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91건
- 2017.12.29 :: 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레미야 선지자는 실제로 두 번이나 유브라데 강가에 갔다왔다고 보기 보다는 환상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상징은 이해력이 부족한 유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인 의도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허리에 띠는 띠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식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유대인들이, 유브라데 강가에서 여러날 동안 바위 틈에 감추어진 띠와 같이, 어둠 가운데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포로생활을 한 다음에는 썩어버린 띠와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모습으로 바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고계신다.
빨지 않은 띠와 같이 교만한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이 아니고는 교만한 특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0, 듣지 않는 이들은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고 우상 숭배로 귀결된다.)
버림을 받았다는 말은 한 때는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버림받는 것은 더 이상 듣기를 거절한데서 연유된다.
듣는 것은 순종의 조건이다.
듣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야 하며, 성도들 간에도 말씀이 공유되어야한다.
말씀이 공유가 되지 않는 교회는 결과적으로 다 자신들의 굽은 마음대로 욕심에 이끌려 행동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결국 유대인들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몰락은, 말씀을 자기들이 듣기 좋은대로 왜곡시켜서 들었기 때문이며, 실상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듣지도 않은 결과물이다.
(결론)
성도의 힘은 여호와께로부터 온다.
자신이 잘 나가면 자신이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자신의 목에 힘을 주게되면 허리의 힘이 빠지게되며 결국에는 유대잊들과 같이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피값으로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마치 자신의 공로로 성장한 것인마냥,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힘이 빠져가고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유대인들에게도 끊임없이 경고의 말씀을 하셨듯이,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되새겨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장로교회는 모든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달려있는 것과 같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있지만, 유대인들의 잘못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치심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책임을 단순하게 인간이 이해하는 예정론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틀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간절함과 한없는 노력하심과 끝없는 두드리심은 결코 인간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속이고 착각하고있는 유대인들과 같이, 선민 의식에 빠져서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이 하나님께 아무 문제거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아야겠다.
유대인의 특권적 선민의식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의한 특권의식에 빠진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취향대로 왜곡시켜서 들으며, 허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내면의 높아지고자하는 마음이 꺽일 때, 썩어버린 띠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질 때, 교만한 특권의식이 사라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신자는, 자신의 잘남에 의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으며, 또 다시 유대인과 같은 특권의식이나 교만에 사로잡혀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게되면, 특권의식과 교만과 더불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하며,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져있는 모습을 흔하게 보게된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은혜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교만한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기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3장 20-2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3장 12-19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8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9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11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12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15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7-10, 특권을 누렸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내어 버리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우신 집은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심으로 인해서 많은 풍요를 누리게되지만, 그 안에 거하는 이들은 이로 인해서 부패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온갖 좋은 것으로 입히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는 근본적인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늬있는 매와같이 자신을 장식하며 자신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증명해주고있다.
무늬만 있는 새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꾼 결과로서, 원래의 모습과는 상이하게 달라진 이상하게 바뀌어진 변질된 새를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들의 높아짐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몰락한 유다인들과 같이 결국에는 이방의 먹이감이 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는 외형적으로 거대해진 교회에서 한결같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나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진 이들로서, 결국 자신들의 욕심을 섬기지만, 이것이 죄인으로서의 즐거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는 심각한 우상 숭배의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추구하는 기복신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자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미움을 살 수 밖에 없게되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존재가 되고만다.
하나님이 선택한 목자로서의 유다도,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결과, 들짐승이 되어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사악한 반역자가 되어버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대형 교회의 직분자들은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대상이라도 자신의 품을 떠난 이들에 대해서는 내어버려둠으로서 징계를 하시는데, 많은 한국 교회의 무질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이들의 결과가 결코 평탄치 않음을 생각해 본다.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간에, 교회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의 경우에, 교회의 주인 노릇하며 진리를 훼방하는 경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다인들과 같은 류가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10-13, 황무지가 된 포도원)
당연히 소산이 있어야 할 포도원이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둘 정도로 황무지가 된 것은 자신의 소욕을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하나님을 떠난 유다인들은 재앙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 보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자신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외적으로는 파괴하는 자들로 인한 것이지만,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들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쫓는 이들까지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는, 오직 분노가 임할 뿐이다.
(14-17, 악한 이웃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악한 이웃을 파괴하는 자로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기뻐하시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이들을 다시 벌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하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사용하시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지만, 하나님께 사용되어진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란을 기회로 삼으셔서, 이들에게까지도 말씀이 전파되어 이들이 구원에 참여되길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율법을 받은 이들이 아니지만, 이들도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세워지길 원하신다.
(결론)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풍요와 축복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환란과 어려움을 통해서 정금같이 순화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은 마땅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나 정죄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과정임을 인식해 본다.
인간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황폐함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에서 온다.
그렇다고 표면적인 풍요가 인간 승리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풍요에 취한 인간도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은혜를 거두어 가심을 인한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풍요를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자, 즉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풍요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상실되어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누리는 풍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은 풍요를 주장할 권리가 전혀 없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경험하는 재앙과 슬픔은 전적으로 은혜를 입은 죄인들의 반역의 결과일 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여도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져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 과정 가운데 있기에, 구속에서 멀어진 이들은 결과적으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았다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사용하시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해도 교회 자체를 대적하거나 교인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들이 부패하고 타락 했을 때, 이들과 대적하거나 투쟁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처럼, 이들의 악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이들의 악함을 슬퍼 할 수 있어야한다.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외형적 교회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모형이기에,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궁극적으로 세워가야 할 교회인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3장 12-19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
(21, 고향 사람들에 의한 박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일이 없다고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레미아 선지자도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까지 받고있다.
인간에 구축된 사회적 환경은 배타성과 죄성과 연계될 수 밖에 없다.
고향 사람과 지역주의, 민족주의등 배타적 이기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다.
이는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22-23, 때가 되면 징벌하시는 하나님)
세상에 기반을 둔 이들은 당시에는 견고한 것 같지만, 이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타성에 대한 결과는, 바로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를 하시게 되어있다.
이들의 악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대하면서 소모전을 벌일 때 오히려 우리 자신도 그들의 악함에 동참하는 또 다른 악을 낳게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상대의 악함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어야한다.
(2, 거짓된 목자들)
말로만 하나님을 부르며, 마음에서는 먼 사람들...
차라리 불신자라면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핍박을 받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이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참된 신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예레미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앞서신다.
악한 이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마련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우리에게 다가 올 일을 걱정하며, 지혜롭게 준비되어지는 자가 되어야한다.
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6, 우리의 형평을 아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신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선지자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친분은 신자에게 환란보다도 더욱 어려운 시험과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나 다 감당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도 우리를 속일 수 있음을 경계하게하신다.
의리, 가족애, 친분등 세상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을 가질 때 세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이 될 수가 있다.
고향에 있는 형제와 아버지 집과 함께 하려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말과 경주하는 것이되고, 넘치는 요단 강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말씀을 공유 할 수 없었던 혈연, 학연, 지연으로 뭉쳐진 교회가 결국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경험해본다.
(결론)
신자의 고난은 많은 부분 세상 욕심을 추구하는 이들과의 충돌에서 온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거민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것은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었다.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는 세상에 뿌리박은 기복신앙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기복신앙은 복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이 세상과의 충돌로 인한 손해는 물론이고, 많은 희생을 감당하여야한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에서는 종종 예수믿고 어려운 가운데 복을 받았다는 간증들을 많이 하곤 한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한 가지이다.
참된 간증은 세상 복받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한 간증이 되어야한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란 중에 건져내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벌하시는 것에 대한 간증을 전한다.
참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것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성도의 어려움과 성도가 속해있는 교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던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안에 거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
(9-10,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생겨난 반역의 심각성)
이스라엘의 반역은 아담의 범죄의 속성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틈을 타 들어온 반역은 에덴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들어온 반역이 이스라엘 전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의 선조는 궁극적으로 아담으로 귀결되며,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역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행위 언약에 대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을 무조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반역한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이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반역을 수용한 결과였기에 공동체 안애 들어온 일부의 반역이 전체를 파괴시킨다는 보여준다.
(11, 피할 수 없는 재앙)
사람들은 쉽게 “오 마이 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욕을 할 때 “지저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있다.
현재의 인간들의 상태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현재의 죄악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인식이 없이, 재앙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과연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회개함이 없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이 없이, 과연 쉽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범죄는 나의 범죄가 아니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도 아담을 대표로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범죄에 참여하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모든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자신과 관계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12, 무력한 우상)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는 것과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현대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데, 현대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애굽의 재앙에 맞서서 싸우는 바로와 같이, 현대인들은 기술로 재앙을 이겨내려고하지, 절대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이 인간은 결코 기술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 우상의 보편성)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만든 우상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있다.
처음에는 일부였겠지만 이를 용납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있다,
일본만 보더라도 우상이 거리 곳곳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가득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는 교회가 가득한 나라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늠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관계로, 너무도 많은 외형적 교회가 부패한 이스라엘 성전과 같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이제는 너무도 보편화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외형적 교회 안에 진리와 거짓이 혼잡하게 되었기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수치스러운 물건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14, 버림받은 자들)
로마서 1장에서와 같이 내어버려두고, 포기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말로 안되는 이들은 직접 재앙을 경험함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문명의 발전은 마땅히 하나님께 향해야할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문명의 발전 만큼이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수없이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방법으로 재앙을 경험하게 할 수 밖에 없었듯이, 현대인들도 현대문명으로 인한 재앙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 할 것이다.
(15, 악을 도모하며 기뻐하는 자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에 충성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면 최고의 교인이 된다.
하지만 교회가 부패하고 잘못될 때 이들이 과연 교회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열심과 충성 봉사, 그리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 마치 무당이 푸닥거리 하며 돈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리한 생각일까?
교인들은 목회자를 대적하면 벌받는다면서 질질끌려가는 모습이 마치 무당의 협박에 끌려서 돈을 더 얹혀주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교회에서 진리는 사라지고, 기뻐할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할 것을 슬퍼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계략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쫓고있다.
(16-17, 축복 할 수 없는 이유)
감람나무를 심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이를 망가뜨렸듯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를 용납하는 이들로 인하여, 가지 꺽인 감람나무와 같이 훼손되고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들을 본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을 주어도 나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감람나무도 인간이 누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윤리나 도덕으로 변화되거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변질시켜서 악한 것으로 이용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예 할례를 받지 않은 모든 열방의 백성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본다.
(결론)
교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온다.
교회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세상적인 방식이 교회 전체를 붕괴시키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갖고있기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쉽게 수용을 하고, 이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있는 죄가 고발되고, 들어온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붕괴가 초래되었듯이,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말씀에 의해서 교회 가운데 들어온 죄가 고발되고, 가만히 들어온 죄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았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이들은 실상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 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죄를 용납하는 행동은 죄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해주며,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할 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서 이를 피하려고 노력해야하며, 바울과 같이 사망의 몸인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계를 하고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한 가지 예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부인과 자녀를 놔두고 수십년을 비서와 동거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머리에서 나오는 신학 사상이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한 결과물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경건한 하나님의 성도는 자신의 죄를 다윗의 범죄에 빗대어 합리화시키거나, 죄에 대한 핑계를 대지 않는다.
울법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녀로서의 관계가 아니었지만,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식을 할 것이다.
교인들의 보편적인 죄악과 무례함과 몰상식은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5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
(2-5절, 언약의 대상인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의 존재적 삶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의 삶이다.
이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순종을 조건으로 허락받은 삶이었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저주가 약속된 행위 언약 안에서의 삶이었다.
이들의 이전 상태는 쇠풀무 애굽 땅에서의 종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현재적 삶은 종에서 해방된 삶으로서, 순종과 명령을 따를 것을 조건으로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언약에 대한 파기를 의미하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이 행위 언약 안에 있었던 것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거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죄성은 인간이 결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다.
(6-8절,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께서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백성들에게도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서,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끝까지 언약의 요구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예레미야로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고 명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실 저주는 행위 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순종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완악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임하게 될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순종에 대한 요구는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참여할 자리가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해주시는 것이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보편적인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현재적 삶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삶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심판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행위 언약 관계 아래에서 대표자 아담을 통해서 행위 언약 아래있었다.
아담은,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행위 언약을 근거로 에덴에서 쫓겨난 자이다.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실패한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상태에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고발하고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고발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에게 또 하나의 언약(원시복음: 창 3:15)을 세우심으로서, 타락한 아담이 낳은 아들 셋 안에서 여호와를 부를 수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삶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 관계로 인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노아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인류 모두는 누구나 다 양심과 같은 자연법을 통하여 자신이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죄가 고발되어지는 인생을 경험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연법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이 고발되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누구나 예외없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심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없다.
펠라기우스와 같은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모두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며, 어거스틴은 생물학적인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강령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주어질 수 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는, 행위 언약 안에서 저주받은 자이기에, 더 이상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의 행위는 단지 고발되어질 뿐이다.
아담의 아들 셋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과 같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고발되어지는 인생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공로에 더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18-22절)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있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
유다 백성을 딸로 표현하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백성이 보호 받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보호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 때 임하는 여자의 고통이 담겨있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가 책임을 인식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역자들에게도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1절)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로서 상가에서의 고통과 같은 심정을 느끼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모습을 본다.
우리의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하지만 주변을 보는 심정은 항상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2절)
떠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문제는 보고 싶지 않아도, 누구나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 있기에,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알고있다.
(3절)
혀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이들은 자신의 거짓말로 부와 권력을 누릴 것이다.
누구나 말만 잘하면 이 세상에서 많은 이득을 누릴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혀에 묶임으로 인해서, 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거짓을 남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만, 표면적인 부요함 뒤의 내면의 빈곤을 숨기면서, 혀로 뿌린 악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또 다른 악을 저지를 뿐이다.
하나님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겠지만,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악용 할 뿐이다.
(4-5절)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며, 가진 자들을 조심해야하는 이유다.
가진 자는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된 혀를 남발하며, 친구를 속이고, 결국에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절)
속이는 자들 가운데 거하는 예레미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속임 가운데 운영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 거하는 이들인데도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인 우리들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는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기보다는, 율법이 일반 은총의 여이역에 속하여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연법이라는 일반 은총의 기반 위에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고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악이 비록 세상의 기준으로는 악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악이다.
하나님이 가장 큰 근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때, 예레미아 선지자가 거할 수 있는 광야를 찾았듯이, 하나님께 속한 이들은 이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
(4-6절, 하나님의 바램과 인간의 현실)
온갖 가증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회복을 희망하시나, 죄인인 당사자들은 회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러한 자존심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로서, 회복에 대한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자존심은 아담과 같이, 자신의 실상을 보고싶지 하지 않는데서 연유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하나님의 간섭하심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죄를 직면하게되기에, 비록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축복의 통로임을 인식해야한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을 배제한데서 연유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마음에 있는 양심이라는 자연법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기에,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하나님을 떠난 악의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해 줌으로서 더욱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부추긴다.
(7절. 규례와 자연법을 떠난 죄인들)
자연법은, 비록 속성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과 동물들 모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여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규례는 구체화된 자연법으로서, 인간이 규례를 떠난다고 할지라도, 규례를 떠난 인간의 모습은 결국 자연법을 통해서 실상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8,9절- 지혜의 근원된 말씀)
유대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은 지혜가 아니라 하나의 지식에 불과했다.
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율법은 행할 능력이 없는 머리에만 남아있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현대 사회는 지혜로운 사회가 아니라 지식이 넘치는 사회다.
지식이 많은 이들은 자신이 지혜롭다는 착각을 하게된다.
지식은 인간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강화할 뿐이지만,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지식이 많은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교만해진다.
지식은 과학적이지만 지혜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말씀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오직 지혜를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교만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지식이나 인간 중심의 실존적 사고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재단하려고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지식으로 재단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오히려 증명되지 않은 진화를 가지고 진리를 대체한다.
하자가 있는 지식은 진리가 될 수도 없고 더군다나 과학적이지도 않다.
유신론적 진화론 뿐만이 아니라 칼 바르트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의 코드로 풀어내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과물물은 인간의 지식 코드에는 잘 맞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지혜로운 생명력은 상실 될 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지식의 코트로 무장한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쉽게 난도질 하면서, 자신들은 옳은 일을 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자부심으로, 스스로 교만해지기도한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진리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부작용만 양산할 뿐이다.
이들의 종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며, 자신들이 쌓은 교만으로 인하여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이들은 결국 황폐하여 질 것이다.
지혜있는 자는 지식의 높은 자리에 앉을 때 더욱 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한다.
(11-12절, 악을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거짓말을 한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는 책임감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지도층 인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가증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이 시대의 교회 가운데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설교시간에 수 많은 가식과 위선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무 문제 의식을 못 느낀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영혼의 잘됨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성도들이 상처를 받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왜곡 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승리자 의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만하다.
(13-17. 재앙만을 걱정하며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려하지 않음)
부정적 상황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주신 은혜를 거두어 가실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잘못 한 것을 알고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환경의 재앙이나 여러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오직 과학으로만 풀어 가려고 한다.
기상 이변으로 작황이 안 좋으면 수입을 하면되고,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려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제한 받으시는 분은 아니시다.
한 가지를 해결하면, 그 보다 더 많은 여러가지의 재앙을 허락하신다.
마지막 때에는 재앙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더욱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방책을 구하여도 결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함께 한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오래 참으실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라도 감출 수가 없으며, 심지어는 마음 속의 어떠한 생각도 숨길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시고도 오래 참으실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알 때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29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33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성전에서의 가증한 것)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것은 주로 우상 숭배들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표면적으로나마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명확한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의 사람들은 도벳에서의 이스라엘의 행위와 같이 가증한 것을 행하지 않는가?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보편적인 사람들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겨 놓으신 자연법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이 예고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도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서 저주와 심판이 예고되어있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분명한 배교행위로 드러났지만, 자연법 앞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진 문명의 발달로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
이 세대는 이스라엘 백성들 못지 않게 하나님을 배제하는 악한 세대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 이면에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기 보다는 인간 스스로 해결해보자는 독립적인 마음이 깔려있다.
문명은 정죄를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정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담도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였듯이, 아담의 후손인 가인도 아벨을 죽이고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에녹, 즉 개벽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다.
한 세기전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대량 생산한 물건을 팔 시장을 확보하고자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다.
산업화된 나라들은 수 많은 나라들의 주권을 강탈하고, 수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면서도,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증가되면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산업혁명에 뒤늦게 동참한 독일과 일본은 다른 나라들이 이미 식민지를 다 차지하고있었기에, 자신들도 시장을 확보하고자 전쟁을 일으키게되었다.
현대 사회는 시장 경제가 사회를 이끈다.
시장 경제에서의 진리는 이익이다.
현대 사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에서는 도벳에서의 가증함이 제한적으로 드러났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먹이 쟁탈전을 벌이는 전 세계적인 살욕의 현장이었고, 전 세계를 죽임의 골짜기인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로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이는 아직도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의 경제 활동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제 1, 2차 대전 후에 전 세계적인 무역의 발달과 첨단문명을 발전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이들이 승리를 외치는 소리다.
이제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 까지 새롭게 둥지를 틀고있다.
모두가 이 골짜기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는 게헨나가 될 뿐이다
힌놈의 골짜기는 죽이는 자들이 죽는 곳이 되었듯이, 문명의 발전은 모두에게 죽음의 골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삶의 환경에서 부딪히는 재앙들은 대부분이 힌놈의 골짜기를 만든 인간의 작품들이다.
도벳에서 어린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이들은 결코 자신들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악행인지에 대하여 무지할 뿐이다.
도벳과는 다르지만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얼마나 가증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비판하는 소리를 하는 이들을 쫓아내고서, 자신들은 남겨진 기드온 용사들이라 선포하는 교회도 있다,
말씀이 무덤에 덧입혀진 회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마져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가증한 것이라도 쉽게 수용해버리고 만다.
결국 교회의 몰락은 죽이는 자의 죽음과 같이, 스스로 파놓은 골짜기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교회의 몰락은 희망의 상실이며, 세상에서 난도질 당한 이들에게 위안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지막 때에는 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 마저도 쫓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고 살리시는 분으로서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의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결과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고발 당하는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6장 16-30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28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
(우상 숭배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
불순종은 다름 신에게 종속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종이든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다.
불순종의 문제는 아담에게서와 같이 처음에는 유혹, 그리고 그 다음 결과는 다른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순종은, 우선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사로 드린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성경 구절이 없다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거부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금식 하신 후에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서, 율법의 요구인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것이다.
예레미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이미 유혹받은 자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사단에게 종속되는 행동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아서에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유혹받아 사단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오직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하는 인생임을 가르쳐준다.
(순종은 들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종이다(24, 2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순종을 기대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서 오는 결정은 불순종일 뿐이고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듣는데서 오는 순종이었다.
불순종하는 이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현대 첨단 문명의 기기들을 통하여 제공해주는 지식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준다.
첨단기기가 삶을 윤택하게해주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불순종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한다.
도구 자체가 악은 아닐지라도 악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간이 쉽게 스마트 폰에 중독된다는 것도, 스마트 폰의 기능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에게 우상 숭배의 길을 열어주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첨단 기기에 의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인간이 개발한 첨단 문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제공해주고있다.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며,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서, 최고의 지성이라 자는 이들이 가득한 현대인들도 우매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의 삶의 환경 가운데서 발생하는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모든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설명되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20절)
인간은 자신이 인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유다 백성들이 조상들보다도 더욱 악을 행한 것과 같이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의 심도를 더해가게 되어있다.
문명의 발전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우상 숭배하는 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내어버려진 이스라엘의 종국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현대인들에게 임할 종국은 악마적이고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순종하지도 않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려는 민족에게 외치는 말씀은 심판에 대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는 부정적 상황의 위협이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표시라고 보아야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어쩔 수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부터 길이 열리게 되어있다.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대 문명은 창조적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이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고 간구도 하지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6장 16-30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
(윤리의 종교가 아니지만 윤리는 열매로서 중요하다)
행위의 열매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신다(3절).
이들이 길과 행위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것은 이들에게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능력이 없는 죽은 자임을 증명해 줄 뿐이다.
행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윤리를 말한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것은, 이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망의 몸에서 자유 할 수 없음을 증명해 줌으로서, 성도를 더욱 겸손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여호와의 말씀은, 이들의 길과 행위가 정도를 넘어서고 있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윤리적으로 실패한 존재이라는 것을 고발함으로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윤리에 기초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말하지만, 인간에게는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능력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볼 수 있는 행실의 문제는 기독교인 들에게도 같을 수 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신자에게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인간이 이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성전이라는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신다.
이는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충격적인 말로서,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올라오는 이들이, 자신들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있지않고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용하여 거짓말을 하고있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교회를 성전이라고하면서 교회당을 신성한 곳으로 만들고서, 목회자만이 제사장인것과 같이 행하고,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면서 예배당 건축을 독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개인의 문제 이전에 목회자 전체의 문제인 것은,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서 교단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책임은 공동체적으로 있기에,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도,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말이 보편화되어있고, 우매한 성도들에게는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선언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재앙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는 전부 거짓 목회자라고 보면 틀림이없다.
이러한 이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악한 이들이다.
기독교는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의와 욕심을 이루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가나안- 영원 무궁토록 준 땅)
가나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조건은 말씀의 순종과 이에 따른 행위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 아래 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의 결과였다.
불순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난한 자, 즉 이방인, 고아, 과부, 무죄한 자들을 압제하는 일은 긍휼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덴과 가나안은 은혜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곳이다.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된 상황은 한국의 교회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 역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교회가 외적인 건물과 조직 위주로 형성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들이다.
참된 교회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무형의 교회이지 외적인 성전이 아니다.
성전을 강조하는 것은 건물과 조직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중심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외적인 조직으로서의 규모를 추구하게되면 이곳에서는 세상의 온갖 악들은 다 나타나게되어있다.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세상 복을 위해서…...
교회는 외적인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 임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그나마 이러한 일들을 줄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인간이 구원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이다.
(실로- 하나님의 생명 나무가 심겨졌으나 인간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실로는 쫓겨난 아담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도,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외적인 자부심으로, 내적인 빈곤을 경험하였던 곳이다.
실로에서의 패망은, 인간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부적과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욕심으로 대체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고, 혹은 쓰임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쓰임 받고 언제나 버림받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겸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1)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예레미야 6장 16-30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