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에 해당되는 글 3건
- 2018.01.19 :: 사도행전 8장 26~40절 말씀 묵상
- 2018.01.18 :: 사도행전 8장 14~25절 말씀 묵상
- 2018.01.17 :: 사도행전 8장 4~13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8장 26~40절 말씀 묵상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의 행보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성령께서 이 땅에서의 새창조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예루살렘에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박해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보다는 광야에서 만나게하신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는 구별된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것을 연상케한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축복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바로의 박해 가운데 있었던 애굽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음을 보여준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무(ex nihilo)의 장소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을 떠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였다.
성령의 새창조에 의한 역사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면, 성령은 예루살렘을 축복의 장소로 남겨놓으셨을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복음 전파는 선교사가 직접 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까이 있는 그 지역 사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시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각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여듯이 성령께서는 각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적절하게 환경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후에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했던 것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로마를 통하고있었던 것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임한 복음을 통하여 상황이 획기적으로 급진전되고있음을 보여준다.
현 시대는 혈통에 의한 민족주의가 붕괴되고있는 시대이다.
글로벌 경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교류는 복음 전파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문화 가정들을 통하여 이슬람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한다.
유럽에 밀려온 난민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위협을 받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무슬림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계 각국이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 교류하는 것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결산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를 넘어서 에디오피아로까지 전파된 복음이 이제는 소수 부족을 제외하고는 저의 전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전으로 인하여 자신의 세계 안에만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람을 장소에 제한시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됨으로서 성도는 각 족속과 불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조그마한 행동과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계신다.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아셨지만,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게끔 마음의 동기를 부여하시기도 하신다.
성령께서는 에디오피아에서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자를 사용하셔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립과 내시의 관계처럼 성령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가신다.
성도의 교제는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서로에게 나누어야한다.
성도가 그냥 만나서 세상 이야기나 하는 교제는 별로 의미가 없으며 공기만 진동시킬 뿐이다.
성도가 세상이야기를 하더라도 세상 이야기는 말씀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선지자는 사도 시대에도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받아서 전하였다.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도 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이 갖추어진 지금은 성령께서 직접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물다.
성령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하는이들은 대부분 이단들이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사도행전이 성령의 창조 사역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 사역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빌립과 같은 집사에게도 직접 관여하신 것을 볼 수 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관심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내시가 관심을 갖는 것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된다.
현대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관심을 빼앗아 감으로서, 인간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성에 더욱 가둬놓는다.
스마트폰이 제공해주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게한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보기에는 발전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고착화시키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젊은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일단 관심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출석교인 수의 급속한 감소의 한 가지 원인은 현대 문명이 제공해 주는 인간의 편리함이 교회와 진리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을 활성화시키면서 심판의 시기만 앞당길 뿐이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가르침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로 귀결되어야한다.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인한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조차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설교가 교훈이나 윤리 도덕으로 바뀌고있다.
교회가 생명력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짧은 시간에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세례는 성령의 역사가 앞선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먼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있었기에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모든 은혜의 과정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시의 행위와 같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오늘날 집사가 세례를 베푼다면 많은 비난에 직면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자 구제하는 일등을 위하여 집사를 세웠는데 실제 빌립 집사의 사역은 사도들의 사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즘의 교회 직책을 사도시대에서 인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예를 오늘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집사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교회의 질서를 위한 직분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역자는 자신의 성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 만들어야한다.
성도들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을 외인처럼 대하는 분위기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신천지같은 이단을 경개해야겠지만, 자기 교회 바깥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단절하는 교회당 중심의 신앙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인도받았다는 간증에 대하여)
빌립과 내시의 움직임에는 성령의 강력한 간섭하심이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결론적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성도는 상황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인지 사단의 간섭함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불신자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간증을 하기도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귀신같이 안다"라는 말이있다.
일이 너무나도 잘풀리고 마음을 다 빼았겨서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주실려고 인도하는 거다”고 간증을 하며 기쁨 마음과 더불어 모든 마음이 빼앗겨서 올인을 하기도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경우가 있다.
축복에 대한 간증도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세상적인 관점이고 이를 성령의 인도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행동하게되어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곤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고있다.
이는 인간에게는 사단에게서 자유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행동에 앞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고서 초자연적인 역사에 놀라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만 한다.
강남에 값비싼 예배당을 지어놓고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면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지를 보게된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빌립 집사의 사역에 대해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신약의 교회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속선 상에서 확장된 것이라는 새관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연속선상에 있느냐, 혹은 불연속선상에 있느냐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점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모세 언약의 속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보는 모세 언약의 속성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과 본질적인 은혜 언약이 모두 다 내포되어있다고 본다.
행위 언약만을 놓고보면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완전한 불연속선 상에 있지만 은혜 언약의 속성에서보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이 배제된 은혜 언약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게 된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혹은 언약적 신율주의, 신율주의)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만 보기에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한 선상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보는 신약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야기의 목적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이사야서 해석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유대인들의 무리에 참여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철저하게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한 신학으로서,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춘 작업의 결과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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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 14~25절 말씀 묵상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성전의 확장)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빋았다는 의미를 처음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사역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새예루살렘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져던 에덴에서의 목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에덴에서 예정되었던 종말론적인 안식의 장소와 일치된다.
이 땅에서의 예루살렘은 최종적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모형이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다.
처음 에덴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직책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서의 역할이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3중직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즉 통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에덴 바깥의 모든 피조세계에 충만케 하는 것으로서, 장차 그리스도가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에덴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포를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번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완성 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전이 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새예루살렘을 이 땅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셔서 성도들과 연합된 한 몸으로 세우시는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다.
사도들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지켰던 것은 지상에서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완성될 도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성에 세례받는 자들이 더하여 지는 것은, 처음 아담이 순종을 통하여 확장 시켜나아가야 했던 영역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을 대체하는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28:19-20)으로 이 땅에서 실행되고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성전의 확장을 의미하며, 이는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이 에덴의 확장이되어야 했듯이 사마리아 성에서의 복음화는 새예루살렘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셨기에 더 이상 이 땅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또한 영적인 새예루살렘의 실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유형적인 성전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이는 후에 로마 군인에 의하여 황폐하게된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에덴의 확장은 성령의 창조 사역에 의한 것이다.
태초에 혼돈 위에 운행하셨던 성령의 창조 사역은 노아 홍수를 말리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으며, 이제 새예루살렘의 확장에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창조 사역을 직접 수행하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게 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령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역만이 하나님 나라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행할 수 있어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없다.
요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개혁을 실행하는 이들이 있지만, 운동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주체가 되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운동으로 확장될 수는 없다.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물 세례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출발되어 행하여지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외적인 제도하에 있는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없다.
제도적 교회는 외적인 세례, 즉 물 세례만으로 교회를 구성해야하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 교회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로마카톨릭과 같은 권위 조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취약점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간의 욕심으로만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은 창조주이시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같이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서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열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이 만남으로서 이루어지는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연합과 성령의 창조 사역을 통한 새창조로 이루어진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의 거룩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새 창조에 의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는 형성될 수 없는 나라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창조 사역의 주체이시며 성령께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다.
아담에 의하여 일그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회복이 되었으며, 성도 가운데 역사하심으로서 성도로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성령이 이를 보증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다.
사마리아 성에 임하신 성령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신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선물은 공로를 기초로하지 않는다.
새언약을 통하여 임하신 성령은 오직 은혜를 근거로 선물을 주신다.
복음에 공로의 개념이 추가된다면 이는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일 것이다.
한 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였던 김세윤 교수는 최근에 자신의 강의록을 정리한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새관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칭의 개념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시켰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라는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 개념을 주장함으로서 칭의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하였다.
김세윤 교수도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 수용함으로서 성도의 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공로적 의" 대신에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한 개념을 수용한다.
이는 성도의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에서 성부 하나님으로 옮긴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며, 새관점과 동일하게 최종적 칭의의 근거를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다.
새관점은 자신들이 은혜를 근거로한 신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는 공로주의적 신학이다.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 즉 종말론적 안식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되는 안식론적 구원을 행위라는 공로로 취하려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시몬이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사함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구원에의 참여는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를 결정할만한 권한과 능력이 없다.
오직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하더라도 그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은 일단 신앙의 영역에 들어왔다고하더라도 자기 욕심에 끌려서 행동하는 잘못을 보이고 있다.
자기 욕심이 믿음을 넘어설 때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주게된다.
더군다나 목회자가 성도들의 욕심을 부추기면서 열심을 유도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쓰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직업을 목적으로 신학을 하고서 교회를 자신의 성공의 수단과 발판으로 삼을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러한 경우가 너무 많다.
이들에게 성도는 유물론적 가치에 의하여 평가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기도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해야한다.
기도는 사람의 필요에 의한 것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채움받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다.
시몬은 자신이 기도를 해야 할 상황이고, 베드로가 시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였는데도, 대신 기도할 것을 부탁한다.
요즘도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매우 일반화되어있지만, 이러한 기도의 요청에 의한 응답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도는 기도 요청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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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 4~13절 말씀 묵상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루살렘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사역자가 되었다.
이들이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서 선교 사역은 이차적인 소명으로만 감당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적극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지 않으리란 것을 아셨기에 필요한 환란을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의 역사가 있었다.
100여년 전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화된 조선은 일제의 압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국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특히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이 들고간 복음은 중앙아시아의 복음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 선교사들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
환란 가운데 있던 이들은 본의 아니게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선교적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오늘날 말하는 선교적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와는 구별되어야한다.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는 교회 자체가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며,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교회 자체가 파송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하는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의 근거는 칼 바르트가 생각해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근거로하고있으며 만인구원론적 성향을 지닌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며,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 교회를 세상에 보낸다는 개념의 보냄받은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의 최종 목적지는 세상인 셈이다.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로서의 전통적 교회의 최종 정착지는 교회로서 세상 사람을 전도하여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의 최종 종착지는 세상이기에 만인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선교적 교회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의 우주적 구원을 위한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신학을 지향함으로서 불신자들과의 구분이 없는 일상에서의 예배를 지향하고있다.
이는 박해받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전하였던 것과는 다르다.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마리아에는 박해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가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말씀하신대로 빌립은 이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빌립은 하나님을 전한것이아니라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하나님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의 차이는 그리스도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며, 그리스도를 전하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과 믿음을 통한 죄사함에 대해서는 인색한 자세를 취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은 구시대적인 사람인 것과 같이 취급한다.
하지만 초기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구시대적인 사람들이었다는데서 위로를 받는다.
사마리아는 영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곳임을 생각해 볼 때 빌립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풍요를 이들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예루살렘에서의 대제사장 무리들이 스데반 집사를 박해하였던 것괴는 대조적으로 마음이 가난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 집사를 따를 수 있었다.
외적인 풍요를 누리던 대제사장 무리들과는 달리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이 오히려 영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더러운 귀신과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마리아성이 그만큼 영적으로 황폐해있었다는 것이다.
육적인 질병은 영적인 질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육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의 그림자이다.
현대 사회는 의학의 발달 이상으로 질병이 급증하고있다.
특히 성인병과 암의 증가는 그 특성상 영적인 질병과 많은 관계가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법을 떠난 생활을 하는 만큼 영적인 황폐함과 더불어 육적인 질병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질병의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어져왔는지를 보는데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자연법에서의 이탈이 심각한 이유는, 자연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인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일반 은혜를 무시하고는 특별 은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상식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기에 자연법은 존중되어야한다.
사회법을 어기면서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우기는 목사를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교회가 얼마나 상식이 안통하는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본다.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쁨은 그들의 영적인 치유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사마리아 성의 슬픔은 이들이 영적으로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척되었지만 이들에게 전하여진 복음은 말 그대로 구원의 복된 소식이었다.
이들이 누렸던 기쁨은 육적인 충적을 넘어서 영적인 풍요로 인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발달하고 모든 곳에 복음이 전파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고갈을 느끼는 것은 교회는 많지만 참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별로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진정한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관련된 것이어야한다.
설교의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예화나 교훈, 도덕적인 문제로 비껴가면서 신학이 없는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교회 생활이 영적인 풍요를 경험하기보다는 여러가지 중요하지 않은 외적 조직에 성도를 묶어놓음으로서, 진정으로 자유케하는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이다.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거짓 능력은 자기를 높인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능력은 능력을 행하는 자로하여금 철저하게 겸손하게 만든다.
바울은 많은 능력을 행하고도 자신이 교만하게 될까봐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감사한다.
간증을 하는 이들은 특히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암묵적으로 자랑하면서 교만해 지기도 한다.
페북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부족함과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자랑이나 자신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을을 주로 전함으로서 스스로 교만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랑은 자신을 높이는 결과를 낳기에 이는 페북스타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하나님의 사람이나 사단에게 속하여있는 사람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높임으로 연결되게 되어있다.
사도들은 전도의 과정 가운데 높임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를 하였다.
하지만 시몬이라하는 사람은 오히려 높임을 받기를 즐겼다.
이적은 천상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것으로서 천상의 영역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단은 높아지기를 원하기에 이적을 통하여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그 이적이 사단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간증을 통하여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있다.
성도는 이적과 간증을 통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마술은 기쁨이 아니라 놀라움을 준다.
하나님께 속한 이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준다.
신사도 운동에서의 이적은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신들린 것과 같은 추함을 드러내주기에 하나님께 속한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례를 통하여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에는 운동이라는 용어를 붙일 수는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는 관련이 없는 유대주의적 도덕 운동이다.
세례는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선포이며,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기네 그들이 말하는 세례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겠다는 단순한 마음 가짐 이상도 아니다.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구원에 참여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빌립의 표적과 능력에 놀라기보다는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면서 기뻐하였지만, 시몬은 주로 능력의 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도 그 능력을 따라하고 싶었다.
교회도 외적으로 확장되면 욕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하며,어떤 이들은 자신이 큰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자신과 교회의 크기를 연계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이는 시몬과 같이 외적인 능력을 보고 따르는 이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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