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20. 7. 19. 22:21

로마서 1장 3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상실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였어야했는데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지상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실 둘째 아담을 예비하였다.



다윗,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다윗을 거쳐서 아담으로, 그리고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의 의미는 다윗의 왕권이 이 땅에 표현된 하나님의 왕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예비하신 모형과 그림자다.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왕은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과 왕이신 그리스도로 구현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온전하게 실현되었다는데 의미가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왕이었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왕권을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한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왕이신 그리스도는 참이스라엘 백성인 모든 신자들의 왕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분이시다.


다윗의 왕권은 하늘과 땅의 연합을 궁극적인 목적으로한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육신으로 구현하였다.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왕권에는 항상 하나님의 왕권이 함께하였다.



아담으로 인하여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


아담에서 다윗 이전까지의 계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권이 표현되지 않았던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담에 의하여 상실되었던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이다.


다윗의 왕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이 땅에서의 왕권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다윗의 왕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로 표현되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왕이 되신 것의 모형이었다.


다윗은 성전을 짓기 이전에 시온에 왕궁을 지었다.


시온에 세워진 다윗성은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이었다.


다윗이 도성으로 정한 시온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시온에서의 통치를 이 땅에 모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시온성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던 하나님의 산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땅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다윗의 시온성에서의 통치는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가운데 좌정하시어 시내산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예비적으로 준비되었다.


처음 창조시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산에서 실행되었다.


다윗의 시온에서의 통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재현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신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육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의 모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은 원래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었던 관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통로였다.


육신과 영이 대립적 관계가 된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모습으로서, 이 땅에서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왕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된다.


왕국의 3가지 구성 요소는 왕과 백성과 영토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다윗 왕과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땅이라는 3가지 요소로 왕국이 이루어졌다.


육신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에서 자유할 수 없었기에 죄로 인하여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모형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체로서의 하나님나라가 임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심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극복되고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왕으로서의 다윗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형적으로 이 땅에 표현된 것으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톰 라이트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확장이라고 말하지만 유대 이스라엘과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지않다.


이는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이 연속선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육적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육적인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오면 없어질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땅에서의 이스라엘과 가나안은 아담과 에덴, 그리고 신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지만 아담의 범죄가 해결되지 않는 연속은 있을 수가 없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범죄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육적인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의 범주에 넣으려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은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인류 가운데 자리잡은 아담의 죄성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 왕은 아담의 죄 안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였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다윗의 철저한 회개 위에 오신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다윗과 왕으로서의 다윗


다윗은 처음 아담의 후손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하는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다윗에게 범죄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였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윤리적인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고통이었다.


다윗의 간절한 간구는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을 넘어서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한 근원적인 구원을 위한 간구였다.


다윗은 자신 가운데 드러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악된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면서 끊임없이 구원자를 간절히 구하였다.


다윗의 간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것이었으며, 다윗에게 있어서 이는 행위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였다.


다윗의 간구는 더 이상 행위에 대한 요구보다는, 행위를 넘어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은혜를 위한 간구였다.


간구는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지만 자신들 가운데 있었던 근원적인 죄를 직면하지는 않았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존재의 문제 이전에 행위의 문제와 씨름하였고 존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서 멸망이 이를 수밖에 없었다.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톰 라이트의 근원적인 문제도 그의 주장이 행위론적 구원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합당한 행동의 요구를 감당할 능력이 없음이 증명되었으며,  다윗은 이를 깨닫고 좀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구원을 위해 간구하였던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의 죄악된 본질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리스도는 행위론적으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기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죄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바울이 전하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는 표면적인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에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접근방식은 절제되어야한다.


다윗 왕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반만 인간이며, 반만 신이라면, 온전하게 인간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할 수 없다.


혹은 그리스도가 가현적인 존재라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도 없으시며, 그리스도의 속죄는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설 수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 즉 비가시적 천상의 세계와 가시적인 이 땅을 창조하셨다.


에덴은 하늘과 땅,즉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이 땅이 하늘과 단절되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재하는 하늘을 경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함에도 참여할 수도 없게된  것이다.


구원의 최종적 종착지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실현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이 땅을 귀속시키신 것이다.


가나안을 다스렸던 다윗의 왕권은 이 땅을 다스릴 그리스도의 왕권은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셔서 아담이 실패하였던 순종을 완성하시고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의 토대를 마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의 문화변혁보다는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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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7. 17. 22:41

로마서 1장 2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의 5가지 구성 요소


하나님


복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인간 세계에 종교가 없는 종족이 없으며 또한 모든 종족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하나님과 구원은 삶의 주제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어떠한 종교와 철학도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수많은 인간들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많은 고민과 생각을 통해서 구원의 문제와 씨름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비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린 모든 결론은 빛이 없는 흑암으로 결론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복음은 흑암에 비추이는 빛과 같이 또 하나의 창조의 과정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물질적인 세계만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있던 생명체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스스로 숨을 쉬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새생명을 불어넣으심으로서 택하신 자로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하는 복을 주신다.


복음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듯이 복음에는 구원의 근거에 인간의  공로가 가미될 수 없다.


인간의 공로가 요구되는 어떠한 이론도 더 이상 참된 복음일 수가 없으며, 더군다나 하나님의 복음일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전적인 인간의 부패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 참된 복음이 될 수 있다.



선지자


최초의 선지자는 아담이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는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비가시적인 하늘과 가시적인 땅의 연합에 있었다.


모세는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기록한다.


태초에 비가시적 하늘과 가시적 땅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에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는 곳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이 순종에 성공하였다면, 아담은 이 땅에서 에덴을 확장시키고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함으로서, 이 땅이 하늘과 연합되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아담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직책에 실패함으로서, 이 땅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게 종속되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대한 왕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아들을 준비시키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들에 관하여 예언을 하였으며 아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최종적 선지자가 되셨다.


선지자의 최종적 역할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완성되는 마지막 날에는 하늘과 땅이 연합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다.



그의 아들


그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의 중심에 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복음을 훼손하려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중심에서 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톰 라이트의 경우는 성경의 몸통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이전과 신약은 머리와 꼬리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주의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현대신학은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복음을 주장함으로서 보편구원론을 추구한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대표한다.


둘째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신자를 대표한다.


구원을 위한 복음은 아들에 관한 복음이어야한다.


아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다.


불순종으로는 아들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성경 해석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의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으로 묘사되어야만한다.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는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이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었다는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자들은 아담의 행위 언약을 부정하기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순종의 의미, 즉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기에 능동적 순종이 배제된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 인정한다.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배제된 전가 교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속죄 개념으로 확장되며 결과적으로 만인 구원론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원시복음(창 3:15)으로부터 시작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이어야한다.


톰 라이트는 처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적에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처음 아담과의 관계성을 배제하고서 해석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신 분이 아니며 단지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죽음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 필요도 없기에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신격을 손상시키며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개념마저도 훼손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복음의 중심에 있으신 분이시다.



성경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이다.


성경을 통하여 미리 약속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 말씀을 기록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성경을 기록한 주체가 아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되었을 뿐이다.




성경의 저자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한 약속을 성경에 기록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의 책에 자신의 약속을 기록 하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하신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라면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버전으로 수정 보완 되어야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일점 일획도 수정 보완 될 수가 없다.


성경은 복음을 위해 기록된 책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한 부분이지만 그 중심은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기록이다.



미리 약속하신 복음


하나님의 복음은 아담의 범죄 직후에 바로 약속되어졌다.(창 3:15)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은 창조 세계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할 자격을 상실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손상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 직후에 둘째 아담에 대한 약속을 하심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온전하게 선포되도록 계획하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아들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된다.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되었다고 이 땅이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 땅은 최후의 심판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세상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이 땅은 죄 가운데 놓여질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의미하는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지만, 아직 최후의 심판이 남아있기에,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과 구속은 구분되어야한다.


아담의 타락 직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수도 있으셨지만 왜 구약이라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야만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창세 전에 미리 택하신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지만, 그보다도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게하는 역사였다.


톰 라이트는 미리 약속하신 복음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 두고있지만, 육적인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의 모형으로서 인간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둘째 아담에 의한 구속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미리 약속하신 복음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다.


구원의 역사의 시간들에는 인간의 죄가 항상 고발되어야한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와 전쟁의 역사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와 더불어 살면서 동시에 구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사는 동안에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서 오직 믿음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될 수 있음을 고백하여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행위를 더해야지만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복음이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복음은 신약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음의 성취였다고 보고 복음의 몸통을 육적인 이스라엘로 보는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좀 더 잘하였더라면 신약으로 연결되지 않는 구약 성경만으로도 복음이 완성될 수 있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유대주의적 신율법주의의 완성을 위한 부차적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새관점은 행위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출애굽한 가나안의 육적인  이스라엘을 자리잡게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소외시킨다.


새관점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한 미리 약속하신 복음이 이스라엘의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적용


바울이 전하는 아들에 관한 복음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증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역사적 증거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실체로서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을 통한 성경의 약속은, 구약이 신약을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신약은 아들을 증거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이 실체인 몸통이며, 창세기와 신약은 머리와 꼬리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유대주의의 완성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로 해석하며,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는 유대주의적 사고를 하고있다.


하지만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들의 결론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있다.


복음이 복음되기 위해서는 죄가 드러나야한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의 범죄를 증거하고있다.


구약은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말해주고았다.


선지자는 죄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아들에 관한 약속을 전하고있다.


신약의 당위성은 구약을 근거로한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을 통하여 미리 증거되었다.


현재의 당위성은 역사와 전통을 근거로해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전통을 해체시키고, 그 빈자리를 자아 중심적인 새것으로 대체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을 표현하는 현대신학들은 모두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역사와 전통의 고리를 끊어 버리려한다.


톰 라이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종교 개혁의 역사와 전통을 거부한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주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슈바이처에 이르러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제2성전 유대교를 근거로한 “언약적 신율주의”와 조합을 시켜서 만들어낸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으며, 현재의 모든 것은 역사와 전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신학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 뿌리를 둔 아래로부터의 신학과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에 뿌리를 둔 위로부터의 신학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전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로부터 약속된 아들에 관한 위로부터의 신학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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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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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7. 15. 22:18

로마서 1장 1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신의 신분과 직책, 그리고 소임에 대하여 설명한다.

종이라는 의미는 일꾼이라는 역할의 의미 이전에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신분을 나타낸다.

종이라고 반드시 일꾼인 것은 아니다.

종은 주인이 일을 하지 말라고하면 일꾼이 될 수 없기도한다

또한 종은 신앙인 가운데 특정 부류만 가리키는 신분도 아니다.

흔히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신자는 주의 종이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소유물로서의 주의 종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다.

마치 요셉이 가뭄으로 굶주린 애굽인들에게 곡식을 팔아 애굽인들을 바로의 종으로 드렸듯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의 값을 치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택한 자들만을 위해서 속죄 사역을 하셨기에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오직 신자들만이 주의 종이다.

오직 창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자들만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오직 이들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자의 신분으로서의 표현이다.

 

종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사회적 비하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른 것은 사회적인 비하를 내포하고있는 것이라고 말한다.(톰 라이트, 로마서, 38)

이러한 해석은 복음을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의 해석이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겸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종이라는 표현에는 자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하는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 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을 사셨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종이라는 표현이 겸손에 대한 표현이었다면 로마서 전체가 자신과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한 서신이 될 것이다.

실제로 톰 라이트는 로마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진정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대한 것이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종은 수직적 관계에서 나온 표현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수평적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수직적 관계를 위한 것이며 수평적 관계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앞으로 방문하게될 로마 사람들에게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서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는 바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목회자는 주의 종인가?

종종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주의 종이라는 말은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이들을 피값으로 사셨기에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은 신자의 신분이며 직책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책을 사도라고 표현한다.

목회자를 직책의 관점에서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칭하는 것은 역으로 일반 성도는 주의 종이 아니라는 말을 내포한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없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4).

서기관과 바리세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죄의 종이다.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신자는 진리 안에서 자유케된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도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말씀 안에 거할 때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않는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자신에게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것임을 말하고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의 생각에서 출발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4복음서와 바울 서신서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다고 해석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4복음서에서 전하고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킨다고 말하기도한다.

하지만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이다.

사도와 신학자는 구분되어야한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노골적으로 사도를 목사라고 칭하면서 자신을 자칭 사도라고 부르는 거짓을 말하기도한다.

복음 전파는 자신의 인간적인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을 같이하였지만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세는 40세에 사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없이 자신의 인간적인 방식으로 먼저 나섰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80세가 되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장 혈기 왕성하던 상황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왕성한 의욕을 가졌던 40세의 모세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은 분명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시작한 목회 사역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여서는 안된다.

불행하게도 수 많은 교회의 현장에서는 목회자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하면서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는 목회를 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의 잘못된 행위는 세상 끝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복된 성도일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따로 부르셔서 전하고자하는 복음은 창조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근원적인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인간 세상의 어느 족속이나 예외없이 어두움 가운데 묶여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이 잘못된 불행에 묶여있는 것에서 자유케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기에 현세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인을 사심으로 죄인을 악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만 그리스도의 백성이기에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나라이지만 구속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값을 치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만의 죄값을 치르셨고 오직 택함받은 자들만이 믿음을 고백하게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값을 치르셨다면 바울의 복음 전파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음을 요구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으로 바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신정통주의자, 새관점주의자, 선교적 교회 운동가 등등….)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모든 이들이 인식하도록하는 것을 복음 전파의 내용으로 말하고있다.

이는 마치 1945년에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과 같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해방이 적용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사실을 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톰 라이트와 같이,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한다.

이들은 보편구원을 추구하며 개인의 회개나 신앙고백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에 동참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택한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복음이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로서의 사역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분리시켜서 거룩하게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결정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이 앞선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지음을 받기 이전에 정하신 것이다.

인간의 결정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인간의 모든 행함의 동기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기에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앞세울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셔서 따로 세우신 바울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따로 세우신 자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세상과의 분리라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신자로서의 삶의 근거로 삼아야한다.

신자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는 처음 아담에 속하여있지 않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거듭난 이들이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은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이 수반되어야한다.

신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택정함을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육신의 소욕과 싸워나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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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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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26. 21:43

신명기 32장 34-47절 말씀 묵상



34  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마치 댐에 물이 고이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가득 채워지고있지만, 댐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환란 날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사단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36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히 무력해진 때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오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신앙이다.

어떤 선교회 대표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걱정하면서, 불쌍하다고 고백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신앙을 무엇인가를 하여야하는 것과 연관시키며, 행함을 구원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중환자실에 있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가 없는 것인가?

혹은 열심히 신앙 활동을 하다가 치매가 들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되면 구원은 취소되는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자신감과 교만이 하나님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교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막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한 마음이 완전히 꺽이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무기력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오셨으며, 열혈당과 같이 살아서 혈기를 부렸던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완전히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과 더불어 두 손들고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맞이하는 것이다.



37  또한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이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실상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믿었던 신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허상이며, 오직 창조자는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믿었던 것들은 때가되면 없어진다.

현대인들은 문명과 기술에 의지하여 자신을 믿는다.

신칼빈주의는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원시적 에덴에서 종말론적 천국에  다가가게하는, 인간이 감당해야할 창조적 사명이라고 말하지만, 문명과 기술은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현대 문명의 기술과 힘은 더 이상 믿고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인간을 위한 문명 기술이 인간을 삼켜버릴 것이다.



38  그들의 제물의 기름을 먹고 그들의 전제의 제물인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하고 너희를 위해 피난처가 되게 하라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40  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


아무리 패역한 민족이라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구원의 길이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교회에서 많은 문제가 드러나는 것도, 교회는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고, 드러난 문제를 해결받는 곳이다.

교회는 아무리 문제가 많이 드러나도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곳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사회의 욕을 먹어도, 교회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곳이다.



41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42  내 화살이 피에 취하게 하고 내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은 대적을 멸함에서 성취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타락시킨 것도 대적들이다.

대적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유혹하였으며, 이는 아담을 유혹한 사단의 무리였다.

아담이 사단에 미혹되어 그와 한 부류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적들과 한 부류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대적들을 물리치심으로서 성취된다.


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노래의 말씀은 대적자들인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시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성취하신다.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대적하고 대적하였던 이들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무리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간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신 것은 자신의 유업을 이을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격이 갖추어진다.

유업을 이을 백성이 유대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신약의 신자들이냐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으로 말미암아 논쟁이 되기 시작한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국가적 저주를 받음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서 얻으신 적극적 순종의 의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죄값을 담당하신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의를 이루시고서, 이 두 가지 의를 자신을 믿는 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신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죄에 대한 것이며, 단순히 이스라엘의 행위적 죄를 위한 것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서, 사역의 대상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제한 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개념을 제거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독수리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실 것이며, 만국을 벌하시면서,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속이 원수에 대한 보응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사단에 대한 징계와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대적하였던 이방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방해하였던 사단의 세력과 한 무리였다.

원수에 대한 보복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심으로서 이루셨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방해하기 위해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과 연계시키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이스라엘의 국가로 제한 시키며, 죄의 본질을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적 죄로 제한 시킴으로서,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 본질을 바꿈으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고 있다.


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야할 이 노래는 원수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참 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을 대적하는 자였다.

대적자 원수는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처음 아담을 실족시켜 자신의 수중에 넣었지만, 둘재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의 패배를 승리로 이끄셨다.



45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생명은 삶과 동의어로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가나안에서의 삶의 조건이다.

성도에게 주어질 영원한 가나안에서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여야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말씀이 존재 자체에 새겨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5. 21:58

신명기 32장 15-33절 말씀 묵상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하나님의 최선의 노력하심과 최상의 환경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외면한다.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것이 부족한 때문은 아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빵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이, 이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으셨듯이, 이스라엘은 풍족한 공급이 있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일단 필요가 충족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필요를 위해서 따르는 이들은 배부르면, 혹은 필요가 충족되면 떠나게 마련이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하나님의 마음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 상태인지를 볼 수 있다.

인간은 부모의 심정과 자식의 심정의 차이를 통해서 어렴푸시 이를 알 수 있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필요에 의한 만남은 진실된 만남이 아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공급 뿐만이 아니라, 속이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에 대한 소원을 이루고자 거짓된 것을 만들어 섬길 수 밖에 없다.

거짓된 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거짓된 신에 대한 소원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밖에 없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자신들의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같은 속성은 모든 인간의 속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정체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진리는 자기 자신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게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이로 인하여 절대자의 존재도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


현대는 단적으로 상실의 시대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셨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주셨고,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주셨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을 정도의 완전한 안식의 땅을 제공해 주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떠나게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와같은 모습은 모든 아담의 자손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서의 삶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오늘의 안식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외면하는 이들의 진정한 모습은 사탄의 자녀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탄하심은 아버지로서 자녀에 대한 낙심이었다.


하나님의 낙심은 단순히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불순종의 문제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아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으며, 장자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실된 자녀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전에 이미 종말이 어떠한지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나안에서의 부패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는 자신들이 부패한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를 증명해주시고자 가나안에서의 과정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가나안 생활에서 증명된 인간의 부패성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이방인인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질투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동기가 질투에 의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을 찾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찾아 구원을 베푸시는 것과는 다르다.

이방인인 우리는 접붙여진 가지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새이스라엘은 육적인 실패에 대한 대안이면서 실체가 되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열심 가운데 하나님께 향한 것은 좀처럼 찾아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애써서 상황을 외면하려한다.


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인간은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일반 은혜 가운데 일반 재앙이 나타난다.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자손 못지않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생활을 한다.

모든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이는 인간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춤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감정도 없으시며, 진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판기처럼  신은 인간이 원하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분노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분노로 인한 재앙은 인간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해주는 유익이 있다,

만약에 재앙이 없다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문제가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거나 느끼지 못한다면, 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가오는 문명의 후유증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이에게 임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은 개인적 잘못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개인은 공동체적 책임이 있으며, 개인은 공동체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안팎에서 남녀노소 할것 없이 모든 이들이 모든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은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국가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이유이기도하다.



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인간이 가지고있는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는 다른 이들의 낙담과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이나 중국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인간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면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영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은 거의 욕이 되었다.

이러한 욕은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는 데서 나왔으며, 이제는 일상 용어가 되었다.

인간은 최소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는 것을 즐거워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터넷 댓글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

성도는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이러한 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을 미워할 자격과 권리가 없다.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자신들의 종말이 어떠할 지를 알면 그렇게까지는 안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자신들을 합리화시키지만, 그들의 논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헛점투성이의 논리이다.

이들은 천국을 보여줘도 거부할 이들이다.

사실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도 천국을 거주하는 이들이나 마찬가지 였다.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의지하는 반석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하는 반석은 인간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가 보기에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논쟁할 필요는 없다.



32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세상이 의지하는 것들은 결국 독이 된다.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서 힘을 키웠지만, 그들의 대기는 항상 심각한 미세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들은 힘을 키우면서 독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는 보통 80이상 올라가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중국의 미세먼지는 80이면 좋은 상태이고 보통 200에서 1000이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는 한 가지 현상이지만, 휴대폰을 비롯하여, 가상 현실등 첨단 기술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키는 독성이 있다.

자연과 동떨어진 도시문명은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종종 숲속을 산책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들면서, 그때 그때 생각난 것들을 메모해서 옷에다가 꼽아놓고서 집에와서 정리하곤했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다.

지하철 안에서나 운전하면서 묵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도시에서의 노력은 파멸로 달려가는 기차안에서 거꾸로 뛰는 것과 같다.

모든 시스템이 경쟁과 힘을 향하여 달리는 도시구조에서 현대인은 독을 마실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4. 19:15

신명기 31장 30절- 32장 14절 말씀묵상



30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스라엘 총회는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산에서의 총회를 기억하게한다.


에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선포되는 곳이며, 이 땅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었다.


아담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의 모세의 선포는 에덴에서의 아담의 선포를 재연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덴의 하나님의 산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재연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으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에덴을 지켜야만 했었다.


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이 선포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원론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를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늘이 귀를 기울이고 땅이 말을 들을 것을 선포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는 하늘과 땅, 즉 창조주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가 되는 비가시적인 하늘과 하나님이 지으신 각종 피조물들의 거처가 되는 가시적 세계인 땅을 가리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가시적인 하늘과 가시적인 땅의 연합에 있다.


이러한 연합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해서 선포됨으로서 완성이 되었어야했는데, 아담의 불순종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에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을 통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가 요구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율법은 하늘과 땅을 연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 땅에 선포되는 것이었다.


모든 피조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이루면서 또한 심판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적을 내세우는 것은 초라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만큼이나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신들을 완성시켜나가려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를 이루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이 스스로가 왕이 되기 위한 발버둥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면서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느덧 하나님의 왕권을 마주하는 반대편에 서있다.


인간의 문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간다.


스스로 만든 거대한 도시 문명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지면서, 스스로가 만든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여 파멸의 길에 들어 설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고도화된 도시 문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발악처럼 점점 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만이 우뚝서려고한다.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진정한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의 연합을 위한 방향성을 가져야한하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이 가능하다.


성도는 하늘 나라에 속한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의 삶은 하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세는 창세기 2장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연대순과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2장에서의 기록은 연대 순이라기 보다는 창조의 중심에 사람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경작할 아담을 창조하심으로서 땅에 비를 내리시고 들에 초목이 나게하시며 밭에 채소가 나게하셨다.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교훈을 비같이 내리고, 모세의 말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슬을 맺히며, 연한 풀 위의 가는 비같이, 그리고 채소 위의 단비같이 내리게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며 내리셨던 단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의 단비를 내리신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단비로서 이스라엘을 흠뻑 적시는 것이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죄에 오염된 이들었기에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단비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으며, 불타는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 불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라를 외우면서, 격한 토론을 해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율법적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고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죄성을 인정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기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또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자연법은, 궁극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게 함으로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당위성을 말해주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은, 율법과 하나님의 자연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 이어져야한다.


율법과 자연법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특별법으로 이어질 때 하늘의 생명에 이를 수가 있다.


땅에서의 풀과 채소가 비로 인하여 소생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생명력들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생명을 향하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말씀을 근거로 사는 성도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 모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자연법의 원형이다.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모세 율법에 그대로 담겨있다.


모든 인간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연법을 근거로 살아가야한다.


자연법을 거스르고, 자연법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퀴어축제, 동성결혼, 가상증강현실, 로봇 섹스등등,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역행하는 인간의 행태는 비같이 내리고 이슬같이 맺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인간의 교만한 행태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처음 아담의 실패를 기억하고,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자연법으로서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백성은 선포되어지는 왕에게 모든 위대한 일들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광야에서 선포되어지는 모세의 말은, 흑암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진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이 손상을 입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에 손상을 입히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권은 포기되어질 수 없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나님의 왕권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어진다.


성도의 마땅한 도리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와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과 겸손이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위엄을 돌려드릴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하나님 여호와를 애써 외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도하지 않는다.


피조 세계의 완벽한 모습과 놀라운 운행 원리에는 감탄하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려고도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습은 아담의 타락 말고는 기원을 찾을 수가 없다.


모세의 말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모든 일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같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성도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매사에 자신을 자랑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조심해야한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모든 피조 세계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졌기에 견고하다.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진 피조세계는 물리적인 견고함 뿐만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과 참되심과 공의와 올바름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되어있다.


처음 창조 때와 달리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인간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터 위에 서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터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이스라엘이 입성하게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견고한 땅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며 정의와 진실과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어야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셔서 완전하게 세우셨던 곳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는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하게해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기억하게해줌으로서 둘째 아담을 소망하게해준다.


모세의 선포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을 기억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은혜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게해주는 반석의 터를 닦는 작업이었다.


교회는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을 추구해야하며, 정의와 진실과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지는 곳이 되어야한다.


외형적인 교회는 에덴과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경험하는 파멸의 장소가 되어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고있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정의롭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세워진 인간은 거짓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한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지으시지도 읺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에는 어떠한 악도 담겨있지 않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한다.


인간의 가장 큰 악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더라도 이를 악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이것이 죄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악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을 행하였음에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가인도 마찬가지였으며 라멕은 그 정도를 더하여 더욱더 악을 보편화시켰다.


노아 홍수 때 인간의 악이 관용한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에 취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을 못하였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의 악은 홍수로 쓸어버릴만큼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사람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자신의 아버지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일 자체가 가장 큰 죄악이다.


모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을 지적하고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의 반석되심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손수 반석이 되셔서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고 아들로서의 모든 신자의 맏형이 되신 것이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반석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로 모세의 눈 앞에 있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모세는 선포한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가장 절망적인 선포를 한다.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척박함이 가나안에서의 풍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지 않으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타락만 가속화시킬 뿐이다.


인간은 환경이 바뀐다고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의 아버지는 사탄이 되었으며 인간은 독사의 자식이 된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행함의 문제 이전에 신분의 문제에 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외우고 율법을 지키며 많은 학문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행함으로 자신을 완성하려하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는 현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 신학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론적 접근을 함으로서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외면은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이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육신의 속성에서부터 출발된 생각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는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인간의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인간을 개조하거나 고쳐서 쓰시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를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묘사함으로서 인간의 행동 방식을 고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고하더라도 가나안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절망에 대한 선포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희망의 선포인 것이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정보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판단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종착역은 아담에 이른다.


인간의 부정적 상황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접근을 하기를 원한다.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저주 밖에 적용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에 동참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이 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으며, 오직 둘째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할 수 있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하여서 자신의 존재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순복해야한다.


민족과 인종을 정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처하게될 환경은 태어날 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또한 노아의 예언 가운데 결정되었으며, 모든 민족은 그 근원이 셈과 함과 야벳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하여있다.


야곱과 에서도 태어나기 전에 그 기업과 백성들의 경계가 결정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자신의 위치에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인간은 그 근원이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또한 아담의 범죄의 영향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고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을 기업으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를 위한 것이었다.


처음 창조시의 아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업이었다.


아담이 순종하는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였더라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범죄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서 야곱을 택하셨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선택받은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되는 조건적 하나님 백성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요구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실상은 그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선포였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충족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성도들이 맺어야할 결실들이다.


성도는 모세의 말이 실천되어지는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지어지는 것이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의 새창조를 위해서 선택되어졌던 이스라엘에게는 처음 창조의 환경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환경은 처음 창조시의 혼돈의 땅과 같은 황무지였다.


생명력이 상실된 황무지는 처음 창조시의 생명의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땅을 기억하게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혼돈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황무지 한 가운데서 호렙산에 나타나시어 혼돈 가운데서의 창조 사역을 시작하신다.


시내산은 황무지 한 가운데 있는 황량한 산이라는 의미에서 호렙산으로도 불리운다.


비록 죄가 없었던 아담은 평안했던 에덴에서 짐승의 유혹으로 불순종하였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여 죄인이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의 환경과 달리 혼돈의 땅에서 짐승의 유혹과 싸워야만 했다.


광야에서의 짐승과의 싸움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는 처음 혼돈 뿐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짐승의 영향력에서 자유 할 수 없었던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처음 창조보다도 더욱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처음 아담에서 요구되었던 능동적 순종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순종이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는 처음 창조시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신 성령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을 서술하고있다.


비록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한 존재였지만 혼돈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추가적인 희생을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값으로 사신 존재이다.


성도는 처음 창조시의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처음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 찾아야한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보호하는 보금 자리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위협할 수 없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서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것과 같이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운행하시면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이들이 멸절된 상태에서 노아 가족을 보살피시고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고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다시 죽음으로 뒤덮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가운데 구원하신다.


독수리의 새끼들로 묘사되고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죽음이 뒤덮였던 애굽 땅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의 군대와 싸우시고, 바람을 일으켜 홍해를 가르시고, 짐승이 우는 황무지 광야에서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독수리와 같이 신발도 헤어지지 않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었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함으로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에초부터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하고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성령의 사역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예비하시는 새창조의 사역이었다.


성도에게는 처음 아담과 달리 순종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성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도에게 요구되었던 믿음은, 인간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고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어도 본능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신에게 좀 더 편한 신을 만들어 숭배하려고한다.


출애굽은 인간의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셔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않았다.


이적과 기사의 여러 증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시내산의 임재를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등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의 속성이 체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속성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만물의 질서와 창조 세계의 놀라운 조화는 창조가 오직 한 분 창조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주고있지만 인간은 체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사탄의 속성이 더 편한 체질로 바뀌어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일상에서 사탄의 속성들을 즐기고있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과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 게임을 즐기는 것과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과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것과 기타 등등… 인간의 삶의 많은 원동력들이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낙들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대부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 종속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나무들에 박혀있는 가시들이 처음 창조시에 없었던 것이 생겨났듯이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체질이 바뀐 것이다.


거듭난 체질이 아니고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인이시며 자신을 인도하신 분이라고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체질적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수가 없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땅의 높은 곳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산의 지상적 표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높은 곳에 왕으로 등극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에서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온에 참여케하신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높은 곳인 시온산에 임하신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며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온산은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던 산이 재현된 것이다.


모든 강의 근원이 되는 높은 산이 있었던 에덴은 하나님의 산, 즉 하르 마게돈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다.


하나님의 산은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며,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였던 곳으로서 하늘과 이 땅의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실 분은 이 땅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땅에 선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막힘으로서 더 이상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이 죄로 말미암아 홍수로 멸망 당했지만 노아는 땅위의 높은 곳인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아담의 범죄로 체질이 바뀐 인간은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자격과 능력이 없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선포는 땅의 높은 곳을 다닐 하나님의 백성, 즉 이 땅을 다스릴 왕으로 부름을 받을 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는 모세를 비롯하여 시내산에 초대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산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함으로서, 이 땅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았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청을 받은 거룩한 이들로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소산을 먹는 삶이며, 반석되신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가나안에서 경험하게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요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에덴의 상황을 표면적으로 재현하고있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었지만, 타락 이전에는 에덴에서의 풍요를 만끽하고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리게될 풍요의 상실은 에덴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를 기억하게하는 것이었다.


인생이 누리는 풍요와 상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해준다.


인생이 죄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영원한 축복의 한 부분이겠지만, 죄악된 인간에게 주어진 풍요는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은 풍요 가운데 에덴을 기억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풍요를 바라보아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3. 22:25


신명기 31장 14- 29절 말씀 묵상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성령은 창조의 주체자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타락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창조 사역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새롭게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표현되는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나타나신다.

성령은 모든 창조 사역의 주체가 되신다.

성령이 없이는 어떠한 창조 사역도 불가능하다.

장막 문 위에 머무른 구름과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우상을 섬길 것을 아시고 계셨으면서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의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우상을 섬길 것을 아시고 계셨으면서도,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어려운 여건에서도 힘쓰시고 애쓰시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에 입성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결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잘 아시고 계시면서도 감추어진 비밀을 나타내시고자 절망의 과정을 통과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 의해서 세워질 수가 없다.

가나안 땅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가를 고발하는 곳이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멸균처리한 음식이라도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있다.

멸균처리된 음식과 같이 깨끗하게 처리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결코 이 세상에서는 깨끗함이 유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무리 외적인 환경을 바꾼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근본적인 해결책이심을 보여주시고자하신 것이다.



17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주시고자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현상적이다.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생각은 일차적 원인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이차적 원인을 알 수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문제를 자신들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 책임을 돌리려고한다.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일차적으로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는, 모든 일차적인 문제가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해결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삶의 과정 가운데 만나는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과정들임을 생각해본다.



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함께 하시지는 않으신다.

거룩하지 못한 곳은 하나님과 공유될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심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숨으신 곳에서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경험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귀하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불의한 이들에게 악행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불의한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현재 임하는 일반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는 제한적인 것이기에, 성도는 이를 확대해석하여서는 안되며,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노래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과 저주를 위한 증거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근거가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아쉬워서하는 선택은 필요가 충족되면 더 이상 선택을 지속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존재이다.

설령 자유롭게 선택을 하였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마음이 변할 것이다.

육적인 축복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타락을 수반하게되기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육적인 축복을 해 줄 수가 없으시다.

외적으로 확장된 교회치고 변질되지 않은 교회가 없다.

한국 교회는 외적으로 세계 제일의 교회가 많은 만큼이나 변질과 부패도 세계 제일에서 뒤지지 않는다.

한국 교회들은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는 성전 봉헌이라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교회 건물에 성전이라는 용어를 붙이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자기 열심에 사로잡혀있는 이들이 한국 교회 교인들의 현주소다.

그리스도가 참 성전이 되셨기에, 교회 건물에 성전이라는 이름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이스라엘이 어떠한지를 아시면서도 가나안에 들이는 것은 그들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자임을 증명하면서, 또한 구원자의 필요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톰 라이트의 주장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에써서 외면하면서 하는 주장이다.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부패를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마음의 찔림을 얻기 위한 노래이다.


23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


어차피 이스라엘 자손은 인도자가 없이는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타락 이전의 아담도 스스로의 힘으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여호수아의 손에 이끌려 안식의 땅에 들어와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도자 여호수아가 필요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성도는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

여호수아는 안식의 땅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주인이 되신다.



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기록에 남기는 것은 영원하며, 증거가 된다.

단순히 말만하고 사역을 마쳤을 때는 나중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있다.

기록된 율법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증거가 되었듯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은 구원과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5  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6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언약궤 곁에 둔 모세의 율법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보존되고 선포되어야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선포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선포하여야했는데, 하와는 뱀의 유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나안에서 성전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성경은, 레위 지파에 의하여 반포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요시아왕은 율법의 말씀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유월절을 지켰지만, 이미 너무나도 늦었던 것이다.

성도에게 성경은, 어두운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삶의 지침이다.



27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모세는 눈 앞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증거였다.

가시적인 존재는 지속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더불어 성령의 강림과 내주하심은 성도에게 비가시적인 영속적인 말씀이리다.

성도는 육신의 연약함을 입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에, 가시적인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내주 하심에 힘입어 살아가야한다.



28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관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으리라


장로와 관리는 일종의 책임자들이다.

책임자들이 부패할 때 사회는 희망이 사라진다.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권세자들의 책임있는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이다.



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이들이 하나님 앞의 자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간이 있어야할 자리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은,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증명해주는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스스로 부패한 자이기에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스스로의 부패함을 고백하여야만, 구원자에 의해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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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22. 22:44

신명기 31장 1- 13절 말씀 묵상



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가나안 입성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모세의 역할은 자연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다.

모세의 역할은 자연법과 하나님의 명령의 양쪽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자연법적 원리는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성도는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추가해야한다.

모세는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식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초월적인 존재로 만드시지는 않으신다.

모세의 역할이 자연법의 한계를 넘어서 좀 더 장수한다면, 모세에 대한 해석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신앙 생활은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그 가운데 자연법이 존중되어야할 것이다.


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의 전과정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가나안의 회복은 상실된 에덴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싸움이며, 아담이 상실한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 땅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직접 앞서서 이스라엘에게 회복된 통치권을 넘겨주시려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은 통치권의 회복에 실패하였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인자로 오셔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키셨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통치권을 가짐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왕으로서 살게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둘째 아담의 개념이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의 회복 개념도 없으며, 이를 에덴에서의 상실된 통치권과도 연계시키지 않는 결함 투성이의 왜곡된 관점이다.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지만 사람의 동참을 요구하신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으로서 가지고 있던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자율적으로 행사하였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에덴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최소한도라도 따라 올 것을 명령하신다.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가나안에 입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승리한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승리자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부응된 삶을 살지 못하였다.

다 가져다 주어도 이를 누리지 못하는 결함이 있는 자격 미달의 족속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과 왕권을 행사하여야하는데, 마치 왕자가 된 거지와 같이, 옛 습성에 젖어서 새로운 삶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실 수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과 능력이 없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참다운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영원한 가나안의 삶을 누릴 자격과 능력이 주어진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께서 결코 성도를 떠나시지는 않으시기에,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떨 필요가 없다.

이미 세상 방식에 익숙한 성도는 세상에 대한 담대함을 위해서 재활치료하는 것과같이,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직접 참여하여 실행하여야만 서서히 극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마치 재활치료와 같다.

넘어질 것이 염려되더라도, 걷는 연습을 해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 힘든 싸움을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이겨나갈때 많은 영적 진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여호수아에게 공식적으로 권한을 위임해준다.

공동체는 항상 지도자가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는 왕권과 통치권을 행사한다.

왕권과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위임된 권한은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표현이다.

가나안 땅에서는 인간의 부패함을 아셨기에, 하나님 스스로가 진정한 왕으로서 존재하시길 원하셨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눈에보이는 지도자의 타락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진정으로 눈에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며, 지도자이시다.

교회 조직이 커지고 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지도자에게 의존하게될 때, 신약의 외적인 교회도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바울의 표현과 같이, 사망의 몸에서 자유할 수 없기에, 성도라 할지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신약의 진정한 교회공동체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머리이시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길 때 생명력있는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행사하였다.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세상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타락 이후에 아담의 후손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이 세상을 다시 통치 하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수아가 세상에 대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될 통치권을 예표하는 것이다.



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아담이 에덴에서 상실한 것은 통치자로서의 왕권뿐만이 아니었다.

아담의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권한은 ,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된 것이다.

아담은 에덴에서의 왕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피조세계에 선포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였다.

모세가 제사장과 장로에게 주어 선포하게 하는 율법은, 에덴에서 아담이 마땅히 선포해야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복이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말씀이 근간이 되어야한다.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가나안은 안식의 땅으로서, 면제년의 의미가 성취되는 곳이다.

안식의 근거는 율법의 행함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선포된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

면제년의 초막절은 궁극적 안식, 즉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 성취되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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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21. 21:55

신명기 30장 1-20절 말씀 묵상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쫓겨간 나라에서는 고향이 그리울 수 밖에 없고, 모압 땅에서 선포되었던 모세 언약이 생각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주 조그마한 모습까지도 기뻐하신다.

인간에게 아주 조그마한 희망의 씨앗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놓치지 않으신다.

마치 엘리야가 사환을 보내, 일곱 번째만에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조그마한 기억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는 씨앗이 된다.

조그마한 기억을 만드는 씨앗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없다면, 만들수가 없을 것이다.

유배생활 가운데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듯, 인간이 원초적으로 기억해야할 것은 에덴과 에덴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에덴까지 올라간 기억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질 때 구속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유배된 존재이다.

좌절과 낙담 위에 돋아나는 기억의 씨앗은  구원의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미약한 시작을 사용하셔서 창대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큰 것을 기대하시지는 않으신다.

출애굽이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외침에서 시작되었듯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동기가 중요하다.

삶의 여정에서의 실패와 좌절과 낙망은 하나님을 기억하게하며, 구원의 씨앗이 뿌려질 토대가 된다.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청종하는 것은, 적극적인 순종보다는, 최소한도의 귀를 기울이는 관심 수준의 순종이다.

유배 이전의 자신만만했던 솔로몬 성전때와 비교해 볼 때, 겸손해진 상태에서, 초라하게 지어지는 스룹바벨 성전과 같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 받으시는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다.

포로 이전의 솔로몬 성전이 승리한 자들의 순종을 생각하게 한다면, 포로 이후의 스룹바벨 성전이 실패한 자들의 순종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성전과 더불어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꺽으시고, 스룹바벨 성전과 더불어 엎어진 이들을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로 인하여 유배되었던 이들이 돌아온 것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것만을 말씀하신다.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마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기꺼이 받아주신다.

모든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사랑과 간절함과 긍휼하심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알 수가 있다.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청종했다는 조그마한 행동의 모습에 크게 기뻐하시면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을 모아 그들을 이끄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변치않는 견인perseverance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빈의 5대 강령의 5번째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이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행하여졌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최소한도로 소극적이지만,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며, 기다리시고 적극적으로 힘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으로 인해서 조상들보다도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로 가나안의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케 하시리라는 말씀은 새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톰 라이트는 이를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교회라는 관점으로 보고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확장된 이스라엘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여호와께 감추어진 일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난 일을 구분하여 이중적인 구조를 제시한다.

여호와께 감추어진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나타난 일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고 교회를 부차적인 조직으로 보지만, 유대 이스라엘은 실체인 교회를 예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교회는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의 확장이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구별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신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행한다면, 이전의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겠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해석되지가 않는다.

진정한 이스라엘 자손이 되려면, 이전의 육체적 행함에서 마음의 행함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마음의 할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할례를 베푸심으로서, 새이스라엘인 교회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근거 위에 세워질 것을 보여주신다.

육적인 할례는 이미 실패한 외적인 행위의 반복인데 반하여, 마음에 베푸신 할례는 마음 중심의 변화를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된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마음 중심에서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중심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이 죄악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내면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노력하여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

마음의 할례는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출애굽 때와는 달리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본질적 죄악의 뿌리인 사단에 대한 저주를 행하시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다.

성도의 세상과의 싸움은 인간의 외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하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것에 대한 요구는 철회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다 이루셨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하여 다 이룬이들이다.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0  (윗절에 포함됨)


이스라엘이 받는 복은 행위 언약에 대한 순종을 근거로 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다 성취 하심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수행한 새이스라엘 자손이 된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현재의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실행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을 승용차로 들어갈 수 없으며, 만약에 들어간다면 돌에 맞게 된다.

유대인들은 제3성전을 지으려고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 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있다.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이제껏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어려웠고, 먼 것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이러한 명령을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안에 감취었던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감취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었으며, 성도는 드러난 비밀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쉽고 가까이서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감취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머나먼 중동 지역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의 영역인  이곳에서의 일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얘기도 아니다.

천상의 영역도 아니며 현재적 삶 가운데 일어나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셨듯이, 성도의 신앙 생활은 이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마음에 담겨있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보다는, 외식과 형식으로 행위 중심적이었다.


신앙고백은 입으로하는 믿음의 고백이 앞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다.


새관점에서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행위 위주의 유대주의적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이제 제시되는 축복과 저주는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로 바뀐다.

생명과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생명과 복을 취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에게는 사망과 화만 있을 뿐이다.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생명이 주어지는 땅은 영원한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경에 성전의 파괴와 함께 무너짐으로 종결되었다.

현재의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제3성전을 지으려고하면서, 이곳에서 생명을 취하려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공로로 생명을 취하려는 사단의 계략일 뿐이다.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저주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지는 저주는 유대 가나안에서의 현재적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미래적 삶의 이중적 예언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현재와 신약의 미래의 이중 구조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뿐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오늘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선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강령이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강령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고있다.


시편 2편 7절에서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기록하고있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강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기 위한 것이다.


모세가 오늘 선포하는 생명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오늘 이라는 시제로 이미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오늘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들로 창조하시고, 선악과 명령을 하실 때 이미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준비하셨듯이,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생명의 강령 안에는 하나님의 구속이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작정되었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언약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나 육신이 된 인간에게 실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죽은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자기 의를 실현하려는 인간에게는 수치만이 남을 것이다.


자기 의를 실현하려던 가나안에서의 유대인들은, 완전한 무균 상태의 가나안을 스스로 균이 되어 오염시켰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작정된 생명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수치만이 남겨질 뿐이다.


수치를 당할 이들은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세의 강령을 윤리 도덕으로 받아들이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를 도덕적 영감을 주는 이로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는 이미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으며, 성육신하심으로서 오늘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다.


모세의 강령은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인간이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이 택하여짐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모세 언약은 다윗에게 죄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듯이,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로 육신의 죄악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담겨진 생명을 선포하고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신의 육신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아들로 지명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저주와 축복이 반복되어 제시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것과 행하여야 할 것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달려있으며,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은 이전과 마찬가지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에덴에서와 달리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기에, 그리스도께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에덴과 가나안의 차이는, 에덴에서는 전적인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가나안에서는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노예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결론이 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통한 인간의 부패에 대한 확증이 없었다면,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표하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여정이 이스라엘과 같이 실패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 가운데 주어진 부정적 상황과 실패의 과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육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수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죽음에 직면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육적인 죽음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0. 22:21

신명기 29장 14-29절 말씀 묵상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이스라엘의 대표성은 시간적인 수직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간적인 수평적 관계까지 대표한다.

수직적 대표성으로는, 후대에 가나안에서 태어난 이들도, 비록 자신들이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어도, 선조들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한 자로 여겨짐으로 인해서 시간적 수직성의 영향하에 있다.

수평적 대표성으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간다.

마치 상품을 출하할 때 모든 상품을 검사하기보다는 대표되는 몇가지 상품을 검사함으로서 전체의 상태를 파악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모세 언약이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과만의 언약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도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 될 수 있다.

새 언약이 모든 인류를 향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 언약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은 선택적으로 모세 앞에 세워진 것이다.

모세 언약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직적인 관계성으로만 대표성을 가진다면, 성경은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새관점의 경우가 그러하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대표성을 갖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동체적 대표성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공동체적 인식 아래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16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구원은 거룩하지 못한 땅에서, 거룩한 땅으로의 이동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지 못한 이들을 경험한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지 못한 자들 가운데서 구별되어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이다.

이들은 여러 나라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의 가증한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자신들의 종말이 그들과 한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실패하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내면의 한계는 하나님의 감추어졌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사건을 통해 극복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관점에서 부장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삶의 본을 보여주여주신 분이 아니시다.

인간에게 기대할수 있는 변화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변화로만 가능하다.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깨닫지를 못한다.

가나안 입성은 앞둔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았을 때 기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자신들이 얼마나 오만한 자였는지 경험함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었다.

인생의 하프타임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것이 무너지면서 오게된다.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지만, 어느 시기엔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후에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듯이, 인생의 목표가 무너지고, 자신의 뜻대로 안되고, 극단적인 우울증과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모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였던 이들도 무너짐이 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셔야지만,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다.

모태신앙을 가졌던 이들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다시만나는 기회를 가져야만 참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하나님의 분노는 질투의 불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하고 싶어하시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억지로 생명책에 기록하시지는 않으신다.

잔치를 베푸느라 많은 수고를 하셨지만,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마음에 없는 이를 강제로 앉히시지는 않으신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저주받을 이를 구별하시는 것은, 조밀한 헤파필터와 같다.

율법은 청소기 필터와 같이 악한 이들을 구별해 낸다.

흡입한 공기중에 깨끗한 부분은 통과시키고, 더러운 이물질은 걸러내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과 같다.

오염으로 더러워질수록 세밀한 청소가 필요하다.

예전의 청소는 빗자루로 충분하였다.

요즘은 먼지가 작아져서 빗자루로는 청소가 되지 않는다.

진공청소기도 이전과 달리 좀더 촘촘한 필터가 있어야만 한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결코 필터를 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일으키는 먼지만큼이나 인간의 죄악은 점점더 조밀해지고, 율법의 필터를 통과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악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지파중에서 철저하게 구분되어제거되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신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조밀한 필터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의 필터를 통과하여 오염되지 않은 거룩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22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재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며, 이스라엘의 희망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흥했더라면,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교훈은 모든 이들에게 경고가 되면서도, 이스라엘에게는 수치가 된다.

언약을 파기한 자는 수치를 감당하여야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 뿐만이 아니라, 모든 모욕적인 수치를 감당하셔야만 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당한 수치와 모욕은, 이스라엘이 박아야했던 수치와 모욕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류가 받아야만 하는 수치와 모욕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받을 국가적 저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없애주면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종결을 선언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저주를 직접 받음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한편으로 유대 이스라엘의 정당성과 확장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의 교회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규정하고서, 신약의 교회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는 시도를한다.

모세를 통해서 선포되는 이스라엘의 수치와 저주는 국가적인 수치와 저주를 넘어서 인간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는 신약의 교회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참 이스라엘로서의 실체이고, 구약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일뿐이다.

톰 라이트는 이와 반대로,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고서, 신약의 교회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철저하게 왜곡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언약은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기에, 언약은 인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언약을 어긴 자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서 이미 죽음이 선포된 자들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의 생명은 덧없는 것이며, 아무리 외적인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심지어 재벌이나 왕,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그늘에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구속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불리워 나간 이들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인간의 타락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된 울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는 율법을 근거로 한 언약이 근거 기준이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의 요구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재앙의 기준이다.

언약은 버린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현대인은 스스로의 기술과 경제를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도시 분명은, 모든 삶의 형태가 도시를 중심으로한 기술의 보편화와 인간 중심의 경제 구조 가운데 하나님을 필요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한다.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심은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심이었지만, 은혜 안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거부함은 영원한 진노의 자리로 인도되는 것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평안은 마치 폭풍 전야와 같이 결코 평안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그때 그때 감정에 따라서 달라지시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일관성이 있으시며,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에 격노하심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 가운데 오래 참으신다고, 결코 하나님을 경히 여겨서는 안된다.

현대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구속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구속은 표면적인 인간의 일차적 이해를 넘어선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알지를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일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회개하는 일에만 치중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회개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한다.

회개는 행위적인 것은 넘어서 존재론적인 것까지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복음을 표면적으로 보는 이들은, 복음을 율법의 연장선에서보며, 윤리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을 보여준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소홀히 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가볍게 만들려고한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없다.

율법은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인간에게서 출발된 지식으로는, 하나님께서 깨닫는 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깊이있는 철학적 사고를 가진다고하더라도,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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