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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29 :: 신명기 15장 1-23절 말씀 묵상
- 2018.05.28 :: 신명기 14장 22-29절 말씀 묵상
- 2018.05.27 :: 신명기 14장 1-21절 말씀 묵상
- 2018.05.26 :: 신명기 13장 1-18절 말씀 묵상
- 2018.05.25 :: 신명기 12장 20-32절 말씀 묵상
- 2018.05.24 :: 신명기 12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5.23 :: 신명기 11장 18-32절 말씀 묵상
- 2018.05.22 :: 신명기 11장 1-17절 말씀 묵상
- 2018.05.21 :: 신명기 10장 1-22절 말씀 묵상
- 2018.05.21 :: 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신명기 15장 1-23절 말씀 묵상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매 칠 년 끝에 면제해 줄 대상은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려면, 서로에 대하여 빚진 관계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다.
안식은, 모든 과제가 완성된 곳에서 이루어진다.
안식은 창조주로부터 시작된 창조 사역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두 가지의 빚을 졌다.
하나는 에덴에서 주어진 통치명령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 선고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있으며, 주권자는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피조물은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창조주의 요구 조건은 순종이다.
순종은 일종의 종속을 의미하기에 주권자에게 귀속되는 피조물의 표현 방식이다.
하나님께는 창조주로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에 안식을 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불순종한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대신 속죄 사역과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심으로서, 믿는 자에게 안식을 허락하심으로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충족시키신 하나님의 요구조건은 통치명령과 선악과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은 존재 자체에 주어진 통치명령의 과제로서의 빚을 감당하심 것이고,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마땅히 죽어야할 빚을 감당하신 것이다.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서 출발된 생활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선취하신 안식일은 주일로서, 한주의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일인 주일로부터 한 주가 시작된다.
토요일은 제 칠 년을 뜻하는 종되었던 수고의 끝으로서, 참된 안식일인 주일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빚을 청산하기 위한 종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제 칠년의 끝은 수고의 끝이며, 종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기초 위에서 출발되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 칠년의 끝에 빚진 자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주실 구속 사역을 통한 안식의 그림자이다.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되지 않은 이들로서, 그들에 대한 구속과 안식이 준비되어있지 않기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그리스도르르통해 성취될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기에, 이방인에게 이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제 칠년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단순한 사회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 종사자들이 제 칠년, 혹은 희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면제해주는 것을 사회에 적용하려고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안식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말씀하심으로서 거룩한 진리가 남용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명령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한 한시적인 것이었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이 재연된 것이었지만, 에덴에서의 축복이 한시적 명령에 대한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은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나라를 예표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미성취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명령이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타락으로 인한 새언약을 예비하여야하는 명령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으로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이다.
조건적 축복의 성격을 갖는 행위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복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하는 조건이 달려있는 것이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 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신학 출발의 핵심으로 두었던 것은 올바른 관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패의 진행형의 상태였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약속되지도 않은 이방신들의 복을 바랐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섬겼던 우상들은 풍요를 위한 신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된 통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음란한 신의 통치를 받기를 바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하여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을 연합을 뜻하는 남녀의 결합, 즉 음란을 일삼았던 것이다.
음란은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우상들의 신전을 중심으로 횡행하였으며, 우상의 신전의 여사제들은 바로 창기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이미 간음한 자이었기에 간음과 음란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렸다.
여러 나라에 대한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 (창 1:28)을 통하여 제대로 실행되었어야했는데, 통치를 하여야 할 대상으로서의 생물의 일종인 뱀으로부터 속임을 당하여 통치를 받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사단의 통치를 받는 존재였음을 확인해주고있는 것이다.
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공동체의 일원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가난을 방치하게되면 가난한 자는 가진 자에 대한 원망이 쌓이게되며, 빈부 격차의 증가는 공동체성의 파괴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연합이라는 원리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의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가난한 자인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의 풍요를 인간들과 나누심으로서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셨다.
리스도의 나눔이 교회공동체를 이루셨듯이, 가난한 자에 대한 공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연합을 위한 공평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풍요를 나누시는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한정된 것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나눔은 보편적인 자연법을 근거로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의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세상에서 나눔의 원리를 실행하여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가나안에서의 나눔과 구제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듯, 교회에서는 사회에 대하여 나눔과 구제를 행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사회에 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교회 건물의 확장 만큼이나 나눔과 구제를 실행하였다면,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일꾼들을 모으실 때 아침 9시에 온 자와 오후 5시에 온 자에게 동일한 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대상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심지어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경우도 있다.
나눔과 구제는 경제 원리로 적용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할 만큼, 나눔과 구제는 가진 자의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나눔은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 못지 않게 나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게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은 자칫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키며, 결국 불편한 관계로 서로를 멀리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된다.
도와주는 관계와 도움을 받는 관계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관계이다.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좀 더 지혜롭게 앞장선다면, 개인간의 나눔보다는 교회 차원에서의 나눔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인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자본주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개인보다는 교회가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공동체적 나눔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가 않다.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하기에 아끼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나눔을 통한 공동체적 사랑의 표현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할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던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나누는 자의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희생이 없는 나눔은 자칫 자신의 과시일 수 있기에, 사랑하는 자를 위한 희생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과 다시오심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과 육신이 거하는 땅의 연합으로 완성된다.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는, 이 땅에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이 땅이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참여되어있지 않았음을 표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 땅에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치는 것은, 천상의 풍요를 이 땅의 가난에 대하여 손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일곱째 해에 종을 놓아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이 이 땅에서 종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것이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
종에서 해방될 때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단에 빠져들었던 어떤 교수는 자신이 공부하던 책들을 전부 불태우고 이단교회의 목사가 된 이도 있었다.
이는 잘못된 극단적인 이원론 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닦아 놓았던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어도, 성도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맺던 세상의 산물을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사용하여야한다.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핵심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과 하나님의 명령의 수행이었다.
성경의 주요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종에서의 해방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한 개념이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노예 의지 개념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새관점주의자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 할 수가 없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증명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고 증거를 보여주시고 간섭을 하셔도, 인간이 행함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하는 것이 노예 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노예 의지를 가진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고 성령의 내주하심만이 노예 의지에서 벗어나 거듭난 자로서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자유를 얻은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기를 즐겨하여야하며, 공적으로 이를 증거하여야한다.
18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섯 해 동안의 섬김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충만한 기간의 순종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받은 성도가 자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처음 난 것은 그 다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처음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모두는 타락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 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성막은 시내산의 모형이었으며, 성막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성되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성도들이 같이 먹으면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시내산 앞에 모인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궁극적으로 성도의 교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면서 완성될 것이다.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흠없는 성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같다.
그리스도가 흠이 있으신 분이시면 우리를 대신할 구속주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흠이없게 창조하셨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었지만, 모든 문제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서 시작된 것이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흠이 있는 존재들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불결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성물로 드려질 수가 없다.
대속을 위한 속죄물은 그 자체로 흠이 없어야 대속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부정한 자이기에, 표면적인 부정함은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피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기에, 거룩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정한 자이기에 거룩함이 없이 생명에 참여될 수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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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4장 22-29절 말씀 묵상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가나안이 하나의 자립적 공동체의 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만을 먹었기에, 땅에서 수고하고 소산을 먹는 것은, 직접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은, 과연 인간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지 점검이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를 제대로 완성시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제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적합한가에 대한 검증의 매개체가 되기도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는 신정체제라는 제도적 이스라엘의 기반을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제도적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향하는 그림자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 안에서 구현되어야만 했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손상됨과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궁극적 목적지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의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기 위한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어야하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의 복합성의 유지를 위한 것이다.
십일조는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며, 십일조는 자신의 소산에 문제가 안될 정도의 나눔의 몫이 정해진 공동체의 운영원리이다.
십일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적 원리의 표현 방식이다.
구약에서 십일조가 성전을 중심으로한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면, 신약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한 교회공동체의 틀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십일조가 외형과 형식을 갖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제라는데 수직적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듯이, 신약의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중심으로한 각종 헌금이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만큼이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여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이 없는 십일조의 강조는, 교회가 세상의 경영원리를 따르는 세상적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국가에 바쳐지는 조세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용되어지지만, 신정체제를 이룬 가나안에서 바쳐지는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십일조를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만 먹어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 모여서 여호와의 강림하심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가리키고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곳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식탁 교제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한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한 유형의 교회는, 교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문제를 안고있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는 유형의 교회는, 십일조가 주로 외적인 교회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지고있다.
도시 교회는 공동체 내에서의 수평적 교제가 약화되면서 십일조는 강화되는 왜곡을 수정할 과제를 안고있다.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십일조를 먹고 즐거워하는 곳은 반드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되어야한다.
아무 곳에서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만의 즐거움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 거리가 멀어 소산의 십일조를 옮길 수 없을 경우는, 돈으로 가지고 가서 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려를 악용하여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 중심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기보다는, 외적인 형태만 남기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악용한다.
가나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담아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만한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곳이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멀면, 이를 핑계로 십일조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는, 인간의 입장을 배려하심이면서 동시에 핑계거리를 차단하기 위하심임을 알 수 있다.
돈으로 성물을 사는 것이 허용된 근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하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인간은 이마져도 악용하며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이 중심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은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따르지 않는 형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외식과 허영, 욕심등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성전을 청결케하신 것은, 인간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그릇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도적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면서, 제사의 개념 대신에 예배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비록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목회자는 전임 사역자로서 성도들이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의 일원이 책임을 져야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구성되어있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성된 것이다.
최초의 나눔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일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은 이 세상을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고아이며, 신랑되신 예수님이 필요한 과부의 인생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고아이면서, 나그네요, 과부인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감당하신 것이다.
공동체적 책임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도우심을 베푸시는 것이다.
성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공동체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적 희생을 돌아보는 행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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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4장 1-21절 말씀 묵상
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2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부정한 동물을 먹지 말라는 이유)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패시키는 것이 외부에서 침입한 것인지, 아니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원인을 찾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부패가 아담의 죄가 전가됨으로 인한 인간의 본질적 내면의 부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과 집단성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이에 반대하여, 아담의 죄의 전가로 인한 인간의 본질적 부패를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신학의 차이는, 인간이 본질은 깨끗한데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부패했느냐, 아니면 인간이 내면의 본질로부터 죄성을 가지고있느냐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성결은, 나중에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부패할 때 외부의 환경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내적으로 이미 부패해 있었느냐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같다.
이스라엘의 부패의 원인이 외부의 원인에 의한 것이라면, 외부의 환경을 바꾸어주면 해결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부패의 원인이 내부에 있는 것이라면, 외부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내부의 환경, 즉 거듭남이 요구되는 것이다.
전자가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온 처방전으로는 대표적으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을 들을 수 있다.
새관점은 인간이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정통 개혁주의의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부정한 동물에 대한 금지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부패가 음식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부패했기에, 더 이상 이러한 구분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에서, 큰 보자기에 싸인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를 통하여 가이사랴 지방의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게하는 역사를 통하여, 철폐하신 것이다.
여기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의 철폐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음을 보여준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음식법은, 이방인과 구별되기 위한 거룩함의 일부분였지만, 이스라엘을 더럽게할 수 있는 요소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식교에서는 정한 음식의 생물학적 특성, 그리고 부정한 짐승들의 먹이사슬과 영양 성분, 그리고 정결함의 문제등을 언급한다.
물론 안식교인들의 주장도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룩함을 위한 분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타락한 후에 저주를 받은 생태계는 타락 이전의 생태계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뱀도 저주를 받아서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타락 이전에 생물의 죽음이 있었느냐의 논란도 끝나지 않은 논쟁 가운데 속한다.
타락 이전에는 초식 동물만 있었느냐?
아니면 육식동물이 타락 이전에는 초식을 했었느냐?
유신론적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타락 후에 짐승들의 식습관에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표상으로서, 타락 이전의 모습에서 순종의 요구가 충족된, 에덴에서의 목표가 성취된 곳이어야만 한다.
타락 후에 저주를 받은 생태계의 변화 가운데에, 짐승의 생태계가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해본다.
앞장에서는 가나안에서의 거룩함을 유지 하기 위해서, 이방 족속들의 우상 숭배의 문화가 유입되지 않도록 철저한 정결함이 요구되었듯이, 음식을 섭취함에 있어서 죄와 관련된 좋지 않은 모습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구별된 식생활에도 불구하고 타락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자신들의 부패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었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부적 상황을 아무리 깨끗하게 해도 그 안에 내면 깊숙히 부패되어있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깨끗해 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 11)”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요한 모든 조치들은, 그들의 부패가 외부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상황의 문제임을 드러내는, 실험실적인 증명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적 증명을 통한 결론은,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타락한 정도는 외부적 환경을 통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즉 거듭남이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의 외부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사역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의 철폐는, 더 이상 외부적 상황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며,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의 철폐도 마찬가지로 외부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니 더는 음식을 통한 구분으로 거룩해지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함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내면의 더러움을 지적하신다.
겉으로 깨끗한 척하는 외식하는 바리세인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비난하시면서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선택받은 백성과 이방인의 차이는 선택받았다는 것 밖에는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은, 과연 인간이 깨끗함을 유지 할 수 있는지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다해봄으로서, 더 이상 외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들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꾀맺추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단지 실험적 선택일뿐, 죄인으로 증명된 사람들일뿐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잘못이, 음식법, 할례법, 제사법을 이방인과 구분하기 위해서 교만하게 사용하였다는데 있다고 하지만, 이는 전혀 본질이 아니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는 음식법은 궁극적으로 더러운 것이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유대인들 내면에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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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3장 1-18절 말씀 묵상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오늘 말씀은 가나안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해석하고 적용되어야할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깨끗함이 유지되어야하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순종이라는 깨끗함으로 들어갔다고하더라도, 가나안에서 깨끗함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땅인 가나안이 오염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가나안을 오염시키는 자로서, 완전히 소독을 한 곳에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모두다 못쓰게되기에, 모두 다 오염되기 전에, 오염된 것을 사전에 차단시켜 제거하여야한다.
가나안의 깨끗함은 에덴의 회복이었으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있었다.
유혹하기 위한 이적과 기사는 에덴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수단이었다.
뱀의 유혹에는 그럴듯한 거짓이 있었듯이, 거짓 선지자가 행하는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적과 기사와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더 유혹하는 힘이 강하고, 매력적이 될 수 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적과 기사보다는, 거짓인줄 알면서도 마음의 소원에 길을 열어주는 이적과 기사이기에,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더욱 매혹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유혹은, 에덴의 상황을 기억하게해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게해준다.
혹에 대한 되돌아봄은, 유혹의 문제가 해결된 영원한 가나안을 소망하여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혹은 교회 안의 상황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이단들은 여러가지 모양을 보여주려하지만 실상은 거짓이다.
거짓은 이단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시키면서, 교인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목회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자신의 외적인 능력이나,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을 강조하며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거짓의 무리들이다.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는 자기자신을 높이려하지는 않는다.
거짓에 무방비한 교인들은, 스스로 욕심을 따라서 거짓에 참여하려고한다.
유명해지려고하거나 외적으로 규모가 큰 교회를 추구하거나 하는 것들은, 자신을 외적 규모와 대비시켜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위험한 시도들이다.
목회자이건 교인이건 관계없이, 높아지거나 유명해지거나 능력이 있다고 소문난 사람치고 말년에 깨끗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가나안과 달리 세상은 이미 오염되어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였지만, 가나안에서는 더 이상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시지 않으신다.
교회도 더 이상 이적과 기사가 요구되는 곳은 아니다.
엄청난 것을 바라면서, 특별한 상황에 들어가기 원하는 이들은 신천지와 같은 미혹에 쉽게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성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화의 과정 가운데 더욱 더 깨끗해지는 과정을 향하여야한다.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신천지와 같은 이들의 말씀 풀이는 속임수에 불과하지만, 분별력 없는 이들에게는 굉장하게보이고, 이적과 기사 못지 않게,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정도로 유혹의 덫에 빠져들어간다.
유혹하는 자는 비슷한 모습으로 말씀을 각색하면서 접근한다.
신천지들의 속임수는 에덴에서 뱀이 하와에게 말씀을 각색하면서 그럴듯하게 유혹을 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뱀은 에덴에서 유혹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유혹을 받았듯이,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로 교회 안에서 유혹을 받는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교회 안에서 누구보다도 열심이 활동함으로서 사람들의 신뢰를 쌓아간다.
어떤 이는 10년 이상을 열심히 활동하며 신뢰를 쌓아오다가, 기회가 오면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도 보게된다.
이단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에 따른 교회 자체의 정체성의 변질이다.
신앙의 본질이 왜곡되고 상실되면서, 정통 교단에서는 굉장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자신을 과시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기도한다.
기도의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목사들은 마치 능력이 자신에게있다는 암시를 함으로서 하나님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함으로서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려는 이들은 마치 자신이 광명의 천사라도 되는 양 성도들을 미혹시킨다.
참된 성도는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볼 때, 모세와 같이 중보자가 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죄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는 가운데,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마찬가지의 죄인임을 깨닫고서, 겸손함으로 비난을 삼가야한다.
가나안에서 유혹을 당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별력이 없었던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모습들은, 자신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론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공식적인 제사장인 아론이 만든 것이었으며, 이들은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의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서, 자기 방식대로 섬긴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과 금송아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외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욕심의 씨앗에 있다는 것이다.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땅 가나안에서 살만한 자격이 있는지 검증되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된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변하여 검증을 받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가나안에서 살만한 자격이 있는지 거짓 선지자와 꿈 꾸는 자를 통하여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 유혹을 허락하시는 것은 검증probation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유혹하는 자에게 있지 않다.
유혹하는 자는 단지 사용되어질 뿐이다.
가끔 악한 자에게 너무 흥분하여 그를 징계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도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관심이 있으시다.
성도는 유혹하는 자나 악한 자에 대하여 너무 흥분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유혹하는 자는 단지 사용되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유혹하는 무리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혹하는 잘못된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강건하게 만드신다.
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는 것은, 완전한 순종이다.
가나안의 특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한다.
가나안에서의 거짓 선지자와 꿈꾸는 자의 목적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고서,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야한다.
이는 에덴에서 마땅히 완성되었어야할 목표였으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영원한 가나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의 모든 세계는 가나안을 지향하여야한다.
영적인 가나안이 모든 믿는 자에게 다가왔기에, 성도는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할 수 있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섬기고, 그를 의지하려면 삶의 모든 관심사를 여호와 하나님께만 향하여야 한다.
인터넷을 통한 세상의 너무나도 많은 사건과 사고, 악행들에 대한 소식은 자칫 하나님께 향한 마음을 앗아가기도한다.
특히 주식 투자나 도박은 하나님께 드려질 마음을 빼앗아가는 치명적인 것이며, 투자나 도박을 하면서 나오는 정보들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역할을 하기도한다.
세상에 투자하는 것은 자칫 자신을 옭아 맬 수단을 제공해주는 것이기에, 성도는 주식 투자에 대하여 신중하여야한다.
주식투자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불법이 아니지만, 하나님께 향하여야할 마음을 빼앗아 간다는 면에서는 하나님보시기에 악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가나안이 될 수 없는 것은, 세상의 합법이 하나님보시기에 불법인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인간의 완악함에 기인된 것이다.
5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의 유혹에 넘어갔으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되었다.
가나안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미 속임을 당한 자의 후예들이기에, 체질적으로 속이는 자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듭난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서도 속임을 당하여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표면적인 모습을 넘어서, 인간 본연의 체질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것이며, 이는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하시기 위해서 뱀의 유혹에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시험은 일종의 타락한 것에 대한 확증을 위한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행위 이전에 마음의 중심의 문제였고, 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유대 이스라엘의 일부 행위로 국한 시키면서, 이러한 행위에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본질을 피상적인 것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톰 라이트는 거짓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부류에 속하여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톰 라이트를 따르고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검증 과정에 노출된 것이다.
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영적인 생명은 육적인 생명보다도 우선 순위에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께 대한 우선 순위 안에서 부차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유혹하는 이들은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 12:53)”고 말씀하신다.
혈연, 학연, 지연은 인간 사회의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고있지만,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서는, 오히려 유혹하고 시험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혈육을 같이하는 형제의 권면은 종종 사단이 유혹하는 통로가 되기도한다.
사단은 인간적으로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들어오기에, 세상적인 가까움은 종종 사단이 시험하는 통로가 되기도한다.
8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유혹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가나안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죽이지 않으면, 모두가 오염이 되어서 다 죽게되기 때문이다.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러했다.
성도도 자신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삶의 여정에서 종종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신앙인은 결단을 내려야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한다.
비록 사회에서는 고립되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손상되지 않는다.
이 땅은 가나안이 아니고 청결을 유지할 수 없는 이미 오염된 곳이기에 성도가 자신을 보호하는 수 밖에 없다.
성도에게 가장 큰 슬픔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가 오염이 되어 교회공동체를 떠나야 할 때이다.
특히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것은, 사단은 목사 한 사람을 흔들면 쉽게 교회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만큼 중요한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를 목회자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서 쉽게 악용하기도한다.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하나님은 애굽에서 오염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이기까지, 수 많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하게하여 가나안에 들였지만, 이를 다시 오염시키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사단의 무리이다.
성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수 많은 과정들을 거치면서 많은 대가를 치루었을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끔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여야 할 경우가 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교훈은 교훈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거듭남이 없이는 교훈으로 변화될 수가 없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과는 구별되어야한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집단적 우상 숭배는 모든 악이 퍼져나가는 온상이 될 수 있다.
우상 숭배라는 전염병은 모두를 파괴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을 철저하게 격리시켰듯이, 우상 숭배자들은 격리되어야만 했을 뿐아나라, 집단을 오염시킨다.
철저한 조사를 통하여 전염성이 강한 우상 숭배에 감염된 곳이라면, 마치 조류독감이 감염된 곳과 같이, 완전히 살처분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
조류 독감을 철저히 차단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상 숭배라는 악은 집단을 감염시키고 결국 모두를 죽일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일반 은혜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의 전염성을 약간이나마 차단하고있지만, 우상 숭배의 문화가 가속될 경우 하나님은 일반 은혜를 거두어가시는 가운데 재앙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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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2장 20-32절 말씀 묵상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21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22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25 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
26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
27 네가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드릴 것이요 네 제물의 피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위에 붓고 그 고기는 먹을지니라
28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
피는 육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에, 피는 생명과 동일시 될 만큼 중요하다.
피는 손상된 조직을 회복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피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은 썩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피는 육적인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있다.
모세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영적인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신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광야에서와 달리 직접 살육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행함의 지침이 필요하였다.
가나안이 비록 안식의 땅이었지만, 가나안에는 살육에 의한 죽음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속죄제로 인하여 동물의 희생이 필요하였기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는 달리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죄와의 관계 가운데 정립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고기를 먹는 것 자체에 대하여는 비교적 엄격한 규율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피에 대하여는 분명한 지침이 주어진다.
피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은, 에덴에서 있었던 생명 나무와 연계시켜 볼 수 있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되었다.
그렇다고 동물의 피를 먹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기에, 동물의 피는 생명을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고하더라도, 단지 표상일 뿐이다.
약에서는 피를 먹는 행위에 대하여 엄격하게 금하고있는 반면에,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외에는 피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것을 본다.
신약에서는 피를 죄사함과 연계시키고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있는 피는 정결케하는 피이면서, 피흘림을 죄사함과 연계시킨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죄를 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피흘림보다는, 희생을 강조하지만, 그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하지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은 분명 속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에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한다면, 구약에서의 속죄제를 비롯한 피흘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를 먹지 말아야하는가?
성경에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있다.
노아에게도 고기가 허락되었지만, 고기를 생명되는 피째 먹지말도록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피를 먹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피는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잔에 담긴 포도주를 자신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성도가 성례에서 마시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성도에게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마시는 잔으로서의 피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지 말라고 금한 것을, 참된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기에, 성도는 성찬식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기념하며, 생명에 초대받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피는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하면서, 또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속죄제에 드리는 동물의 피로서는 사람이 깨끗하여질 수 없다.
속죄제로 드려지는 짐승은, 이미 타락한 피조세계의 한 존재로서, 사람의 죄가 안수를 통하여 전가되었기에,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피가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된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여 잔을 마시는 행위는 주의 몸을 먹고 마시는 행위이기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야한다.
고린도 전서 11장 27-30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잔을 마시는 행위는, 다시 생명에 이름으로서, 영적 자녀를 낳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피를 금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영구한 복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되는 축복과,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게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더불어,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자녀를 낳았어도, 이들 가운데 참된 생명이 있는 자녀를 낳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란 말씀은 획기적인 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인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후손에게 주어진 복은 피로 인한 생명과 연관되어있다고 생각된다.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가나안에서 피를 먹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안식교에서 피를 먹지 말라고하는 이유를, 피에 독성이 많다는 성분 분석에 의존하여 해석하고있다.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몸 속의 독성들이 피로 스며들어서 독성이 많다고 말한다.
이는 피를 먹지 말라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해석 방법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게 하실 때에
30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 가운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있다.
자녀를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욕심을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속성들을 지닐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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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2장 1-10절 말씀 묵상
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성이 요구되기에, 인간적인 방식이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준수되어야한다.
이 땅에서의 삶의 영역은 가나안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자연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통치 영역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통치 영역이라는 두 나라two-kingdom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 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이 아닌 통치 영역에, 하나님의 구속 영역에서 요구되는 사항들을 적용시키는 오류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속 영역의 속성을 추구하는 가나안 땅에서 요구되는 방식을, 일반 은혜의 통치 영역인 삶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더 이상 인간적인 방식이 허락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요구되는 배타적인 곳이다.
인간적인 방식은 이미 타락한 자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배제와 포용은 인간 사회에서 항상 논의가 되어왔던 주제이다.
일반 사회에서 개인의 주관적 기준은 배타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배타성을,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인, 삶에 적용시킬 때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을 자신의 삶에 얼마나 적용하여야하는가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배타성은, 가나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되듯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나라가 아닌,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시켜야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타적으로 적용시켜야한다.
성도가 자신이 속해있는 일반 은혜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배타적인 행동을 하게될 경우, 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모형은, 오직 교회 공동체라는 범위 안으로 제한되어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범위를 확장할 경우, 또 다른 유형의 혼란이 생기게된다.
사회의 문화변혁과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Christianizing world 주제를 가지고있는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는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두 나라two-kingdom이 아닌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one- kingdom를 주장한다.
이들에게 배타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배타성은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배타성이다.
성도의 배타성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심의 산물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파멸시킬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들이다.
이는 옛사람에 익숙해있던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성도들이 제거해야할 방식들은 주로 인간적인 방식들이다.
이 가운데에는 인본주의나 자유주의 방식의 사고도 포함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역에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방식이 요구되기에,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해야한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 이외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들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근거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을 근거로하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해석에는 몇가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근거로 전통적 성경해석을 부정하고서, 유대주의적 성경 해석을 시도한다.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는, 주로 에센파를 중심으로한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였으며, 또한 해석에 있어서도 부분적이어서, 객관성을 상실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산물로서, 성경에서의 해석조차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전의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뒤집었다고는 하지만,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몰두했던 슈바이처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주제로 만든 기독교는 윤리 도덕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있다.
거룩함을 위해서는 윤리 도덕을 넘어서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필요하다.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인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에덴에서는 완전한 통치가 요구되었지만, 가나안에서는 이미 오염된 부분을 제거해야했다.
에덴과 달리 가나안은 과거의 우상 숭배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면에서는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청결작업은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청결작업의 실패는 성도가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령이 자신을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이렇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거룩한 모습은 성도가 참된 교회의 모형이 되며, 영원한 교회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살아가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청결 작업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이는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서, 성도는 더욱 겸손해져야한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적인 청결 방법으로서 참되고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원론만 제시할 뿐, 각론적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능이다.
우상과 우상의 제단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는 수단이었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면서 남녀가 성적인 문란을 합법화시킬 수 있었던 음란한 장소였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는 빌미로 온갖 악을 합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의 악행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우상을 따르게 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며,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간은 기독교 마저도 우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우상화된 기독교를 허물어버린 이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개신교는 개혁주의라는 기본 구조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부패될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우상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숙이 들어와있다,
현대인들의 섬기는 우상은 경제 활동 가운데 깊숙히 자리잡고있다.
국가의 행위의 정당성의 기준은 이익에 있으며, 현대인들은 경제가 모든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경제 원리는 합법적인 것이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합법화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경제 원리와 이익의 추구는, 하나님께 향하여야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사로 잡아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간다.
주식에 몰입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하고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동산으로 투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일상에서의 삶의 즐거움과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이익을 추구하는데 내어던짐으로서, 자신을 우상에게 얽어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주식과 부동산은 합법적인 자본주의 경제 원리이지만, 신앙 생활에는 치명적인 것이다.
투기와 도박은 제거해야 할 가장 심각한 우상 가운데 한 가지이다.
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려져야한다.
실제 사람들은 우상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뒤바꾸어 행하기도한다.
입시철에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교회가 우상에게 하는 것과 같이 행하고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이 모두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준비되어질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손 가운데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으신다.
타락한 이들 가운데 철저하게 구별되고 성별된 가운데 모든 조건이 충족된 곳에서만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은 성결함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곳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12지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로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다고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삶의 모든 영역과 내용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는 모두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드려짐으로 마침이 되었다.
비록 성도에게는 더 이상 이와같은 드려짐이 요구되지 않지만,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모든 삶이 드려지는 형태를 취하여야한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가나안에서의 드려지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들은, 대표성을 가지고있는 것으로서, 신약에 와서는 모든 삶의 영역이 드려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자기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의 것을 지혜롭게 관리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 앞에서 임시적으로 실현되었다.
모세를 비롯하여 장로들과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였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11)”
가나안에서도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이는 에덴에서 상실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가나안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원의 장소는 아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구원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순종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다.
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에서는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론과 우주적 교회론등은 WCC가 세상에 관여하기 위한 교회론으로서 지극히 세상적인 교회론이다.
교회는 세상적인 방식과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이들의 모임이 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는 구별됨을 철폐하고, 세상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세상과 하나로 모임을 가지며,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간다.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missional church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며, 실존주의 철학의 산물이기에, 인간의 소견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라는 용어가 들어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모이는 교회로서의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와는 구분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을 철폐하여야했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는 교회는 인간적인 방식이 제거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모세는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가나안을 안식과 기업이라고 봄으로서, 가나안을 최종적 안식의 땅으로 보고있다.
출애굽 여정 가운데 순종하는 자에게 입성이 허락되었던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의 땅을 예표하는 모형으로서의 안식의 땅이었다.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과는 구별되며,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가나안에서 허락된 안식은, 하나님의 조건적 은혜 가운데 주어진 한시적인 것이었다.
영원한 안식과 대비되는 조건에 의한 한시적 안식은, 안식의 모형일뿐 영원한 안식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업과 안식은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체로서의 영원한 유업에서의 안식을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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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장 18-32절 말씀 묵상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으면서 내면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면서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외적인 변화를 추구할 뿐,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불행만 낳을 뿐이다.
쉐마 방식의 규제는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죄 가운데 절망에 빠지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율법과 달리 복음은 인간의 근본을 바꾸어 거듭나게하는 것이다.
윤리 실천적 접근 방식은 근본이 거듭난 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무력한 대안일 뿐이다.
윤리 이상의 율법으로도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이 윤리로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더 이상의 윤리나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다.
교회의 영역에서 생기는 도덕적 문제는 주로 거듭나지 않는 이들의 문제일 뿐이다.
거듭난 이들은 설령 범죄하였다고하더라도,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잘 지키고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킨만큼 형통한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 이전에 보편적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가지고있다.
성공한 유대인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말씀이 가지고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혜의 원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유대인의 전통은,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성공한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그들의 삶을 고착화시키고있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교만한 삶은,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씀의 의도하는 바와 말씀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때문이다.
신명기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한다는 것보다는, 다윗과 같이,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은혜 이전의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창조 원리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법적인 원리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죄를 드러내는 자리에 임하게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도를 윤리 규범 안에서 바른 생활을 하게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으로 고발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장수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연법의 원리에 속해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아직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지는 않는다.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주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운영하시는 원리이다.
십계명이 자연법의 모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십계명에 창조주의 가장 근본적인 창조 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원리로 적용이 된다.
복음은 자연법을 거스리지도 않으며, 이를 대적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받았다고 자연법이나, 일반 상식을 무시하거나 경히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한다.
자연법과 상식이 무시되는 교회 생활은 사회의 지탄이 되면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하는 조건적 축복이다.
축복과 저주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저주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 안에 담겨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삶의 원리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상적 접근은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올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행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기보다는 이를 애써서 외면하면서 주변국의 도움을 청하곤하였다.
현대인들도, 상황과 환경의 어려움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한 가지이다.
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말씀이 어느 정도 지켜졌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한시적인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이스라엘 분열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의 분열의 원인이 르호보암에 있기 이전에 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다.
나타나는 현상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현대인들은 그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한다.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모세는 신명기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본론을 언급하고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에 따른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음을 말함으로서, 모세 언약이 전형적인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음을 보여준다.
모세 언약의 가장 기본되는 골격은 아담 언약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이기에, 은혜의 요소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전적인 행위 언약이며, 모세 언약은 타락한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기에, 은혜 언약의 요소가 담겨있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아담 언약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기도하지만, 이는 아담 언약이, 창세 전 구속 언약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 은혜 언약에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언약을 자체의 속성만으로 볼 때는 아담 언약이나 모세 언약이나 동일한 행위 언약이기에,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재연 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이 오직 은혜 언약이라고 주장하지만,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본질substance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지만, 표변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고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검증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시험에 응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들을 은혜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덴이 안식이 성취되지 않은 장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은 안식이 성취된 장소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으로서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가나안이 은혜의 장소이며,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주장인데, 이는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요구되는 장소에는 적합하지 않은 주장이다.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사역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보는 복음은 윤리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새관점을 좋아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설교는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이들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삶의 형태를 바꾸는 윤리에 불과할 뿐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결코 안식이나 은혜의 개념 가운데서는 설명될 수 없다.
비록 안식이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였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조건이 주어지기에 참된 은혜와 안식은 아닌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이나 은혜를 예표할 뿐이지, 그 자체로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왜 기필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야만 했는가?
가나안 땅은 에덴의 유형적 재연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불순종을 재연시킴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불순종을 재연시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에덴에서의 아담과 차이가 있다면,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인류를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가나안이라는 무대에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연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불리워졌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으며, 양심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명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야할 영원한 나라를 예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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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십계명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마땅한 자세를 설명한다.
모세의 강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이 아닌 의무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자상하게 설명하면서도, 권위를 가지고 강변하는 것이다.
국민이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규정하는 이스라엘에 부합된 의무를 마땅히 수행하여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을 받았지만, 축복과 저주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속적인 교훈을 받아야만 했다.
마치 자녀가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 것과 같다.
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출애굽의 과정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기사는 택함받은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 장면이었다.
교훈과 위엄과 강한 손과 펴신 팔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가르치는 모습이며, 가르침을 받는 이는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고, 그의 펴신 팔에 안기어서, 강한 손에서 꼼짝못하고 교훈을 들어야하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음을 본다.
성도의 걸어가는 길도 하나님께 붙들린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험난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출애굽의 전 과정은 택함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가는 전과정과 유사하다.
성도 한 사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강림하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내포되어있다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는 성도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보여준다.
성도를 위한 세상과의 싸움은, 택함받은 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아야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승리를 이 땅에서 경험하여야한다.
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출애굽 과정에서 행하신 이적들은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영적 전쟁에서의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분리를 통한 영적 전쟁은 고통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평생 신앙생활의 동력이 되며, 현재의 삶의 위로가 된다.
5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적들은, 미숙하고 아직 불신자였을 때의 모습이 남아있는 가운데,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보여준다.
광야에서의 여정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과정이다.
장성한 분량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보살핌과 돌봄 가운데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까지, 그리스도와 삶을 공유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다.
자신이든, 혹은 주변 상황이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시험하고, 반항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단의 통로가 되는 이들은 나름대로 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성도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7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이를 담을수 있는 마음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애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명해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문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으로는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험하게하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눈으로 보게 하시지만, 택한 자에게는 경험하고 본 것을 담을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존적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적 사고는 하나님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실존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고의 출발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보편적 사고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에 대한 요구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축복이 가능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적인 실존주의 방식으로서, 자신들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음으로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 즉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축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은, 모든 인간은 축복의 길을 선택할 수 없으며, 설령 축복의 길을 선택하였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우리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 힘입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된다.
하지만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한 순종을 하였던 것은 아니다.
에덴에서부터의 삶을 시작한 아담과 달리,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에게는,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즉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였으며, 광야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순종과, 가나안 땅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는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종은 가나안,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약속의 땅은 타락으로 인하여 쫓겨난 에덴의 바깥에서 다시 구원에 참여되는 땅으로서, 에덴과 에덴의 바깥의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타락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 소산을 먹는 땅과 대조를 이루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에덴을 상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을 예표하고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다.
아들은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들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서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 보여주고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순종의 능력이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의지하여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다.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 땅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동해야지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기보다는,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리는 안식의 땅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주권적 공급 하심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였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사는 동안 안식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탐욕의 방식을 취하였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의 안식을 넘은 영원한 가나안을 이 땅에 구현하면서 사는 삶이다.
성도는 주일,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의 날을 일주일의 첫 번째 날로 삼으면서, 한 주를 그리스도의 안식 위에,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생활하는 안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누릴 안식은 조건적인 안식이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안식은 순종을 전제로한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순종을 통한 안식이 요구되었던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에덴을 돌이키면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하면서,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에덴과 가나안을 넘어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땅의 종말은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가 성취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안식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누리는 안식의 삶이 되어야한다.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불순종은 다른 신을 섬기고 그것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불순종과 악행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불순종과 악행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거부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족하려는 것이 불순종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신은 자기를 위해 만든 신으로서, 자기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있다.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가나안에서의 공급이 끊기듯이, 현대인들의 자족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체워주지 못하는 죽음의 굴레인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불순종은 인간 모두의 불순종을 대변해주고있으며,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들은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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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0장 1-22절 말씀 묵상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처음 산에 올라간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원론적 죄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번째 산에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집행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한 계명보다는 오히려 죄를 정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와 새로운 중보자를 세우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을 들고 나무궤를 만들고서 중보자로서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장작을 준비해서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모습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를 메고 손수 피흘리시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신 모습이었다.
두 번째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비통하였으며, 그들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성도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한 존재이기에, 중보자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처음 돌판과 달리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정죄와 은혜를 내포한다고 생각된다.
처음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하여 이미 깨어졌지만,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 주신 명령은 궁극적으로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 돌판이 아담 언약을 상기시키는 행위 언약에 강조점이 있다면, 두 번째 돌판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은혜 언약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에 이르기까지는 정죄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정죄와 심판은 행위 언약에 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에 의해 규정된 죄값를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거두어지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언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기에, 모세 언약 자체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불순종에 대한 진노로 부수어뜨릴 것이 아니기에, 언약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담겨있는 언약궤에 보관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을 목도하시면서, 이를 직면하시면서 풀어나가시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길이 없었고,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심정을 알 수도 없었다.
성도의 세상을 향한 관점은 모세가 다시 두 돌판을 다듬어서 시내산에 올라간 것과 같이, 첫번째 돌판보다는 두번째 돌판의 심정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중보자 모세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음을 깊이 깨달을 때, 결코 사회에서 욕을 먹는 그리스도인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두 번째 돌판은 수정되거나 처음 돌판에 쓰여진 것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되거나 수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처음 아담과 맺었던 행위 언약이 수정되었거나 취소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종결과 더불어 새로 시작된 것이기에, 아담 언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문제 삼질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며, 아담의 범죄에 대한 문제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더불어 종료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톰 라이트는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과 대비시키는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해석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것인지 본을 보여주신 혁명적 메시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처음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은 것과 같이 아담의 범죄는 결코 묵과될 수 없는 것이다.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두 번째 돌판은 언약궤 안에 있었으며, 이는 속죄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속죄소는 백성들이 죄를 사함받기 위한 곳인데, 십계명의 돌판으로 죄가 규명된 가운데 사함을 받는 것이다.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알고서 용서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를 받은 것은, 십계명과 더불어 율법으로 규정된 죄에 대한 용서라는 것을 인식하여야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의 처음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다른 신은 욕심을 위해서 자기가 만든 신이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회 생활은 교회가 다른 신을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는 이렇게 변질되는 교회를 정결케할 의무가 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더불어 종료되었다.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각종 제도도 종료되었으며, 십일조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십일조는 첫번째로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지파는 오늘날의 목회자와는 관계가 없다.
십계명과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침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레위지파와는 관계없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름으로서 더 이상 죽음에 종속되는 제사를 행하지 않도록 하였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지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한시적인 것이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에서 십일조를 교인의 자격과 연계시키는 것은 욕심에 의한 것이며, 더 이상 개혁주의 교단이라고 표방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인격적 관계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한다.
인격적 관계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모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과 비인격적 관계에 놓여있는 이들로서, 우리의 이전 상황이 이러했었다.
일찌감치 멸망되었을 우리도, 중보자로 인하여 화를 면한 이스라엘과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하여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는 이만이 가능하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면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기에, 중보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성도의 중보기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중보는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는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중보 기도의 삶은 성도의 삶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존귀한 특권인 것이다.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중보자는 동시에 인도자의 역할을 한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하나님께 중보하지 않고는, 백성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한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모세가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 먼저 앞서서 가나안을 향하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먼저 앞서서 성도가 거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는 참된 인도자가 되신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확장되어간다.
중보자와 인도자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시켜나아갈 수 있어야한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은 자로서, 서로 중보하는 가운데 서로를 인도하면서,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모세의 말은 율법이 단순히 형식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보여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들은 반복적으로 일정한 형식과 틀을 가지고있지만, 모든 것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형식과 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새길 삶의 규범이 되었지만, 모세가 마음의 중심에서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고해서,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쉽게 무너진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형식들은 궁극적으로 그 안에 담겨질 내용을 위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모두 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었으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현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이러한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형식마져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하기에 형식만으로 내용을 대체하고 싶어한다.
로마 카톨릭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어느덧 로마 카톨릭과 같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면서, 모세가 말한 것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다.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지만, 단순한 이치도 깨닫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보편적 인간의 현실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훈계하고 야단치는 근본에는 자녀의 행복을 위하는 깊은 뜻이 있지만, 아이는 철이 없기에 부모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고,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고 조금만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여호와를 마음 깊이 경외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하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인 죄인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는 철든 자식과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모든 하늘의 하늘은 더 높은 하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상위 구조upper register로서의 하늘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의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 즉 하늘upper-register과 땅lower-register의 구조 안에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위 구조와의 단절을 맛보아야했다.
사람이 살아나아가는 것은 눈에보이는 하위 구조lower-register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신앙 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인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권과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 앞에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구원은 받았다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은 것은, 일종의 쓰임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되는 선택을 받았지만,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될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역할을 한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영광의 자리에 초대받았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교인이라할지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이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택함받을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택하시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왜 나를 택하시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다.
택함받은 백성이라도 택함받은 것의 근거를 자신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택함받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이다.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행위로는 이미 처음 돌판이 깨어짐으로 인해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더 이상 행위로서의 선을 기대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 마음 중심에서 이루어질 마음의 할례, 즉 거듭날 것을 요구하시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 두번째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는 것이다.
교회 생활도 교회에 대한 외적인 충성 봉사를 강조할 때, 같은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표면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려고했던 바리세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으며, 독사의 새끼들일 수 밖에 없었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외적인 화려함과 선함을 추구하는 신앙 양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왜곡은, 외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회자들도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편승하여 자신의 성공의 수단으로 예배당 건축에 몰입하였다.
수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미화시키는 왜곡된 거짓말을 하고있다.
그리스도만이 성전되시기에,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을 속이는 계략일 뿐이다.
화려한 예배당은, 강단에 조형물을 없애려는 노력을 비웃듯이, 하나님 앞에서 외모를 꾸미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행위였다.
화려한 예배당에서 가난한 자들은 소외될 수 밖에 없었고, 능력없는 자는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다.
하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 외모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일 수 밖에 없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아담은 후손은 누구나 다 고아이며, 과부이며, 나그네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 버렸으며,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하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고아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되시며, 잠시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의 구원자되신다.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과 같이,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노릇하는 나그네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나그네는 나그네 삶의 청산을 위해 출애굽의 과정이 필요했듯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구원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힘든 광야 생활로 인하여 애굽을 그리워하던 것이 하나님에 대한 죄악이었듯이,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직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한 광야와 같은 여정의 삶을 살아가야한다.
표면적인 나그네를 사랑함으로서 실질적인 나그네였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표상적 삶의 형태들은 성도의 실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표상들이기에, 표면적으로 만나게되는 이 땅에서의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존중하여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성도는 사는 날동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며, 의지하여야 하기에, 인생의 기쁨을 오직 말씀 가운데서만 찾아야할 것이다.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출애굽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할 인생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시진 않으신다.
구원받을 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증거를 경험한 성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아담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가인과 같은 육적인 자손을 나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하는데 실패하였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손을 증대시키는 일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화 변혁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영적인 자손을 확장시켜 하늘의 별과 같이 가득하게 하는 일이 참다운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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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악인이라는 사실과 악행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최선을 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지 불과 사십일이 되지도 않고, 시내산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있는 상황이었다.
불의를 아시는 것과 보시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지를 아셨지만, 이를 직접 목도하심으로서 진노를 그치지 못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정하셨다고하더라도,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도하며,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선행에 대하여 기뻐하시기도 하고, 신자의 악행에 대하여 분노하시기도 하신다.
심지어 악한 왕 아합이 돌이킬 때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도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정죄를 피하였을 뿐, 목이 곧은 것은 매 한 가지이다.
거듭남과 성화의 과정에 참여된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자신 안에서 의를 찾아볼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지, 악을 행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방종과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삶 가운데서의 행함이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행할 필요가 있다.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역사는 외적인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수 많은 인류를 만드셨고, 노아 홍수를 통하여 노아 가족만으로도 새 인류를 만드셨다.
애굽에 내려가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신 것도 소수인 야곱의 가족을 택하신 결과이다.
모세만을 택하셔서 충분히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외적인 규모를 키운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S교회의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O목사는 중국선교를 위해서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선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들의 교만이 보편회되었다면, 한국의 수많은 거대한 교회들이 초토화되는 것도 순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규모를 보지 않으신다.
아무리 많은 수의 무리가 모였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는 이들은 순종하는 한 사람보다도 못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큰 교회라고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쉽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큰 규모의 교회는 어김없이 장사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명예와 성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교만한 이들이 넘쳐나게마련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추구할 교회는, 모세와 같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겸손히 엎드릴 수 있는 소수가 모인 소규모의 교회를 지향해야한다.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두 돌판은 받은 모세의 마음은 감격 자체였을 것이다.
사십일의 금식을 통하여 얻어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모세가 직면한 상황은 정반대의 절망의 상황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행위 언약이 며칠만에 저주로 결정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두 돌판을 주신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해서 불 가운데 뜨거운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이끄시고자 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을 비웃기라도하듯, 백성들은 사단의 좀비가 되어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신이거든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열심과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인간의 본능은 마치 당긴 고무줄을 놓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교훈이나 명령이나 강요에 의한 윤리 도덕은 다 순간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에,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겨진 고무줄이 오무라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산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도,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할지를 예측하게해준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속도는 하나님께서 쫓아오시는 속도보다도 빠르다.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다.
기독교가 윤리로 제대로 세워질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 윤리를 다루는 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고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그들의 신학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 출발되었으며, 인간의 의지를 자율성이 상실된 노예 의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죄성이나,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인간의 노예의지라는 주제를 애써서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카이퍼나 바르트, 톰 라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윤리적인 기독교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신칼빈주의의 문화명령을 근거로한 문화변혁운동이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이나,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같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모세가 두 돌판을 던진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로 인한 언약의 파기를 뜻하였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모세의 진노나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세가 중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으신 언약, 즉 행위 언약의 깨어짐을 경험하셔야했고, 두 번째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도 깨어짐을 경험하실 수 밖에 없으셨지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심으로, 택한 이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모세가 깨뜨린 두 돌판은 인간 모두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신 분이시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이 멸절을 면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19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사십 일을 금식과 달리, 모세가 사십 주야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지낸 두 번째의 금식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한 시간이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공생애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앞서서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굶주리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구속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금식은 모세의 두 번째 금식과 마찬가지로 중보를 위한 금식이었다.
중보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이 속하여야할 공동체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 안에 담겨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에 왜곡을 초래했고, 이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의 공동체의 표현이기에, 모세의 사랑에 기초한 중보의 모습과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현재의 교회가 비난받는 것에 대하여 항변하기 전에, 교회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고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세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론은 소극적 범죄를 하였던 것이다.
아론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상황이나 현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끊임없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구미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시도들을 한다.
강단에서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대하여 선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다.
바르트는 실존주의라는 인간 중심의 철학 위에 신학을 정립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판넨베르크의 경우는, 신학교가 대학의 학부와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자연과학과 철학과 소통이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형태의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시켰다.
스탠리 그렌츠는 펜넨베르크의 신학을 이어받아, 이머징처치의 대표적 리더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영향을 줌으로서, 이머징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스캇 맥나이트는 새관점주의자인 제임스 던의 신학을 이어받아, 신칼빈주의와 새관점과 신정통주의를 혼합시킨, 이머징미셔널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발전시켰다.
현대신학자들의 금송아지 만들기 작업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왜곡을 통해서 빚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신학의 산물 앞에서 환호하는 이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진노하셨듯이,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노하실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중보를 배운 성도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할 것이다.
21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죄를 짓게 하는 우상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렸다.
아마 어느 정도 형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을 가져다가 또 다시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작업은 욕심을 위한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형태들
을 조심해야한다.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는 금송아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성도가 주식 투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주식은 속히 부하고자하는 마음을 활성화시키는 속성이 있기에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잠언 28장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있다.
일단 성도가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시간과 마음이 주식에 빠져들어가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가 없다.
주식을 한다는 것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투기나 도박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을 했다고 모두 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가속시키는 외형을 가능한 버릴 수 있어야한다.
2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은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격노시킬 것을 아셨으면서도 이일을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교훈과 훈계, 명령등으로 고쳐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를 잉태시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단 번에 주신 선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고통을 수반한 기나긴 과정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한 것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격노케할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러한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보고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로마라는 세상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이스라엘을 확장시키신 분이시고, 그에게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사단의 궤계일 뿐이다.
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이 어떠한 이들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본질적이고 체질적으로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품으신 것이다.
이러한 목이 곧은 백성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담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에게서는 구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기에,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아무런 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2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모세의 중보 사역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있는 것이다.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사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성의 숫자이다.
죄와 관련되어서는 죽음밖에 없기에, 사십 주야의 금식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세의 사십 주야의 금식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임하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십 주야를 죽음을 담보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동일하게 죽음을 담보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중보 사역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립에는 모세의 중보가 있었듯이, 현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중보자가 없었더라면, 멸절될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어디있겠는가?
부정적 상황을 대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기에 바쁘다.
금식하면서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이기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면서, 결코 정죄하기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과정이다.
구속사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있다.
언약 신학은 성경 전체를 보는 틀을 제공해준다.
언약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시작으로, 아담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 그리고 새언약으로 결론이 난다.
이러한 언약들을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달리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여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며, 나머지는 부차적인 주제일 뿐이다.
개혁주의에서의 중심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모든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며, 행위 언약의 개념을 배제한다.
존 머레이도 이에 동참하면서, 개혁주의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단성을 가진 페더럴 비전이 탄생하기도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아담 언약이 재연되었다는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를 심각하게 반대한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새언약을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논리는 합당하다.
인간적인 논리이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리이다.
인간에게는 쉽게 저주하는 속성이 있는데, 중보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온유함을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의 생각과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먹히는 신자들의 행태를 깊이 생각해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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