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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7 :: 신명기 8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5.16 :: 신명기 7장 12-26절 말씀 묵상
- 2018.05.15 :: 신명기 7장 1-11절 말씀 묵상
- 2018.05.14 :: 신명기 6장 10-25절 말씀 묵상
- 2018.05.13 :: 신명기 6장 1-9절 말씀 묵상
- 2018.05.12 :: 신명기 5장 22-33절 말씀 묵상
- 2018.05.11 :: 신명기 5장 11-21절 말씀 묵상
- 2018.05.10 :: 신명기 4장 44절- 5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5.09 :: 신명기 4장 32-43절 말씀 묵상
- 2018.05.08 :: 신명기 4장 15-31절 말씀 묵상
신명기 8장 1-10절 말씀 묵상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같은 유형의 명령이 반복된다.
이러한 유형의 명령은 아들됨의 조건이었으며,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순종의 문제는 가나안에서 정착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요구되었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겟ㅓ 마찬가지로 재연되고있다.
이러한 재연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순종의 문제로 무너졌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선지서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가나안에서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의 문제는,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순종의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에게는 신론보다도 기독론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기독론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 주제를 기독론에서 신론으로 옮기면서, 전가 교리를 소외시키고있다.
신론 중심적 신앙에는 또 다른 순종을 통한 자기 의의 성취가 자리잡고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새관점은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주장한 의를 넣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말기에 순종의 문제가 무시되었듯이, 현대인에게 믿음에 대한 주제와 기독론은 구시대적 산물로 취급되면서,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나, 문화변혁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운동이나, 혹은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 선교적 교회론이 주요 주제가 되고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거듭 순종에 대한 주제가 언급되고있는 것은, 가나안을 에덴과 대비시킴으로서, 에덴에서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명령을 지켜행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과 선악과 금령을 내리신 것과 유사하다.
가나안은 에덴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성도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처의 모형이며,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안식처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는 순종은 불완전하기에,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해주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성경에서는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한 충만한 준비 기간으로 40이라는 숫자를 종종 볼 수 있다.
40년 간의 광야에서의 기간은 가나안을 준비하는 충만된 기간이었다.
에덴에서의 검증기간도 무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로는 아무리 충만한 기간이 준비되어도 불완전하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 증명해주고있다.
이는 에덴에서 검증기간 동안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안식처에서 완전한 순종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설령 검증되었다고하더라도, 검증된 인간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교만으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또한 만나를 자기 방식대로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 의존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개벽을 뜻하는 에녹이란 명칭으로 자신의 아들과 성에다 이름을 붙였다.
도시의 기원은 그 속성상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내포하고있다.
도시 문화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인간 스스로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문명의 속성은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발전되는 것이다.
첨단 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낮아진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으로 인한 것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문명의 힘에 의존하면서 극도로 교만해졌다.
예레미야는 교만해진 유다의 패망을 예언하였듯이, 극도로 교만해진 현대인에게는 최후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헤어지지 않은 의복과 부르트지 않은 발은 인간의 기본적인 염려를 없애주는 사건이다.
인간은 언제나 삶의 여정 가운데 소모되는 생활용품과 건강의 쇠약해짐에 대한 염려로 항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수고의 대부분은 영원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 가운데 생기는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인생은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생기는 더 많은 필요를 감당하여야하기에, 삶의 굴레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인생은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결책보다는 현상만을 쫓아가다가 멸망하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기에, 결국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생을 위해서는,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삶의 굴레를 넘어서, 하나님의 초월적 공급하심을 의지하며,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을 하여야한다.
영생을 준비하는 참된 삶이, 한 주의 시작을 주일로 시작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음을 다시 한 번 상기 시켜 주고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서 부름 받았음을 말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신분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부름받은 신분은 처음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처음 아담도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신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있다.
특히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개념이 결핍되어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지만, 자녀로서의 신분과 이에 상응되는 순종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백성을 대표하는,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으신 왕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단지 본을 보이는 모델로서의 예수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분명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다.
아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조건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순종이었다.
아들됨과 순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있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인간으로부터는 아들됨의 자격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아들로서 요구되었던 순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역할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관의 상징으로서의 가시 면류관, 왕의 홀로서의 갈대 지팡이, 왕복으로서의 자색 옷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징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조건인 순종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가 받는 징계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징계인 것이다.
성도에게는 삶 가운데 직면하게되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삶의 온갖 어려움은 자녀를 자녀답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삷의 환경 가운데서의 역경과 어려움은 더욱 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동력이 되어야할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곳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한다.
가나안 땅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보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곳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되어야하며, 더 이상의 검증이 요구되지 않는 안식의 장소이어야한다.
하지만 가나안이 예표하는 영원한 안식처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을 누릴 자격이 없음으로 인해서, 땅은 황폐해졌다.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어도 이를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땅은 황폐해 질 수 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동물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오직 인간의 손이 미치는 곳은 어김없이 황폐해진다.
신킬빈주의는 문명의 발전을, 에덴에서 주어진 명령으로 보고있지만,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려는 본성이 깔려있다.
하나님으로 독립하려는 인간은, 광산에서 광물을 캐듯이 땅을 황폐화시키고있다.
몇십년 전만해도 이 땅에서 황사나 미세먼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중국의 발전은 곧바로 환경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가나안과 같이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면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만든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는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 주어진다고하더라도, 결국에는 욕심으로 황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는 저주를 받았다.
에덴에서의 소산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운 소산이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에덴의 풍요를 상기시키고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인간에게 있음을 드러내고있다.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잠시일 뿐,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이 독사의 자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 인하여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이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스라엘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의 부작용은 교리의 잘못이 아니라, 모양만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거짓된 이들에 의한 부작용인데도, 이를 교리의 문제로 간주하고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넣거나, 혹은 오직 믿음을 오직 충성으로 바꾸려는 매튜 베이츠Matthew Bates의 시도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이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인데도 신학자들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행위를 끝까지 집어넣으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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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7장 12-26절 말씀 묵상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하나님의 행하심은 언약을 근거로 하신다.
은혜의 근거는 조건적 행위 언약이다.
사랑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행하시지만, 백성들에게는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실 것을 요구하신다.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더라도 조건에 의한 것이기에 은혜 언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행위를 근거로한다고 공로 개념을 적용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근원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근거로한다.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가나안에서 베푸실 축복은 에덴에서 베푸셨던 축복이 재연되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에서 누릴 수 있었던 풍요는, 아담이 힘써서 일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주된 것이었다.
아담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소산을 먹을 수가 있었다.
아담의 타락은 수고의 주체가 하나님에서 아담에게로 넘어간 것이었으며, 아담이 직접 수고를 하여도 이전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성함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덴과 가나안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에 있었음을 근거로 은혜 언약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순종이라는 조건적 언약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행위 언약에 속하였다고 보아야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현재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순종이라는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율법 아래나시어,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행위로서 충족시키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볼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개념이 상실되며, 전가 받을 그리스도의가 상실되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행위 언약 개념을 거부하는 새관점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의롭게 되기에, 그리스도가 없이도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새관점으로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속주가 아니며, 우리의 주가 되실 수도 없기에, 전통적 기독론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지만,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것이라고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그들의 자녀들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경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기에,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이 허락될 수가 없다.
신약의 시대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일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점점 더 심화된다면, 이러한 일반 은총 마져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오늘날 결혼을 기피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환경적 요인 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만큼 이 세대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왔음을 알 수 있다.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질병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질병은 고통이며, 고통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와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질병의 보편성은 죄악의 보편성과 관계있다.
질병과 죄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흡연이 죄악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은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보다도 질병에 취약하므로, 하나님의 몸된 성전을 파괴시킬 수가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담배피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나쁜 공기를 마심으로서 그만큼 몸과 마음이 상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은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이것들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보편적으로 손상되었다.
질병의 원인을 특정인의 죄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편적 은혜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가 보편적이듯, 질병 또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이 발달되어있어도,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있는 상황이다.
인간을 문제 해결 방식은 대부분 근원적이 아니라 현상적이다.
현대 의학의 치료 방법도 마찬가지로 표면적이고 현상적이다.
과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근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과학에 의존하는 한에는 근원적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로 개선될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치료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으며,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 항복할 수 밖에 없다.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구약의 시대는 신약의 시대와는 입장이 다르다.
보편적인 일반 은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반 은혜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이다.
신약의 시대에 구약의 시대적 상황을 적용시키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은혜가 임하지 않은 시대에 행하는 것은 정죄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끊임없이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은혜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 사상이 담겨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민족을 죽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반 은혜의 개념이 없는 구약에서는, 인본주의적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민족을 진멸하실 권한을 가지고계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으로 거룩이 요구되기에 악을 진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들에게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결과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게된 것은 우상의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단의 종이 되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 것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믿음은 자연의 논리를 벗어날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을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은 자기 확신을 기초로해서는 안된다.
믿음의 근거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죄라고 할 수 있다.
죄악은, 하나님의 논리가 아닌 자기 논리를 근거로 하는 일이며, 자연법적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나가야한다고 생각에는 가인과 마찬가지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죄성이 드러난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능력을 의지한다.
인간이 명예와 부를 쌓음으로서 안정을 찾고 외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근거로한 힘을 가지고있기에, 삶의 원동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하여야한다.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모든 도우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신자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많은 경험들을 하게한다.
눈 앞에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악한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부정적 상황도 그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발견하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신자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우리에게 좋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간섭하심도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자하는 우리의 내면적 성숙을 위한 것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안정을 찾는 것은, 외적인 성취에 의한 것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기인되어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사람의 행함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기반을 둘 때는 인간이 수고하는 것보다도 더 일들이 순리대로 풀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악과의 싸움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발견해갈 뿐이다.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하겠지만, 그보다도 정작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은 인생이 짊어진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자아에 집중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려는 자보다도, 영혼을 죽이려는 자를 경계하여야한다.
담대함을 위해서는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의 육신보다도 영혼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모든 인생은 한번은 죽게 되어있기에, 육신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중요하다.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급격한 변화는 혼란과 공백을 초래할 수가 있다.
이방인을 조금씩 쫓아내는 것은 점진적 환경의 변화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도 삶의 여정동안 평생에 걸쳐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인격적 성숙이 없이 단번에 거듭났다고 급속한 변화를 갖게된다면, 온갖 부작용 가운데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성도 안에 거하는 악도 삶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씩 드러내심으로서 성도가 이를 극복하도록 하신다.
많은 경우 실제 악은 외부보다도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대적들을 진멸했을 지라도,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 남겨진 악들에 오염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악은 내부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넘기신 이방인들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악의 모습들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자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극복하여야할 과제이다.
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행하였더라면, 가나안에서의 타락은 좀 더 더뎠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승리자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결국 이방인에게 패배자로 남게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 말씀보다는 이방인들의 우상을 더욱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체적으로 가나안에서 살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이러한 일들과 동일한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일들에 합류하게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리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로부터도 이익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하기에, 일상에서는 항상 이러한 유혹이 노출되어있다.
성도는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가증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을 더욱 좋아한다.
이스라엘 성전에 가증한 것들이 들어왔던 것과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경받던 목회자도 간음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부패를 보았던 루터나 부쳐, 칼빈등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의지에 대한 강조를 하였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를 하는 경향이 있다.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 그리고 새관점등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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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7장 1-11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가나안은 에덴을 유형적으로 재연시키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있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생물(창 1:28)이 있었으며, 이러한 생물 가운데에는 들짐승(창 3:1)이 있었다.
생물과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로 사용하고있기에, 동일한 존재이다.
뱀도 들짐승 가운데 한가지이기에, 에덴에는 뱀이 공존하고있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뱀을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뿐만이 아니라, 뱀까지 포함하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할 통치 명령(창 1:28)도 주셨다.
에덴에서 아담이 악한 짐승까지도 다스려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뱀과 같은 부류의 존재들을 쫒아내고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는 뱀에 대하여 아담에게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셨듯이, 가나안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을 쫓아내고 다스려야하는 통치 명령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관계를 유형적으로 연결해주고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타락한 이들이기에, 가나안의 족속들을 쫓아내는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신다.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시는 작업은, 혼돈 가운데 창조하시고 에덴을 세우셔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의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참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도행전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의 배타성은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과 공존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려면 악과 공존해서는 안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지만, 삶에 있어서 죄에 대하여 극도로 예민하여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노아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행동 방식은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구속의 나라로서의 삶이 요구된다.
신앙 생활에는 포용성이 요구되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여야하지만, 성도에게 요구되는 구속의 나라에서의 거룩함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정통 칼빈주의와 문화 칼빈주의의 주된 차이 가운데 한 가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정통 칼빈주의에서는 세상을 구속의 나라가 아닌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로 보고있다.
신칼빈주의라고도 불리우는 문화 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영역에 이 세상 모든 피조세계 포함시키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데 주된 관심이 있다면,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을 변화시켜 기독교화하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거룩성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과연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불신자를 포용하면서 이 세상을 구속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방향성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죄에 오염되어 멸망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이면서 거류민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지는 않았다.
성도의 궁극적 본향은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본향에 대한 갈망은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시에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혼인은 서로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는 긴밀한 관계였기에, 이미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를 같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하와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은 먹지를 않았다면, 처음 부부는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 의한 연합은 사람이 이혼을 생각하는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혼인은 교회를 예표하는 기능을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가리키고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혼인에 비유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의 혼인에서 시작되었다.
혼인은 같이 산다는 의미를 넘어서,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거문화는 반기독교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교회의 개념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이방 문화이다.
혼인을 통한 하나됨은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성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존재이다.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사단은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사단이 바로 아담을 유혹하였다면 아마 사단은 실패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하와를 유혹하면, 부부 관계의 긴밀성으로 인하여 아담은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혼인은 하나가되는 긴밀한 관계이기에, 둘 다 견고하지 않고는, 유혹에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만이 있었다면 에덴은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아담이 에덴에서 문화를 발전시켜서 고도로 문명화된 발달된 기술을 갖고있는 에덴을 만들었어야했으며, 성도들은 이를 다시 수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을 에덴에서 수행하였기에, 에덴은 문화 발전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어야했다.
가나안은 에덴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재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되어야만 했다.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이 에덴을 통치하였던 것과 같이,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성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가나안이라는 특수적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현재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가나안은 에덴의 재연이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인 것과는 달리, 이 땅은 이미 아담이 에덴에서 쫒겨나 살아가는 영역이며,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는 곳이다.
가끔 땅 밟기를 한다거나, 절에가서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세상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곳에까지 가서 그들의 신상을 파괴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잘못된 행동이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택함받은 구별된 성민, 즉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구별된 정체성은 단지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부패해있었기에, 하나님의 구별된 성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후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택함받은 성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내적으로, 즉 근본적으로 변화를 입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는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구별된 하나님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나 도덕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성추문을 일으켰던 J목사의 주장은, 오늘의 말씀과는 대조를 이룬다.
자기가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만은 잘남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며, 이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의 상실과 그로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근거가 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받는 성도의 택함의 근거가 되기도한다.
S교회의 O목사도, 거대한 중국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며,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떠들었지만, 결과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였다.
외적인 규모의 자랑은, 그 규모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온 지극히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근원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즉 구원 협약이 있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으로 이어지며, 이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구체화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마무리된다.
출애굽은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근거로 시행하신 것이지만, 이는 아담의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속사로 전개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구속사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제거하는 대신에 톰 라이트는 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유대인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해서 찾은 근거일 뿐이다.
선택하시고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고해서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에덴에 아담이 있다고 해서 아담이 구원받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의 실행이라는 과제가 주어진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타락과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속으로 마침이 되어야한다.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행동에 제한된 순종보다는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의한 접근 방식을 원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야하기에, 행동이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만 한다.
모세 율법과 산상수훈의 차이는 외적인 행함과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의 차이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은, 종과 상전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언약 관계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완성된다.
유대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있는 새관점이 자녀의 개념 대신에 백성의 개념만을 사용하는 것도, 구약의 율법으로는 자녀의 개념까지 도달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외식적 행동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중립이라는 것은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외면과 무관심으로 이어지기에, 이는 미움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윤리적인 접근 방식은 인간의 실체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시도일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를 입지 않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 모두의 현실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으로, 모든 인류에게는 자연법으로, 인간의 현실이 드러남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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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6장 10-25절 말씀 묵상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공로와 순종, 그리고 축복)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이스라엘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이러한 순종을 공로의 개념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순종과 공로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에덴의 경우에 있어서,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이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것이었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순종의 개념을 공로의 개념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모세 언약도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공로에 근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의 범주에 넣으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러한 혼란은 순종과 공로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현상들이다.
순종을 공로의 개념과 연계시킬 때는 행위 언약의 성격이 변질될 수 밖에 없다.
행위 언약과 공로의 개념은 별개의 주제인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 언약에 근거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가나안에서 주어진 축복의 근거)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어지는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돌아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즉 구원 협약이라는 삼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성도들이 들어가게될 영원한 가나안 땅은, 이 땅의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서의 건축물은 이스라엘의 공로가 없는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주장하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물이 천국에 보존되도록,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나안 땅의 건축이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듯,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에서의 문화물은 이 땅의 것과 관계없는, 즉 이 땅의 수고의 산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사상에는, 천국이 이 땅의 공로가 가미된 신인협력의 결과물이라는 공로주의 사상이 내포되어있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사상의 근거는 창세기 1장 28절을 전적으로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하는데서 부터 출발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전적으로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할 경우,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의 개념이 사라지며, 통치 명령에 근거한 다스림의 대상과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3중직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근거가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접목은 통치의 개념을 상실시켰으며,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과, 다스려야할 대상에 대한 개념들을 상실시켰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 들어갈 왕은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되었던 통치권이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컷는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만 해석하는 이들은, 통치의 개념이 없기에,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왕들을 이 땅의 각 나라의 왕들로 해석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의 왕들이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천국 입성후의 심판이라는 이상한 그림이 그리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것과 같이, 천국에서 누릴 문화물은 성도가 이 땅에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필연적인 종살이 과정)
만약에 아담이 에덴에서 럼증 기간동안에 순종을 완료하여서 영원한 가나안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복된 생활을 하게된다면, 천국에서의 아담의 후손들은 분명 교만하였을 것이다.
천국에서의 삶은 자신들이 잘나서 당연히 누릴 것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는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사단의 속성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놀라운 방법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천사보다도 교만하였을 것이며, 그리스도와는 전혀 은혜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에서의 눈물이 씻기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했지만, 과거를 잊은 이스라엘은 교만하여져서 결국 포로로 잡혀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축복을 누리지만,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도전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 땅에서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그리스도께 영원히 복종하게하기 위한 놀라운 사역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볼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스스로의 능력이 전혀없음에도, 맹세를 요구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그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를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선택을 하여도 능력이 없다면, 자유 의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신다.
강요에 의한 섬김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섬김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이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가 존중되어야만 한다.
타락 이전에는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에 결격 사유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의 선택에 따라서 에덴에서 추방했다.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인간에게서는 참다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하나님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가나안에서는,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이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다.
마치 장기가 손상된 환자에게 장기 이식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내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개신교를 다시 카톨릭으로 복귀시키면서 인간의 의지로 공로를 이루려고한다.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은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통치하신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가나안에서는 당연히 다른 신들을 섬기면 안된다.
당연한 요구이지만, 인간은 마귀의 자녀이기에, 자신의 애비 마귀를 따르게 되어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이 아니라고 항변 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 것이다.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의 땅에서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용납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마귀의 자녀가 되었기에,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에 부적합한 인간임을 대변해주고 있을 뿐이다.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맛사에서의 경험은 불신이 밑바탕이 된 경험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불신이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항상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의 필요를 체워주는 하나님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궁핍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쉽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변화를 입지 않고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남일 뿐이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19 (18절과 같음)
가나안 땅에서의 복된 삶에는 조건이 있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복된 삶의 조건은 충성과 순종이었다.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헤세드)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축복의 조건으로 요구되었던 충성과 순종은 처음 아담에게도 요구되었던 것이었으며,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었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충성과 순종에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보상이 주어질 예정이었지만, 처음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이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가나안에서 요구되었던 순종과 충성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재연Republication시키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과 순종의 성취는 모든 신자에게 전가되었기에 신자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영생이 약속되었으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취될 것이며, 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예시되고있다.
신자에게는 영원한 축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충성과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신자들을 위해서 고난을 담당하신 분이시다.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 뿐이다.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실제로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상황은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불행은 무엇때문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규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불순종을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닥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한 현실이 복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경험하는 실패와 좌절과 불행에 대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음을, 자신과 자녀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가나안에서의 실패와 같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대신해서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이며, 이스라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며,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오늘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고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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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6장 1-9절 말씀 묵상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가나안에서의 요구 조건은 사실상 이스라엘에게는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간에 정관이나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게 마련이다.
가나안이라는 곳은 오직 하나님 만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의 규범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속성에 적합한 조건과 방법들을 제시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보기에 좋으신 하나님이 꼭 좋으신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의 패역은 뻔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풍요의 땅인 가나안은 이스라엘을 부패시키기에 적합하였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 없었다면,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시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이상적인 가나안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상적인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은 에덴에 비교된다.
아담은 에덴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스라엘과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해서 쫓겨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참이스라엘이 되셨으며, 둘째 아담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된 성도는 참이스라엘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며, 더 이상의 율법의 요구가 없는 안식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러한 조건 제시는, 나중에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 이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제시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가나안에서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자신과 아들과 손자들에게 자신이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모습이 이어진다면, 가나안에서의 시간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이 되지 않는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은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조건이 충족되는 동안 한시적인 것이다.
가나안은 한시적 기간이 충족되면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이 이어지는 에덴과는 다른 곳이다.
에덴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진 곳이었지만, 가나안은 이미 타락하여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곳이기에, 이스라엘의 부패성을 증명해주는 곳일 뿐이다.
가나안의 역할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환경은 모두에게 가나안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문제가되는 환경의 일차적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딜레마는, 부정적 환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은 축복의 최우선 순위이다.
이는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노아에게도 명령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셨다.
번성한다는 것은 땅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가나안에서의 번성은 에덴에서의 번성을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속성을 가지고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는 번성을 행위 언약에서의 명령으로 제시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은혜 언약으로 제시되었다.
현재의 번성된 결과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번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들의 번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은혜 언약의 성취로서의 번성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유대적 이스라엘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여 소멸되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참 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의 번성을 볼 수 있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신을 섬기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은 본능이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적 존재와 함께 하려는 공동체적 본능이 있다.
신을 섬기는 것은 공동체적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선택하여, 다른 신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섬기는 다른 신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추구하는 첨단 과학은 신의 역할을 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앞으로는 첨단 기술이 인간을 상대해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면서, 혼자만의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할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다른 세계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종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심으로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최선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최선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저절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고무줄을 최대한 당기고있는 것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긴장 상태의 지속이다.
하지만 긴장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고무줄도 힘을 빼면 줄어들듯이, 긴장을 하지 않게되면, 인간의 마음과 뜻과 힘은 하나님께 향할 수가 없다.
긴장과 안식은 대조를 이룬다.
안식은 긴장과 당김의 시간이 아니다.
죄인에게 가나안은 긴장과 안식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진 곳이기에, 의인에게만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인간의 타락에 의한 본성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바리세인들의 문제는, 이러한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서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있지만, 이들의 본성은 긴장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거짓된 부패한 모습반 드러낼 뿐이다.
참된 안식은 인간의 본성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에서 회복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평안한 상태가 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모두를 대표한다.
현대인들도 부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에, 본능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정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이러한 시도조차 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에서 얼마나 멀어져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에게도 마참가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데까지 이르러야하는 것이다.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시에 마음에 새겨져있었던 것이 타락과 더불어 손상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담의 타락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마음 다짐을 하여서 마음에 새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마음에 새겨넣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죄인은 마음으로 원하여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죄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넣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마음에 새겨넣고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러한 부지런함은 가장 선하면서도, 가장 악이 될 수도 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이러한 삶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는데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공을 그리스도께 넘기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열정은 본 받을 만하지만,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열심은, 자신들이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는 이들 가운데,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하려는 악한 이들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할 것이다.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외적인 방식은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은 외적인 행동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내적인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이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하고있지만, 이러한 기준이 적용된다면, 과연 누가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내적인 변화가 없이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한시적일 뿐이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달리 이미 내적으로 부패해 있는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하는 것이나, 학교에서의 윤리 교육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교회에서의 설교는 외적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변화를 위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통로가 되어야한다.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주변 환경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인지 할 수 있도록 해야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있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종종 시내 도로 한 복판에 표어들을 붙이곤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기에 요즘에는 볼 수가 없다.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표어를 붙인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내적인 변화를 수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며, 내적인 변화가 없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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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5장 22-33절 말씀 묵상 (0) | 2018.05.12 |
신명기 5장 11-21절 말씀 묵상 (0) | 2018.05.11 |
신명기 4장 44절- 5장 1-10절 말씀 묵상 (0) | 2018.05.10 |
신명기 5장 22-33절 말씀 묵상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캄캄한 가운데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없다.
자녀라면 아버지의 음성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죽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남았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듣는 이들에게 두렵게 다가오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시내산에 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무리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서, 인간의 죄악의 희생자가 되셔서, 인간의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서, 성도들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심으로, 인간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두 가지의 대조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성도들과의 신분의 대조로 이어진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요구되는 백성들이고, 후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요구 조건이 충족된 백성들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으로서의 율법의 마침이 되심과,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했을 형벌을 직접 담당하셨던 수동적 순종의 공로에 의한 것이었다.
전자는 범죄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이었다면, 후자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인 것이다.
문제는 현대 신학자들이 후자에 속한 성도들을 전자에 속한, 즉 행위가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형태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윤리적 삶이 요구되어지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서, 현대 신학자들은 복음의 속성을 윤리적으로 변질시키고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최근에 들어서 각광을 받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윤리적 기독교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있지만, 이는 후자를 전자로 이동시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새관점에서는 자녀라는 개념이 없고 오직 백성이라는 개념만이 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새관점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제거함으로서, 후자를 전자로, 즉 기독교를 유대교로 귀속시키려고한다.
혁명적이고, 변혁적이며, 윤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록 새관점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새관점에서는 성도를 시내산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몰아냄으로서,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를 하여야한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는 고백을 하면 안된다.
아직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 언약으로 주어진 모세 율법으로 인하여,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다.
26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하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자신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있다.
하와이의 폭발하는 용암에 관한 인터넷 기사 하단에 실려있는, 기독교인들은 댓글을 달지 말라는 댓글을 보면서, 사람들의 평안은 하나님의 싸인을 보면서도 기꺼이 하나님을 외면함으로서 평안을 누리려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하나님을 외면하는 가운데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안에서 죽게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의 새언약 안에서 살게되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게끔 하신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직면함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가 어떠한지, 발가벗겨지기 위해서 선택된 민족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대신하여 고발되어지는 역할을 한 것이다.
각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두려움 가운데 모세에게 약속한 고백은, 후에 심판받을 때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이스라엘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모세에 간청하였던 내용도 하나님께서 수긍할 긍정적인 간청이었지만, 이는 상황에 대한 이해일뿐 결코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이 될 수가 없다.
근본적인 답은 먼 훗날 그리스도를 직면하고 그와 연합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고백을 인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정은 그들이 자신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인식하고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일 뿐이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기준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죄인 앞에서나 의인 앞에서나 항상 같으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기준들을 스스로 직접 충족시켜야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대신 충족시켜주신 것이다.
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요구 조건이다.
가나안에서 이러한 조건이 이행이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가나안에 머물 수가 없다.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기에, 가나안에서 쫒겨나는 것은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 공로가 요구되는 모순을 내포하고있다.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행위가 요구되는 거짓된 은혜와 참된 은혜 안에서의 행위)
새관점은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서 행위를 요구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희생적 삶을 삶으로서, 과거 유대인의 잘못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참된 복음은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행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종종 복음을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복음은 인간이 결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에 미칠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행함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하지만, 복음은 인간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온전하게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고있다.
믿음에 수반될 행위의 요구 기준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고하더라도,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행위는 대부분이 부적격일 수 밖에 없다.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은, 종으로서의 기준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기준이 적용되어야한다.
자녀는 부족함이 문제가 안되지만, 종은 부족함으로 인하여 자격이 박탈 당할 수 있다.
직장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면 바로 직장에서 해고될 수 있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한다고 교회 공동체에서 제명 당하지는 않는다.
복음에서 말하는 행위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내적인 문제가 기준이 되어야한다.
믿음에 수반되는 행위는, 부족함으로 인한 잘못된 행위로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행위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신자의 행위에 대하여 문제를 삼을 때 의도적 악행인지, 아니면 인간적 연약함에서 발생한 표면적인 문제인지를 구분하여야한다.
호렙산 앞에 선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은 중심의 변화가 없는 죄인일 뿐이다.
바리세인의 문제는, 중심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으로 거듭난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에게있어서, 중심에서 선행을 하려고해도 자신의 육신은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으려한다는 것이다.
바울도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듯이, 모든 성도는 행위가 온전할 수 없다.
성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나아가는 자이다.
신자의 부족함 가운데 나오는 행위를,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구원에 있어서 행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이는 중심에서 나오는 의도적 악행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나오는 표면적인 부족함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의도적 악행은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아님을 증명해줄 뿐이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미칠 영향력 자체가 없는 것이다.
우상은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자이기에, 더 이상 인간에게는 행위를 거론할 자격이 있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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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5장 11-21절 말씀 묵상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며, 거룩함이 상실된 이들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것은, 창조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수 많은 상황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모독을 가하는 인간의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거룩함이 요구되는 곳이기에, 그 곳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으실 수 없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한 가장 기본되는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서양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이 욕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한 것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미 기독교와 관계된 이름들이 욕이 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잘못된 행함의 결과이다.
기독교인들이 비록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망령되이 일컫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행함에 있어서 사회에서 욕을 먹는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가나안을 안식을 예표하는 곳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통치 명령을 실행하는 능동적 순종과 선악과를 금하는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나안은 아담이 실패하였던 에덴에서의 종말론적 안식을 기억하게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고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들어가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마음에 새겨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삶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피조물이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 안에서 쉼을 누리는 것과 같다.
자녀가 부모 앞에서 부모의 수고에 값을 치르고 대접을 받는다면 이는 부모를 더 이상 부모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안식은 그냥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한 삶의 조건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안식을 성취하기 위한 일상이 아니라, 안식으로부터 출발된, 안식을 누리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토요일이 안식일인 것은 일주일이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 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일주일은 안식을 위한 삶으로서, 공로가 요구되는 삶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거하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삶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이었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검증이 요구되었다.
가나안에서의 삶이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었다는 것은, 모세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하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실질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을 공로가 요구되고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종으로서의 신분일 뿐, 자녀는 아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참된 자녀이어야만 안식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기에, 이들에게는 더 이상 안식을 위한 삶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어야한다.
에덴에서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에 들어가는데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순종을 통하여 안식을 성취하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셨다.
신약에서 일주일의 시작이 주일이 됨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으로부터 출발된 한 주를 살아가는 것이다.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엿새 동안의 힘써 행하는 것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아담에서의 에덴의 상황을 재연시키신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는 인간은 안식을 위해 요구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한다.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경험을 통하여 깨닫지 않는 한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삶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인도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 성공한 삶은 우선 이 땅에서 실패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성도가 자녀의 성공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실패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법을 가르쳐야한다.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아담이 순종을 통하여 안식에 도달하였다면, 아담 뿐만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하여있던 모든 피조물들도 안식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들도 마찬가지로 탄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식은 공동체적으로 완성된다.
피조물의 탄식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안식에 도달될 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체적으로 확장된다.
노아를 구원하실 때 노아의 가족을 돌아보셨고, 소돔성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셨으며, 여리고성을 정탐할 때 기생 라합에게 속하여 있던 자들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개인의 구원은 가족 공동체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음을 본다.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하여야 할 안식은 종이었던 상태에서 도달되어야 할 안식이다.
이는 아담이 순종하였더라면 도달할 수 있었던 안식보다도 더욱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었다.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애굽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였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현재적 삶의 환경에 대한 어려움과 자신의 힘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되며, 하나님께서는 역경 가운데 기도를 귀하게 여기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다.
하지만 인간이 환경에 대한 역경과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은 인간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가를 인식하는 차이로 인하여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오직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식하게되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넘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스스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할 것이다.
인본주의 사상에 깊게 물든 현대 신학에서는 구원론 중심의 기독론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론으로 중심의 이동을 보여주고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신정통주의자들도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론적 기독론을 배제하면서, 실존주의적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있다.
칼빈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카이퍼에게도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을 찾아볼 수 없기에, 인간의 노력에 의한 문화 변혁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극단적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을 강조하는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은 찾아 볼 수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바꾸려하고있다.
실제로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제거함으로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라고하는 것과 같이, 인간은 죄의 종노릇하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인 것을 인식하여야만,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의 원형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이른다.
모든 인간의 족보의 최상위는 하나님이시기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종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육신의 부모는 그림자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부모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유물론적 실용주의에 물든 현대의 젊은 이들에게, 나이드신 분들은 더 이상 공경의 대상이 아니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더욱 멀리하고자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반역의식이 자리잡고있다.
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처음 나타난 비극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살인은 공동체의 일원을 제거함으로서 공동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인은 살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임으로서, 아벨과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였다.
인간이 추구하는 공동체는, 성경적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개인의 이익을 위한 집단일 뿐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공동체의 속성을 변질시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제거하려고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희생이다.
공동체를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죄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심으로서, 집단을 해체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다.
18 간음하지 말지니라
아담은 최초로 간음한 자이다.
간음은 공동체에서의 이탈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뱀의 유혹으로 인하여,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장차 교회를 신부로 맞이할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남자와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한 몸이기를 거부하고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를 떠난 아담의 후손들을 다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로 부르시기 위한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장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여하게될 영원한 안식을 위한 것이다.
동거 문화나 동성간 결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간음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거부가 담겨있다.
아담의 범죄 자체가 간음이다.
궁극적으로 신랑되신 그리스도가 간음한 아담을 대신하여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간음은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위와 맥락을 같이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간음에 대한 금령은, 이스라엘이 간음한 아담의 후손임을 상기시킨다.
19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도둑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뱀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하여있던 아담과 하와를 자기에게 종속시킴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였다.
도둑질하는 것은 자신의 애비가 사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기에 도둑질을 함으로서 사단의 속성을 공유하여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양심에 부끄러운 도둑질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말을 함으로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거짓은 진리와 대비된다.
거짓은 비슷하지만 다른 유사성을 갖고있다.
거짓에 참여한 자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천지 집회에 모이는 이들의 한 가지 특징은, 이들이 집회에 가는 길에서 얼굴을 좀처럼 쉽게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모임에 양산을 쓰는가하면, 5월에도 모자달린 겨울옷을 뒤집어쓰기도하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에도 마스크를 쓰는가하면, 차를 일부러 좀 떨어진 구석진 곳에 주차시키기도한다.
이들은 십여년을 정통교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자신을 포장을 하기도한다.
이들에게 거짓은 모략으로서, 일종의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한다.
신천지가 이단인 것을 알 수 있는 첫 번째는 이들이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아비는 사단으로서, 하나님께 속하여있지 않다.
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내는 것은 사단이 시작하였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가꾸게하신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이를 파괴시킨 장본인이다.
가나안은 더 이상 사단이 탐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사단의 속성을 공유해서 안된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했다.
이세벨은 아합의 포도원에 대한 탐심을 충족시켜주었으며,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였다.
이세벨은 회개가 없었지만, 다윗은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하였다.
다윗의 눈물은 가나안에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간절함이 구속주를 예비한 것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가나안에 거할 자격이 없음이 증명되었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된 가나안의 통로가 되실 수 있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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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4장 44절- 5장 1-10절 말씀 묵상
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출애굽 세대에게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이 주로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선포되었다면, 가나안 입성 직전에 모압의 땅에서 선포된 율법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염구에 두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새관점에서는 모압 땅에서 선포된 율법으로서의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이라고 보고있다.
모압 땅에서 선포된 모세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이라면, 아브라함 언약은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하는 율법은 가나안 땅에서 은혜의 삶을 누리라고 주었다고 보기에는, 가나안에서의 삶이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선택의 장소임을 말하고있다.
모세가 선포하는 십계명은, 은혜를 입은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주어졌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 그들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라고한다면, 성경의 중심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 언약으로부터 시작되어 새언약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선포하는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은 가나안 땅이 최종적 정착지가 될 수 없음을 내포하고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범죄하게되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가나안 땅에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세 언약이 은혜 언약이 아니라 행위 언약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개신교가, 몸통이되는 유대 이스라엘을 생략하고 머리와 꼬리만을 강조한다고 주장하지만, 새관점은 몸통인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꼬리로 만들어 버리고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누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혜의 선포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에 부합되는 지는 보여주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45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모세의 역할은 율법으로 대변된다.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죄인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안식처인 참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에,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까지 인도하지 않고, 그들을 가나안 앞까지만 인도한다.
모압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둔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과 율법을, 자연법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전달받고 있다.
모세가 선포하는 증언과 규례와 법도는 모든 이들 앞에 놓여있다.
46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무장도 되어있지 않았고 군사도 정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하심이다.
성도들도 삶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하심이 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는, 비록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의 가즉한 은혜가 함께 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47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죄 가운데 경험한 아모리 족속의 땅은, 성도가 약속 가운데 경험하는 현재의 삶의 환경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기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기까지 였다.
아브라함은 아모리 족속의 마무레 상수리 나무 수풀 근처에서 거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봤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들 가운데 이방인으로 거하였지만, 자신의 자손이 그들을 진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이 땅에 죄악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심판하심으로 이 땅을 새 옷과 같이 변화시켜서 성도들에게 주실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48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 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이니라
영원한 가나안을 바라보는 성도는 비록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된 삶의 환경 가운데 있지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제한된 환경을 넘어서는 곳이다.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십계명은 모세 언약의 근간이 된다.
모압에서의 모세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언약을 통하여 이루게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기 위한 언약이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아담의 범죄에서 해결받지 못한 백성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근거가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규정되는 비참한 경험을 할 뿐이다.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하신 말씀은, 처음 아담에게 하신 선악과 금령의 재연이었다.
에덴에서 마땅히 지켜져야했었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손상된 법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신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안에 세겨졌던 법을 구체화하신 것이다.
신적 기원을 갖는데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과 십계명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있다.
십계명은 자연법을 실체화한 법이며, 율법은 자연법과 십계명을 구체화한 법이다.
인간의 삶 가운데 주어진 자연법과 율법은, 궁극적으로 죄를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기능을 하고있다.
새관점은 율법 자체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가 없이도 그들은 은혜 안에 머무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선포한 모세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였듯이, 율법 자체는 죄인을 영원한 안식처인 영적인 가나안으로 인도힐 수가 없다.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이는 첫번째 계명으로서 가장 우선되는 명령이다.
인류의 역사는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갔다.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 즉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에서 신과 관계없이 살아온 민족이나 부족은 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을 섬길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에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이미 다른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지로 이를 실행 할 능력이 없다.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지배하여야할 대상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지배를 받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를 형상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상황이라는 무형의 형상에 종속되어있다.
현대인들은 상황을 만들어감으로서, 그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키려한다.
하나님은 상황을 넘어서시는 분이시며, 진리 또한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상황에 종속되어있다.
성도는 상황에 대한 종속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며, 상황 가운데, 혹은 상황 위에서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여야만 할것이다.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선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인류는 영원한 은혜 가운데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저주하지 않으시고, 죄 가운데 구원하시고자, 구속주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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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4장 32-43절 말씀 묵상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광야의 여정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처음있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출애굽 과정 자체가 구속 사건이었으면, 이후의 일들은 출애굽을 완성하기 위한 역사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은 길고 긴 구속 역사의 서막일 뿐이지 구속사의 결과물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이러한 큰 일 자체를 구속의 사건으로 보면서, 성경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구속의 완성을 위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구속 사건 자체라면,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타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그리스도 또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없는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새관점이 보는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일어난 큰 일은 아담의 타락과 관련된 내용이 없기에, 이러한 일이 아담으로 인한 타락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큰 일은 애굽을 물리치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각가지 이적을 행사하신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이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속 사건으로 간주하면서,이스라엘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출애굽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비하는 모형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은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위한 일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속이 성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의 과정은 목적을 위한 과정이었지, 출애굽을 하였다고 구속이라는 목적이 달성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 자체로 인해서 구원받은 민족으로 여기고서, 모세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본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구원받은 사건이면, 더 이상 행위 언약이 주어지면 안되기에, 톰 라이트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세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닌, 시내산 언약과 모압에서의 언약을 강론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 위한 자리에 초대된 것으로 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과 불순종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이지, 구원에 머물라고 강론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범죄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에,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심판을 의미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의 대상에서 구속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큰 일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있는 상황 가운데 선택함을 받아야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 가운데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기 위해서 애굽의 종으로 있었다.
만약에 핍박받는 상태가 아닌 풍요한 상태에서 택함을 받았다면, 이들에게 하나님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삶에 어려운 환경을 허락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기에 호소력이 있었다.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한 적절한 환경이기도하지만, 실제 인간의 상태가 종의 상태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닫고서 진실되게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펴신다.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이를 설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껏 본능적으로 섬겼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인간이 섬겨야할 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정도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라서 안믿은 것이 아니라, 알아도 믿지 않을 것을 알고서 설명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정립되어있지도 않았다.
모세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설명하고있지만,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알려고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근거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정작 기도 응답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과는 차이가 많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찾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은 오히려 이방신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종교심에서 나온 교회 생활도 자칫 진정한 하나님과는 다른 신을 섬기는 생활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심은 결국 우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였던 하나님을 경험하였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이는 인간의 뜻, 즉 욕심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욕심이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나아가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보고 듣고 하였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에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지 않는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인간은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공동체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수평적 공동체를 형성해나아가지만, 이는 수직적 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조상이 있으며, 조상의 영향하에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삶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수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서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상호 어떠한 관계를 이루어가면서 영향을 미치고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
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구원의 안식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이 사는 삶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안식을 향하여야한다.
인생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습관적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는 것은, 실은 아무 욕심과 목적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라는 육적인 욕심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생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그리스도께 종속시킴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생임을 깨닫고서, 자기 비하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으며, 무기력한 삶을 살아서도 안된다.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존재이다.
인생의 목적이 집을 장만하는 것이나, 자녀의 성공을 위한 것이나, 좋은 차를 사는 것이나, 비싼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하나님께 복종 시켜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기업을 받는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축복을 위해서 요구되는 외적인 행위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한도로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면, 인간이 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하지 않기에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이들이나, 혹은 오직 충성을 말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사역으로 만들뿐이다.
41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42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도와 관계없는 살인은 보호받아야한다.
아담의 후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범죄한 이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영원한 도피성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다.
도피성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저지른 죄악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있는 의지는 노예 의지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모르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지르는 일들이다.
인간의 죄악은 노예 의지에서 나온 죄악들이기에, 도피성이 되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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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4장 15-31절 말씀 묵상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제한되어있다.
호렙산에 불길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불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불길은 눈에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고 왜곡된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의 모습을 담아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내적인 거룩한 능력이 상실됨으로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의 왜곡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눈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자신들이 벗은 줄을 몰랐다.
이는 범죄하기 전에 눈이 어두웠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거룩한 본질이 상실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가 수치로 드러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인간은 내적인 거룩한 본질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상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를 입어서, 하나님을 내적으로 알고, 하나님은 물론 뱀하고도 내적인 교통을 할 수 있었으나, 일단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면서, 내적인 본질의 상실과 외적인 껍데기만 보이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내적인 시야가 상실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과 교통도 불가능하기에, 무엇인가 보이는 외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외적인 형상에 대한 추구는 부패한 마음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의 모형인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곳이되어야함에도, 이미 아담 안에서 손상된 인간은 거룩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눈이 밝아진 인간이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상실된 왜곡된 모습일 뿐이다.
불순종한 인간의 형상은 불순종과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왕에서 종으로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었다.
타락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단의 종노릇하는 종의 형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의지할 대상을 만들게 되어있지만, 인간이 만든 인간의 형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종의 모양일 뿐이다.
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짐승은 종종 힘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각종 짐승들은 저마다의 특징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짐승들을 자신의 상징으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강인함을 나타내고자한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이러한 짐승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이러한 짐승들이 인간의 권한에 종속되었던 존재들임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 이러한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왜곡시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인간에게만 제한 시켜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각종 짐승이나 곤충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의 형상을 동물이나 곤충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원래 거룩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동물에 귀속되도록 하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림의 대상에 포함된 짐승과,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있음을 봄으로서, 뱀은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이었지만, 유혹을 당하여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뱀은 아담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아야했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였지만, 타락 이후에 이들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단을 섬기겠다는 인간의 의사표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던 인간을 동물이나 곤충에 귀속시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을 통해서 각종 짐승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왕권이 표현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곳이기에, 짐승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다.
종종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기도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게되면,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발견 할 수가 없다.
짐승을 형상을 만들고 이를 숭배하는 것은, 통치하여야할 대상으로부터 통치를 받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아담의 타락은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된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증명되고있다.
각종 형상들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이 이러한 형상들에 종속되어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왕권을 짐승에게 내어주고, 짐승에게 종속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모욕을 주는 행위이다.
미션 스쿨에서조차도 짐승을 학교의 싱징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학교가 미션스쿨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일월성신을 섬기는 행위는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는 현상적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행위였다.
성전에서 인간의 필요가 하나님으로만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성전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장소로 삼으려고한다.
성전은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지만, 인간은 이를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성전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를 비롯하여, 목적이 이끄는 삶의 형태로, 한때 유행하였던 많은 비지니스 유형의 교회들이,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운영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교회들은 거의 다 실패를 하였던 것을 본다.
타락한 인간은 유물론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모든 대상을 실용적 가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접근하려고한다.
교회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변질되어가고있다.
성전에서 일월성전을 섬기는 행위나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의미와 기능이 변질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월성신에 묶여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부하는 행위로서, 교회에서 세상의 필요를 채우려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보다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아를 완성시키려고한다.
교회는 성전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 되어야하기에,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려고해서는 안된다.
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선택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순종만이 요구된다.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과 동일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의 요구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
선택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선택하신 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마땅한 조건이다.
순종이 없이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은혜의 선물을 누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와 사랑조차도 누릴 수 있는 능력조차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러한 구제불능의 인간에 대한 구속사이다.
21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의 일차적인 원인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모세의 역할은 율법의 역할에 유형적으로 대비시킬 수 있다.
율법의 역할은 죄인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이다.
모세 언약으로 표현되는 율법은 새언약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도록, 가나안 입성 직전에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율법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사역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앞에까지 인도한 모세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을 이어 받음으로써, 모세 자신의 역할을 완성시킨 것이다.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언약과 우상 숭배는 밀접하게 대립되어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방법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언약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를 최우선으로 하고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모세 언약은 행위를 요구하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상을 조각하는 것은 우상을 만드는 행위로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순종의 표현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없이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다.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요구는, 메마른 이분적적인 상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상과 벌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메마른 표현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행위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 있을 뿐이다.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미리 경고를 하였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악을 행한 자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떠할지를 미리 아시고 경고하시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벌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경고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할 지를 아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종노릇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받았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개념이다.
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도 이스라엘과 유사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유토피아적인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있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종말의 처지가 이스라엘과 유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들이 스스로 잘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의 심판에 항의를 할 것이다.
마지막의 재앙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인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이는 아직 범죄하지도 않은 이들을 이미 범죄한 이들로 여기는 말씀이다.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인간의 범죄 행위는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범죄행위 이전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기독교는 표면적인 행위론적인 문제보다도 더 나아가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바리세인의 문제는 죄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할 때는 항상 존재론적인 접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은 죄가 가득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죄로 인하여 극단적인 불행의 상태가 되어야만 회개하고 돌아온다.
죄가 가득 드러났을 때 길을 열어주시는 것은,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단계에서 기다리시는 것은, 죄의 행위 이전에 본질적 죄에 대한 해결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생에서의 실패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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