에서 계속해서 머무르면 안되는 것은, 마치 변화 산에서 베드로가 산에 장막을 치고 거하기를 원했던 모습과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다.

삶의 여정도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과정일 뿐이다.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이 땅은 신자가 거쳐가야할 과정일 뿐이다.


7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8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야할 약속의 땅은, 에덴에서 아담이 들어가야만 했던 영원한 안식의 땅에 대한 모형이며, 성도에게는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 나라에 대한 모형이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영원한 땅에서 안식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새옷을 입을 때를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이 땅의 역경을 헤쳐나아가야 할 것이다.



9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하나님도 삼위 하나님의 역할 분담으로 인하여 구속 사역을 효율적으로 감당하실 수 있으셨다.

역할 분담은 권위의 위임과 함께 이루어진다.

공동체 가운데 짐을 진 권위자들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공동체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지음을 받을 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았다.

타락한 인간은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동체 가운데 왜곡된 권위를 행사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직임을 통한 역할의 분담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이면서, 또한 공동체의 중요성과 원리를 드러내주는 것이기에, 신자는 공동체적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한다.



10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하게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얼마나 확장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각자의 역할을 유기적으로 감당함으로서, 확장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 분담을 하여야한다.



11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확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천지 만물에 가득하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하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풍요는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함으로서, 수직적 순종이 수평적 복종으로 실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모세가 수령을 세우고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은 각자의 지위를 높이는 계급장의 수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각자의 공동체성을 통하여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직적 불순종은 수평적 복종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천 배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소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 교회의 붕괴와 교인 수의 급속한 감소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2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일과 너희의 힘겨운 일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있으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일을 담당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록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이를 감당하였지만, 모세가 사라질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공백은 결정적 고통이 될 것이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은혜를 위임받은 이가 이를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각자의 은사대로 역할 분담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완성시켜나아가야 할 것이다.


13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지혜와 지식은 동시에 겸비되어야한다.

지혜만 있고 지식이 없는 이들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만 제한될 수가 있고,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칫 칼을 휘두를 수가 있다.

지혜는 삶의 연륜이 없이는 쉽지가 않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얻는 지혜만이 참다운 지혜가 될 수 있다.

교회의 장로는 목회자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하는 택함받은 이들이다.

간혹 젊은 이에게 장로로 위임을 주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는 나이가 많은 이들을 무조건 장로로 추대하는 교회도 있지만, 그보다도 삶의 연륜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이들이 더욱 지혜롭게 일을 할 수 있음을 본다.


14  너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모세는 백성들의 동의를 얻은 것은 수령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기보다는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기에,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이 일을 수행하였던 것을 본다.

모사가 많으면 경영에 패함이 없다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실행하여야 할 부분도 있지만,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야할 경우도 있다.

종종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이 없는 지혜에 속하는 부분에서의 독선은 종종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분열시키기도한다.



15  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은 계급이 아니라 역할의 부분이 다를 뿐이다.

계급 의식은 죄성으로 말미암은 왜곡된 공동체성의 결과물일 뿐이다.


16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집권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직무에 충실하여야한다.

집권자의 판결은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이며 모형이기에 더욱 공정하여야한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공정한 판결의 훼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혜로운 솔로몬과 달리 르호보암의 굽은 결정은 이스라엘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세벨은 아합으로하여금 공정한 판결을 하지 못하게 했다.

공정한 판결의 손상은 하나님 나라로서의 기능의 상실이다.

돈이 많은 자가 이긴다는 교단 총회 재판국의 현실은, 한국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7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재판장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었기에,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소속 집단의 부패성은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가늠된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한 가지인 치리가 사라진 교회의 현실은, 교회가 치리를 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안되고있음을 보여준다.

교회의 부패는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기능의 상실로 이어지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할 뿐이다.

이스라엘의 분열은 르호보암과 같이 지혜없는 자의 판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스라엘은 결국 공정한 재판의 상실로 멸망을 초래하였다.



18  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 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

가나안 땅에서 이를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행할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스라엘이 맹세함으로 맺어진 언약이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아래에서 생활을 시작하게되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행위 언약 아래에 있는 백성은 아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
히브리서 2018. 3. 30. 20:37

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장래 좋은 일은 천상의 나라, 즉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지으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서, 처음 창조의 궁극적인 완성을 위한 일이었다.

이는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때 임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대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으로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에서의 과제, 즉 흔히들 문화 명령이라고 말하는 통치 명령을 통해서 에덴에서 성취되었어야할  하늘 나라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을 시키셨다.

흔히들 말하는 문화 명령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잘못된 해석이며,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수행하였어야할 통치 명령으로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이 통치 명령을 대신 완성시키심으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문화 변혁을 위한 문화 명령의 수행은, 그리스도가 완성시키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다시 에덴에서의 과제를 수행하려는,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인간적 발상이다.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아담이 맡았던 에덴에서의 제사장직에 대한 종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의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모형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옛 언약 안에서의 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 담겨져있던 제사장직으로까지 올라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성취되는 것이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땅의 외형적 구조는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건물이 성전으로 불리우는 것은 현 시대 목회자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거룩함은 인간의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제사장의 역할이 요구되지 않은 만큼 성도에게도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많은 윤리적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성경의 근본 교리인 이신칭의의 개념마져 흔들려고한다.

성도들 가운데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들은 잘못된 구원론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육체, 즉 바울이 말하는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기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죄에 대하여 고발을 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한 문제를 구원론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들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윤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는 행위와 충성이 요구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육체에 대한 정결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결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짐승의 피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구약의 제사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의 표면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행위로 깨끗해지려는 이들은,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면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로서의 무덤에 회를 칠하려는 이들이다.

요즘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성도에게 행위가 포함된 충성allegiance이 요구된다는 Matthew Bates의 새로운 주장은 톰 라이트의 주장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기독교를 유대주의적이고, 윤리적으로 만들려는 톰 라이트나 메튜 베이츠와 같은 이들은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깨끗케하신 근원적 해결을 축소시키는 것이며, 이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체를 정결케하려는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노력일 뿐이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는 표면적인 행실을 깨끗케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죄를 깨끗케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피에 의미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표면적이고 윤리적인 정결로 제한시킨다.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것이었다면, 성도의 부정적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피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 된 이가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종이 아들로 변화된 것과 같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메튜 베이츠Matthew Bate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만, 오직 충성allegiance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취소되어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인간의 근원적 죄가 아닌 행위로서의 죄악에 한정시킴으로서 범하는 실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 관점에서 보았던 오류에 기인한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아담 안에서 생긴 존재론적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담이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는 행위 언약의 개념 안에서만 성립된다.

행위 언약이 없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기에, 행위 언약의 개념은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모세 언약 안에서 언급된 첫 언약은 근원적으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모세 언약은 많은 면에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아야만, 모세 언약을 충족시키신 예수를 둘째 아담의 개념 안에서 자리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언약을 아담과 관계없는 언약으로만 제한 한다면 둘째 아담의 개념의 정립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규정할 경우,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상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이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으로 분류되어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성립된다.

칼 바르트나 존 머레이와 같이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 인간의 죄성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의 역할을 약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으로서의 죽으심이며, 이는 처음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 안에서 성립된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죄악된 행실은 인간의 근원적 죄성의 표면적 현상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죄악된 행실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본을 보여주신 모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 대한 것이기에, 이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관한 것이지 결코 행실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둘째 아담으로서의 속죄제에 대한 개념에서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삶의 방식의 본을 보여준 희생으로 왜곡시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 자신의 희생적 죽음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이상한 믿음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대항하는 희생적 죽음이 옳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데 의미를 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대로라면,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의 절기 행사가 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와 신정통주의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이 끊임없는 오류 가운데 헤매는 것은, 이들은 하나같이 아담과 맺어진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고있지 않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이 실패한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둘째 아담으로서의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진정 성도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성도를 살리신 분으로서, 앞으로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 즉 언약이 죽으심과 더불어 성립되는 것은, 아담 언약 안에서 이미 죽으리란 약속이 성립되어 아담과 아담의 후손이 언약 안에서 죽었기에,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죽으심이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죽음이 행위 언약에 대한 것이었다면,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죽으심은 은혜 언약, 즉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음은 아담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죽으심으로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하지만 ,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없던 것으로 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언약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는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분명히 아담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이며, 또한 새 언약의 모형인 아담 언약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모세 언약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피와 항상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언약이 아담 언약과 연계되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이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모세 언약 안에 있던 유대 이스라엘 백성을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실상으로서의 아담 언약과 실상으로서의 새 언약을 이어주는 허상으로서의 그림자일 뿐이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그림자일 뿐이지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일 수가 없다.

모세가 뿌린 피는 죄를 용서하는 피를 가리킴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미 죄악으로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피의 장막이 세워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미 존재론적으로 죄악 가운데 있다는 전제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행하였을 때에도 속죄제를 위해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였기에 장막은 오직 피흘림을 통하여 세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막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질 참이스라엘 백성인 신자들을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허상일뿐 실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허상인 이스라엘의 범죄함 이전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죄용서를 위한 실질적 구속 행위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첫 언약을 아담 언약과 관계 없는 모세 언약으로 제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모세 언약 아래있던 유대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를 한다.

바울이 히브리서 저자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히브리서가 바울의 서신들과 대립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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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018. 3. 23. 15:54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말씀 묵상


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총체적 재앙)

부녀자, 처녀, 지도자, 장로, 청년, 아이, 노인이라고하면 사실상 유다 백성의 전부를 가리킨다.

선지자는 유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총체적 재앙을 말하고있다.

사실 유다 공동체의 구성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러한 불행은 모든 공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들이다.

불순종은 단순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역으로서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은 단순한 인간 성품의 경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반역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을 기초로하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순리적인 반응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 받으면서도 부모와의 관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의 유지에 치명적이다.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부모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듯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임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은 공급받는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기에,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성품에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순종이 동반되지 않는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같이,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5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기쁨과 춤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었지만, 이를 조롱하였던 미갈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원래부터 순수하였지만, 어느덧 인간은 타락한 죄성으로 말미암아 음란으로 이어지는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면류관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왕권의 표현이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이 누렸던 왕권은 불순종이라는 범죄 때문이었다.

현재의 인간들의 삶이 사단의 좀비 인생이 된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종속된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17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상실되어 어둠 가운데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된 성도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빛 가운데 걸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8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사단에게 내어준바되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산인 거룩한 시온 산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며, 거룩한 예루살렘은 여우들의 거처가 됨으로서, 참 예루살렘 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사단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에 동참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없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파멸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을 소망 할 수 밖에 없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선지자의 탄식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는 기도다.

이 땅을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한다.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구속redemption은 회복redeem의 의미가 담겨있어서 옛적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단순히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에덴은 안식을 위한 과제가 성취되지 않은 곳이기에,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성취하셔서 이루신,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 보장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는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기에,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하며,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 상위에 두려고하지만, 이는 에덴과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오해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의 개념이 아니라,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을 표현하는 통치명령이나 대위임령으로 보는 것이 옳바르다.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부여받았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직책의 상실을 의미했다.

유다의 실패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의 실패였으며, 선지자가 간구하는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제선지자의 희망 사항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회복하셨기에, 에덴에서 주어졌던 통치명령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성도가 받은 구속은 에덴으로 돌아가 다시 아담의 직책을 수행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에덴에서의 과제를 통하여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을 기반으로 한주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지만, 현재 누리는 축복은 오직 영원한 구속을 위해서 주어지는 임시적 은혜일 뿐이다.

주어진 임시적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감사드릴 일들은 오직 그리스도께 향하는 일들로 귀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묵상을 마치면서

불순종한 유다와 멸망당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처하여있는 보편적 상태를 묘사하고있다.

에덴은 성전이었기에, 아담은 성전에서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패망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과 마찬가지로, 자연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다.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인간 스스로가 주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새관점이나 신정통주의와 같은 현대 신학에서는 아담의 죄를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려고하지만,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율법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는 우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시다.

유다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는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이는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불순종의 심각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요성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심각한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지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선함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를 증거하려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선함이나 선행을 증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세인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증거하려는 이들을 가리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나올 수가 있었다.

불행한 환경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면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유다의 총체적 불행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될 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구원받을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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