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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에베소서 5장 15-21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1-7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5장 22-33절 말씀 묵상
바울은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고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것에 관하여 논하면서, 바울은 이제 결혼에 담겨있는 비밀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하여 풀어내고있다.
바울이 정리하는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담겨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자들은 종종 이 구절을 이용하여 아내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세우려고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남편에게 종속시키는 것인데,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인해서 피차 복종하면서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내가 독단적으로 남편과 관계없이 스스로 결정하여, 독립적인 행동을 하기 보다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을 남편과의 긴밀한 관계성에 종속시키고서, 남편을 존중하면서 일을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마치 성도가 교회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성도가 언제나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것과 같이, 아내도 남편의 말을 듣고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종은 주인과 종과의 관계성에서 나온 종속의 개념보다는, 서로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독단적인 뜻대로 일방적으로 행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곧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이 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으며, 다윗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표하였다.
머리의 의미는 대표성과 출발점,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내가 자신을 남편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남편의 대표성과 권위를 인정하면서, 남편에게서 시작된 권위 구조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 더 이상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는 사단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조로서의 교회와 가정의 형성은,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이 사단의 세력만이 권세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밑으로부터의 회복이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불복종은 처음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와는 남편과 떨어져있었기에 사단이 틈을 탈 수가 있었다.
하와는 남편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기에,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내는 더 이상 하와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남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서,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말아야한다.
서로에 대한 복종은 공동체를 묶어주는 끈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는 완전한 복종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공동체의 회복이며, 이는 서로에 대한 복종의 끈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가정 공동체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서, 더 이상 사단이 틈을 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한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의 원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남자의 갈비뼈와 여자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된 인간과의 관계와 유사성이 많이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지으셨다.
형상과 갈비뼈는 존재 자체의 근본적 속성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라는 사랑의 원리가 더해져야 생명이 있듯이, 남편은 아내에 대한 희생적 사랑이 없이는 남편으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슬림 남자들이 아내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사랑의 원리가 결핍된 율법의 저주와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든 여자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완성되어야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기쁨인 것과 같이, 아내는 남편의 기쁨이어야한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은 성도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한다.
100% 깨끗하지 못하면,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으로는 100%는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100% 깨끗하여질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대표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새 사람을 입으려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야하며, 새롭게 시작되는 가정 공동체도 복종과 사랑의 관계로 흠없이 새롭게 시작되어야한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육적인 자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자존감이 밑바탕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는 사랑을 받아야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기를 사랑하여야만 한다.
아내는 남편과 한몸이기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서 가정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존재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바울은 창세기에 기록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를 인용하면서, 비밀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높으신 곳에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고, 이들과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남녀 간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과 맥락을 같이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남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 담겨진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아담이 타락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이미 내포되어있었던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혼인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가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교회와 한 몸이 된 것에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생각하여야한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유비analogy라고 할수있다.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부부사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유형적 교회가 부부의 관계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부가 함께 하는 것보다 교회 생활에 비중을 더 두는 것은 성경적 원리가 아니다.
부부는 이 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창조 원리와 결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그 형상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인간은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창조물에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을 투영할 능력이 없고,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형상을 피조물에 담아놓을 수 있으시며,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피조물을 사랑 할 수 있으신 것이다.
창세기 1-3장에는 인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흔히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마치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여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 되었음을 비밀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에 담겨있는 비밀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사랑을 완성하여가는 과정이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
이러한 사랑은 순종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요구였으며, 순종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은 성립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한다.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과 연합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결혼은 이러한 창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고있는 동거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어둠 가운데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거 문화의 문제점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의 관계성에 비추어 볼 때 동거 문화는 많은 문제점이 있으며, 동거문화가 일반화되는 곳에서 교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혼인을 통한 한몸이 되는 원리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가 연합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동거문화는 연합의 개념이 빠져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위한 이 세상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든다.
혼인은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것을 약속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에 대한 소유를 주장 할 수가 없다.
혼인은 남편의 희생적 사랑과 아내의 복종이 요구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에 대한 희생은 계산에 의한 것이며, 행동방식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이 우선이 된다.
서로 생각을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동거문화는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아가페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혼인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지만, 동거는 단지 육적인 에로스적 사랑만으로 연결되어있다.
혼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동거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사단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혼인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출발이지만, 동거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의 속성 자체를 변질시켜버린다.
동거하면서 진정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서구 사회의 동거 문화와 교회의 몰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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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15-21절 말씀 묵상
오늘 말씀은 마치 이민 선을 타고 이국 땅에 도착하는 배에서, 승무원들이 이민 자들에게 이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어떤 방식의 생활을 하여야하는지 설명해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떠한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지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있다.
이는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이루었어야 할 공동체에서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잠시 아담의 타락으로 잊혀졌던 것을 다시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아담은 원래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직책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서 마땅히 수행하여야 할 직책인 것이다.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께 시와 노래로 예배하고, 선지자로서는 악한 세대를 분별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왕으로서는 술취하여 사단의 지배를 받지 말고 자신을 통제하여 이 세상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도록 하여야한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지혜있는 자)
자신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는, 마치 운전자가 주변을 잘 살펴본 후에 차를 움직이는 것과 같이, 자세히 주변을 살펴본 후에,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해야한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실수를 한 사람은 바로 아담이었다.
그가 하와와 더불어 자세히 주의하여 상황을 파악했었다는 언급은 없다.
사단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도, 하와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사단스럽게 움직여도, 부패한 인간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하여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사단은 인간을 분명 파멸로 몰아가고있지만, 인간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있는지 전혀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지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세상적인 지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상황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볼 때에야 비로소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세상의 지혜는,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두 번째 아담의 후손인 신자는 그리스도께로 부터 오는 지혜로 상황을 판단하여야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아야만 가능한 것이며, 신자는 이를 근거로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혜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지식만으로, 인간적으로 분석하고서 판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혜는 오직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지혜없는 자)
지혜없는 자는 한마디로 거만한 자를 말한다.
거만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못한다.
거만한 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겸손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거만한 자는 책망과 교훈을 멸시하며, 도움을 받기를 거절한다.
지혜 없는 자는 지식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는 교만에서부터 오며,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모습이다.
아담의 지혜 없는 행동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우상 숭배로 재연되었으며, 이는 타락한 죄인들의 삶 가운데 보편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새 사람을 입어야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지만,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낌)
인간은 누구나 다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고있기에, 성도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주어진 기회는 하나님께서 잘 활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과 같이 상대방의 끊임없는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제한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과 같다.
시간이 종료되면 더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에, 성도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방탕함)
술 취함은 주어진 기회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다.
술 취함은 마치 땜에 담겨있는 물을 아무 용도도 없이 그냥 흘려 내려 보내는 것과 같다.
술이 들어가면, 엘돌핀과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면서, 몸 안에 축적된 에너지 밸브를 열어 이를 다 쏟아 버리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제한된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
어떤 이들에게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고, 어떤 이들에게는 비교적 적은 기회들이 주어진다.
이는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와 같이 결산을 요구하는 기회들이다.
술취함은 이러한 기회들을 쓸모없이 버리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되면, 이러한 기회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게 된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주께 찬양을 드렸다.
(시편 95편)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전적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찬양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랑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모가 자녀를 보고 기뻐할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를 즐거워하는 것 밖에 없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주께 찬양드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있어야하며, 이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거듭난 성도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면, 성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것이다.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해야하는 이유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일을 이루시기에, 성도는 모든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한다.
성도는 자신이 오해를 받는 일이 있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거나, 왕따를 당하였거나,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슬픔 일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이마저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일들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성도들의 가슴을 찢어 놓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여 극단적으로 좌절되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에,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을 수도 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경외함)
학생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더 이상 싸우지 못한다.
맏형이 있으면 동생들이 서로 싸울 수가 없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두려운 존재가 없으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어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셔서, 그리스도 안에 모인 존재들이며,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모인 이들이기에, 어느 누구도 서로에 대하여 부족함이나 부정적 모습 때문에 불평할 수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납하라는 말을 넘어서, 서로에게 자신을 복종시킬 것을 요구한다.
성도들 간의 복종은, 부부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동체의 특징이며,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서로 복종하시면서 이루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어진 모든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복종이 요구된다.
피치 복종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결속력이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특징이다.
아담은 타락 하면서 바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었고, 가인을 아벨을 죽임으로서 철저하게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었다.
바울은 거듭난 에베소 성도들에게, 앞으로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공동체는 서로 간에 피차 복종, 즉 서로를 서로에게 종속시키면서 강인한 결속력을 갖는 공동체를 이루어야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유형적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성도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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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에베소 성도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언급하고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
어둠은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이 아니다.
어둠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어둠의 상황에서는 갈길을 알 수도 없고 주변 상황도 파악 할 수가 없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자녀라는 말보다는 어둠 자체를 인격과 동일시 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보는 불신자는 어둠의 희생자가 아니라 어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은 거듭난 성도를 빛 자체이면서 빛의 자녀라고 칭한다.
이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빛 자체로 봄으로서, 빛 가운데 거하는 빛의 주체인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과 동일시되고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은총,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전적인 선물이기에, 받는 이들의 모습이나 성품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종종 일반 은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선한 모습들을 인간의 인격 자체에 투영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사람들은 몇 가지 선한 것을 행함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의 성품이 착하고 선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선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선하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100% 죽어있고 부패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인간이, 자신이 무엇인가 누릴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 누린다는 생각은 전적인 착각이면서 교만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잘나서 혹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교만을 계속적으로 질책하신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로서 행동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공로적 댓가를 주장 할 수 없는 열매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맺는 마땅한 열매로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결과물들이다.
착하게 살았고, 의롭게 살았고,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공로적 사고방식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공로적 행위가 요구된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을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은혜 안에 머물고(staying) 있었지만,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은혜 안에 머물면서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진실되게 살아야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나온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한 무리수를 둔 유대주의적 사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완전한 것이기에 최종적 구원에 더 이상의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도의 잘못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행위 구원론으로서의 펠라기우스적 사고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성도는 마땅히 은혜의 열매를 맺어야하며, 그 열매를 가지고 어떠한 공로적 기대를 하거나, 댓가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한다는 것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분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하며, 과정 가운데 옳고 그른 것을 발견해 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이 모두 집중되어야만 가능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있기에 시험의 기준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다.
성도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분별해 나아가야 한다.
새 사람을 입은 성도는 옛 사람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시험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하와의 권고를 수용하였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시험하지 않고 뱀에게 시험을 당함으로서 타락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에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주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 사람을 입으면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약속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담과 같이 분별력이 없이 다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사단의 유혹에 걸려들면 사단이 흔들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기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하라)
책망expose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권고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였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였던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었으며, 이는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드러냄(책망함, expose)으로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만 해결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문제로 드러냄으로서, 그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같은 류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였으며, 보편적인 인간들이 행하는 모습들이다.
은밀한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빛을 피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원하는 것은, 우상이 옳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상이 어둠 가운데 있기에,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사람들의 속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밀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에베소 성도들이 옛 사람을 입었던 이전에 접했던 모습이었기에,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입장에서 권고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비록 성도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모습이 드러났던 것을 경험하였던 이들이지만, 아직 여전히 죽어있는 어둠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빛으로 비추시기에,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드러난 것들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음으로 빛 가운데 드러났던 것과 같이, 인간 모두는 결국 어둠 가운데 행한 모든 은밀한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남으로서, 죄악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될 것이다.
대부분의 악을 행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둠 가운데 행한 것이 드러나지 않으리란 생각으로하지만, 이는 단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 법칙을 넘어서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다.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와 죽은자)
바울은 죽은 자와 잠자는 자를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어둠 가운데 계속 있게되지만, 잠자는 자는 빛이 비추이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성도는, 죽은 자가 아니라 잠자는 자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관리의 딸을 일으켜 세우셨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 9:24)
이 땅에서 육체가 잠자는 성도들은, 영으로는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한 빛 가운데 빛으로 존재하는 부활체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한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둠 가운데서의 옛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새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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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1-7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의 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 가운데 부모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부모의 모습이 자녀 가운데 투영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자녀를 낳은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이 투영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일그러져있지만,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한다.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될 순 없겠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하여야한다.
이러한 행동은, 방법론적으로는 인위적이지만, 하나님을 본받는 방식의 행동을 취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사단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는 기쁨 가운데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한다.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된 희생적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 가운데서의 희생에는 기쁨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희생에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억울함과 손해본다는 피해의식이 뒤따르게되기에, 이러한 희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교회생활에서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희생적 봉사를 할 경우, 그 후유증은 그대로 성도간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가운데, 이들의 구원에 대한 기쁨의 고통과 자원하는 희생이 있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자원하는 희생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서도 나타날 때, 이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사랑하는 자를 위한 구속적 희생이지만, 성도 간의 희생은 구속적인 희생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이는 구속적이지도 않고 속량과는 상관없다.
새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뿐이다.
그들이 보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속적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속적 희생을 말하는 개혁주의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음행)
하나님의 창조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음행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하는 관계성의 파괴 행위이다.
우상 숭배와 음행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포기하는 것이다.
음행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과 깊게 연관되어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떠난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음행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행위 언약을 파기하는 범법의 행동이었다.
정상적인 관계는 약속을 근거로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약속이 없어도, 태어남 자체로 이미 약속이 형성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자체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사단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는, 약속 즉 언약을 파기한 행위였으며, 이는 음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기에,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한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거문화는 서로에 대한 의무적 관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에서 생겨난 문화이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만 한다.
마치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행위 언약 성격의 약속을 하였던 것과 같이 결혼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야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연고로 인하여, 행위 언약을 파기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로 바벨론 유배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었다면, 이스라엘의 음행의 연고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으셨을 것이며, 대신에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거문화에서는, 결혼과는 달리 계약 관계에 있지 않기에, 서로가 음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동거 관계는 마치 하나님과 이방 민족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거문화는 대부분 음행에 대한 부담감에서 출발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키길 원치 않기에, 결혼하고서 음행한 연고로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음행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동거를 선호하게되는 것이다.
결혼문화는 시대에 뒤진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법칙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결혼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재산의 공유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결혼은 서로의 소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동거는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동거 문화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희생적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동거 문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천국의 상속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라는 성경의 중요한 특징들과는 대립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음행을 피하라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음행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것)
육체적으로도 더러운 것이 있고 생활 방식과 동기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더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나마 최소 한도의 명맥을 유지하고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나 동기는 원론적인 더러움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더러운 것은 특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이 말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은 주로 성생활과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은 음행과 동거문화는 물론, 동성애와도 관련이 있기에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을 중심으로한 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점과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인권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다고 하더라도, 인권이 하나님의 명령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경우가 바로 동성애에 대한 인권일 것이다.
동성애를 여러가지 생물학적인 인자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동성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뿐만이 아니라, 자연법에도 위배되는 더러운 것이다.
타락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하와는, 아담을 위해서 지어졌고, 아담은 여자를 보고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특히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운행 원리들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순종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물 가운데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기에 보시기에 좋으셨을 것이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속성은 많은 변질을 가져왔으며,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으며, 삶의 환경에는 파괴적이고 부정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체질도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변화가 일어나면서, 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타락 이후에 창조 세계의 속성들에도 부정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아 홍수로 인한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많은 생물들의 생태학적 특성들에도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타락과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내적인 속성과 외적인 속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동성애 성향도 이러한 타락의 영향에서 생겨진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동성애자들의 변태적인 성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모습에 더러운 짓을 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할 수 있기에, 바울이 말하는 바와같이,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것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우상숭배나 온갖 더러운 것도 탐욕의 유형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상적인 소득 이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행하는 온갖 부정 부패들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탐욕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동문회 모임에서 동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보면, 접하는 잡다한 소리 가운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가운데 속하여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것 같다.
공적인 안건 말고는 거의가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과 관련이 되어있다.
이는 이 세상 문화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흔히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변혁을 사명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치 먹물에 깨끗한 물을 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에게는 오히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입밖으로 나오기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거의 파악된다.
불이 그 빛으로 증명이 되듯이, 사람의 성품은 말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음란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은 인간이 사단의 좀비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만약에 성도의 입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말들이 나온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행위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마 28:19-20)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기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성도의 입에서 이와같은 더러운 말이 나와서는 안된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상 숭배는 엄연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행동 방식이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은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자들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들을 용납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와같은 더러운 것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 결과로 인한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므낫세의 죄악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성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그 이름이 같이 기록되고있다.
성도는 우상 숭배자들의 교회 공동체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지고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어느덧 교회 안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일반화되고있는 것보게된다.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속이는 것이 능동적 범죄라면, 속임을 당하는 것은 수동적인 범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이 진짜같아서가 아니라, 거짓인줄 알면서도 우상들이 마음이 원하는 것에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범죄하면 명분이 없기에, 자신의 범죄에 대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 속임을 당해주는 것이다.
속임을 당하는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도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속이는 자와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주식 투자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할 경우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권유로 하지만, 실은 자신의 마음의 소원에 명분을 만든 것 뿐이기에,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행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신다.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러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같이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면서도, 그들의 우상 숭배는 그대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그들과 같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게 내어줌으로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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