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3:01

예레미야 17장 19-27절 말씀 묵상


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23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26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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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안식일을 거부하는 백성들)


이미 보편적으로 율법을 거부한 백성들이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의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는 대조적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에 유다 백성들이 율법을 얼마나 등한시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예레미야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느닷없이 기록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유다 백성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준비시키는 가장 적절한 시기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래도 끝까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마저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참된 안식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24-27, 안식일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궁극적으로 새예루살렘에서의 안식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짐을 지고 들어와서 장사를 하려고 한다거나, 어떤 자의적 수고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시도는 배제되어야만 한다.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예루살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왕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만 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만 보여주었던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에 의하여 안식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던 예루살렘은, 이어지는 왕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에 불순종한 이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했듯이,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했던 다윗의 왕위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실현될 새예루살렘의 모형이며 그림자였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안식의 장소인 예루살렘, 즉 교회는, 예루살렘 바깥의 모든 이들인 이방인에게 열려있는 곳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무거운 자신의 짐, 즉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룩함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 요구된다.



(묵상)


예레미야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다의 피난처요, 안식이신 성소임을 찬양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저주의 재앙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깨닫고나서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레미야의 찬양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얼핏보면 재앙의 저주 후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연결이 안되는 것 같아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안식일에 재한 준수는,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보다는, 율법의 종료로서의 안식을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에 대한 준수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여있으면서도, 이미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를 통해서 언약의 종료를 선언하신 후의 말씀이기에, 율법의 종료와 더불어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 7일에 취하신 안식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요구하셨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기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나안에서는 에덴에서의 상황이 유형학적으로 재연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1:28의 창조 명령은 율법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순종의 요구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능동적 순종이 요구되었던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에 실패하였다.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이미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날 것이 결정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한 순종의 요구는 아니며,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제시되었던 원시 복음(창 3:15)과 같이, 저주 받은 유다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이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는,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나신 두 번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창 1:28의 창조 명령과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그리고 율법의 저주인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안식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유다 백성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죄성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안식에 대한 불순종이다.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지만, 하지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죄악이다.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 못지 않게 안식에 대한 요구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 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가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율법에 집착하면서, 유다 마카비우스를 비롯한, 열성당원들의 성전 탈환을 위한 끈질긴 활동들을 볼 수 있다.


안식이 요구되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은 또 하나의 율법이었기에, 유대의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파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안식에 대한 거부였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최근에 다시 시도되는 제3 성전 건축에 대한 집착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안식에 대한 집요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제 3성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또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다.


유대 성전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유대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반하는 개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의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의 어느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2000년 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안식에 대한 거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기에, 2000년 전의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한 심판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도전 이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참 된 성전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장소인 것이다.


오직 교회만이 안식을 경험하는 장소이기에, 교회는 장사를 하려거나, 아니면 자아를  실현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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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00

예레미야 7장 12-18절 말씀 묵상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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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난처, 성소가 되신 영광스러운 보좌)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재앙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유다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할 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깨닫고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찬양한다.


성소는 피난처, 안식의 개념을 포함하고있다.


태초부터 찬양 받으실 영광스러운 보좌는 유다 백성들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하지만 인간은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실질적으로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권위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과 가까이하기 힘든 어려움은 전부 죄로 인하여 왜곡된 부정적 사고에서 나온다.


가까이 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치 가인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멀리 한 것과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위자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해주시며,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신다.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담감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섭게 권위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스스로 두려워 할 뿐이다.


두려움과 불안, 공포, 스트레스, 외로움, 분리, 혼란들은 다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체질은 아직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자녀이기에,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온 죄의 속성으로부터 자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흙에 기록된 자들)


인생은 눈에 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인생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를 기억했던 자들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를 떠난 인생들에게는, 사는 동안 품었던 수 많은 알들이 품에서 떠나고 더 이상 품은 자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오직 하나님께 기억된 자로서,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참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자에게는 아담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허무한 인생들은 없어질 것을 위해서 살지만, 신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 변혁 운동을 하며, 이 땅의 구속적 문화 변혁을 위해서 힘쓰는 인생들도, 그 문화가 더 이상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인생이 비록 임시적이고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삶 가운데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화는 성도를 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14, 구원자께 의뢰하는 삶)


예레미야는 병들어 있는 자신이 치유받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인생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육신은 피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재앙의 저주를 선포하는 일을 맡았으니, 결코 쉽지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이 없다면,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고통을 능가하는 것이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고침을 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고달픈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15-16,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충실하였지만 이로 인해서 좌절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없이는 인간은 낙담하게되어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한 기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17-18,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


예레미야의 기도는 마치 전쟁터에서 지원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병사의 외침과 같다.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이 세상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도의 삶에서 세상과의 싸움이 없다면 이들은 직무를 유기하는 자일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말씀을 소유해야하고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달받았지만, 모든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말씀은 세상에 던지는 폭탄과 같아서 반드시 반격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군사를 보호해주시는 피난처가 되시며, 적군을 물리쳐주시는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사는 날 동안 성도로서의 맡은바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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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6

예레미야 17장 1-11절 말씀 묵상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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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우상 숭배의 죄)


오늘은 역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된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주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유다 백성 못지 않게 우상 숭배를 하는 이들이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이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발달 만큼이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있다.


유다 백성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 만큼이나, 산업 혁명 이후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다가 양대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가하면, 모든 선악의 기준을 이익에 두고서 판단하는 시장 경제의 원리는 모든 이들로하여금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도시 구조의 특성상 유형적 교회 조차도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교인들을 믿고 의지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인들의 죄는 도시 문명 가운데 우뚝 세워진 건물들 만큼이나 확고하게 새겨져있다.




(2, 우상 숭배의 결과들)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은 가나안에서 풍요를 위한 음란한 제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이곳에서 드리는 제사로서의 남녀의 성적인 결합은, 마치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비가내리고 풍요를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단순한 우상 숭배를 넘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의 자녀들은 부정한 우상숭배의 결실들이었으며, 혈연에 의한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3-4, 긴밀한 관계성의 파괴)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은 마치 자녀나 아내로 부터 당하신 배신과 같을 것이다.


아내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입히고,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하였지만, 이들은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이들을 열심히 쫓아간 간음한 자이며, 집을 떠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진노이었으며, 진노의 불길은 가히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외적인 징계로는, 돌과 같이 단단한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어려우셨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직접 잘못된 결과들을 경험 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 이들을 내어버림으로서 마음 중심에서 다시 돌이키기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신다.



(5-6, 스스로 자초한 저주)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환경으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결과들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궁핍한 모습을 드러내는 떨기나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풍요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의 풍요의 종결을 의미한다.


에덴과 가나안은 순종을 전제로 주어진 복된 환경이었기에, 스스로 불순종을 택한 이들에게는 허락될 수가 없는 땅이었다.


현재의 복된 환경은 에덴이나 가나안과는 비교될 수는 없지만, 에덴과 가나안이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환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건이 주어진 환경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일은 척박한 땅이 아닌, 일반 은총이라는 좋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현재의 좋은 환경은  택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일반 은총을 근거로 유지되는 환경이다.


일반 은총의 목적은 특별 은총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은총 하에 있는 현재의 환경에서도,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환경은 율법 대신에 자연법의 지배하에 있기에,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들의 종국은 버림받은 유다 백성들과 한 가지일 것이다.



(7-8, 복있는 사람)


전자기기도 전원의 공급을 받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인간의 머릿 속에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소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가장 근본된 도리인데도, 이를 실행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정작 자기 욕심, 즉 사단의 알을 품는 것을 즐거워하는 이들이다.


유다 백성들이 보여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은, 아담의 타락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9-10, 부패한 인간의 마음)


부패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옳고 그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것도 다 아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항복하고서, 자신을 더 이상 믿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1, 남의 알을 품은 인간들)


자고새의 경우는 아니지만, 뻐꾸기는 자기의 알을 직접 품지 않고 오목눈이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서, 오목눈이새로 하여금 대신에 알을 품게한다.


오목눈이새의 알보다 알찍 부화된 뻐꾸기의 알은 오목눈이새의 알을 밀쳐내고 둥지를 독차지 한다.


오목눈이새의 둥지에서 어느 정도 자란 뻐꾸기는 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오목눈이새의 둥지를 떠난다.


오래 전에 EBS에서 방영되었던 잊을 수 없는 영상이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직접 키우지 않는다.


유다 백성들이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에서 행하였던 가나안의 풍습은 뻐꾸기 알을 품은 오목눈이새와 다를 바가 없다.


타락한 죄인들이 희망했던 풍요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말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만이 참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


유다 백성들의 역사는 대표적으로 노예 의지를 가진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우상들로 뒤 덮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이 비록 노예 의지를 가지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좀비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사단은 인간을 이용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단의 종 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강한 집착력을 가지고 있다.


좀비 인생은 사단이 심겨놓은 알을 자신의 알인양 열심히 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품에서 떠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이 부패한 인간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


일반 은총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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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4

예레미야 16장 14-21절 말씀 묵상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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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포로의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애굽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더 이상 시내산 언약과 같은 행위 언약의 요구 아래 있지 않고,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없는, 은혜 언약 아래에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유다 백성들이 저주의 재앙과 더불어 바베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종결되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임한 저주의 재앙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어도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이스라엘에 대하여 벌을 내리셔야만 했다.


재앙의 저주로 징계를 받고 뿔뿔히 흩어져 가나안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미 행위 언약이 종결된 상태에 처하게되었다.


유다 백성들이 당해야만하는 재앙과 저주를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즉각적으로 구원을 약속한 원시복음(창 3:15)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도 재앙으로 저주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원시 복음은 에덴에서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면, 예레미아에게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와같이 에덴과 가나안의 유형적 동일성은,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실패를 가나안에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재연시킴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 대한 구원을 성취하시고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두 번째 가나안 입성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준비하는 것이다.


맹세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포로를 귀환시키신 하나님으로 바뀐 것은,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새 언약을 위한  과정이었다.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포로의 귀환이 곧바로 구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1세기 문헌을 연구했을 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실질적인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이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서의 해방과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본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가장 중심되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부차적인 사건일 뿐이다.


새관점의 주장대로라면 역사적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본받아서 살아야한다는 또 다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관점은 행위 언약 자체를 부정하지만,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되기에, 자체적으로 모순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출애굽에서 포로의 귀환으로 바뀐 것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며, 이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의 성취인 것이다.



(16-18, 심판을 통한 희망)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포로의 귀환에 대한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저주의 재앙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시며,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그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이는 심판없는 회복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누군가 대신 죄의 값를 치르지 않아도 재판장의 일방적 선고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될 수가 있다고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하지가 않다.


새관점의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를 일일이 다 찾아내실 필요가 없이 그냥 용서해주시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언약을 근거로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반드시 이행하셔야 했기에, 구원할 자를 위해서 율법 아래에 나신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셔야만 했다.


아담의 범죄라는 행위 언약의 결과물을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에 대한 정리가 있은 다음에야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관계로,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종적 심판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야만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아담의 범죄와 후손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새관점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으로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새관점은 역사적 이스라엘을 아브라함 언약의 결과물로 보고서, 현재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서 최종적 구원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심히 부패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교훈을 얻지 못한 생각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을 율법 아래 둔것은 ,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인가를 교훈 삼아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고자한 것이다,



(19-21, 절망에서 희망으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토해내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근본적인 희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의 재앙이 오히려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앙인들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부정적 상황들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이 앞서겠지만, 부정적 상황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없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음은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할 것이다.


교회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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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3

예레미야 15장 10-21절 말씀 묵상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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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


예레미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였지만, 아무런 보람도 느낄 수가 없었기에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많이 격해져있어서 자신을  낳으신 어머니까지 들먹이고있다.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격혀져가기만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인하여 지쳐가기만 했을 것이다.


선지자의 직책은 세상과의 싸움이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모든 산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신자도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세상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1, 하나님의 응답)


지쳐가고있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 과정이 힘들지만 공동체의 위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12, 북방의 철)


북방의 철과 놋은 유대인의 교만을 깨뜨릴 강력한 금속으로서 깨뜨려져야할  유대인의 완고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완고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더 큰 완고함을 사용하신다.


이는 이미 유다의 불순종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갈 수 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이들을 이방 민족의 포로로 내어주는 것은,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노예로 내어준다는 것과 같기에,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운행되기에,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는 창조 세계의 공동체적 질서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한 부분의 무너짐은 모든 창조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불순종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13, 예레미야의 죄?)


13절의 뜻이 모호해서, 다시 번역해서 해석해본다.


“너희 나라에 만연한 너희들의 모든 죄악들로 인해서, 너희의 부와 보물들을 아무 값없이 탈취 당하게 할 것이다.-NIV번역)


13절은 예레미야 한 개인의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포함된 공동체적 죄로 인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징계를 말씀하신다.



(14. 원수에게 내어줌)


중립지역은 없다.


어린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악한 세력에 귀속되듯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민족은 자유가 아닌 다른 세력에 종속 될 수밖에 없다.


참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참 지유를 누리는 길이다.



(15-17,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완전히 자기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의 응답과  관계없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만을 계속 하고있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핍박하는 자에게 보복을 해달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은 미움에 의한 간청보다는 유다 백성의 심각한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8, 하나님을 불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종 느끼는 감정들이기도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체질적으로 손상된 아담의 자손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경우들이 있다.


예레미야가 바로 이 경우라고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으로서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유다 백성과 다르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기도한다.


기도는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여야한다.


신자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복받는 것에 대한 것보다는,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세상은 심판받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가고있기에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19,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강요 하시기 보다는 설득 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21,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비록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항변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에 오히려 예레미야를 위로하시면서 다시금 예레미야를 굳건히 세우신다.


하나님은 단편적이시거나 감정적으로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에 대한 항변을 견뎌내지 못한다.


세상 권세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항변하는 이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댓가를 치르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  경직되게 만들지는 않는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할 때 세워질 수 있음을 본다.



(결론)


신자의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다.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신자는 비록 힘이 들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처하게되는 공동체적 환경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관계없이 공동체적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지게되어있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변질되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는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대한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동체성으로 인하여 가장 피해를 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파괴한 것이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자기 이외의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본능을 나타내고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아담에 의하여 파괴된 공동체의 회복이며, 신자의 신앙생활은 공동체의 회복에 관여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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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1

예레미야 15장 1-9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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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백성을 멸망의 재앙으로 몰아넣으실 수가 있으신지 항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마음에서는 사랑하시고 아끼시지만,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불순종한 백성에게 이미 내려진 결정을 집행하셔야만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결정을 내리셔야만 했다.


시내산 언약에 순종 할 것을 맹세로 화답한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했고, 가나안에서 추방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불순종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상황의 형태학적 유사성은,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하셔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순종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순종의 문제를 감당하실 것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2-3, 피할 수 없는 불순종의 댓가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결정은 공의에 의한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불순종의 죄값은 반드시 치뤄져야만 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순종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에 죽어야만 한다.


불순종한 유대인들에게 내려진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는, 피할 수 없는 결정으로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 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눈물과 사랑의 표현이며, 신자에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공의에 대한 손상이 없이 죄인을 구원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지만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재판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으로서, 누군가의 보상이나 대신 값을 치룸이 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을 근거로 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의를 위해서 대신 누군가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재판장의 일방적인 용서이기에, 죄인이 의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지가 않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주어야하기에,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최종적 구원을 이루기 위한 행위의 기준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어느 누구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죄인이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되고,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의 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고보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의에 대한 성부의 공의적 속성을 변질시키며, 성자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며, 성령의 구속적 창조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부정하기에,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다분히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각광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유대인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들은 유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기독교에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기에, 새관점에 대하여 아무 생각없이 단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유행처럼 합류하는 것은 심각하게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공의로 집행할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분명하게 감당할 것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신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거짓말하는 것과 같이, 아무런 댓가의 지불도 없이, 일방적인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4, 므낫세의 죄악)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모리 족속을 멸하게 하신다.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징벌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다 왕 므낫세는 이스라엘 성전에서 아모리 족속이 범한 악행보다도 더욱 심한 악행을 행하게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아모리 족속보다도 더 심각한 범죄를 하게한다.


비록 그가 말년에 회개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전에 들여온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들은 유다의 말년까지 지속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에 대한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힘들어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므낫세가 성전에 도입한 가증한 것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유다로하여금 불순종이 고착화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수가 없으시기에,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내신 것과 같이, 유다를 가나안 밖으로 흩어버리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고, 신약 교회의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에, 유대 성전에서의 부패와 같이, 가시적 교회의 부패는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고, 개혁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일단 잘못된 길에 들어선 교회는 부패되고 붕괴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 투쟁하기보다는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세워나아가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 가운데 한 가지 일 것이다.



(5, 여호와의 이름을 짓밟은 므낫세의 악행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루살렘은 다윗성이 있었던 곳으로 성전의 근거지가 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시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되는 곳이다.


므낫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전에 온갖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서 그곳에서 하나님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증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시대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외형적 교회의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온갖 세상적인 방식은 다 도입시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거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 할 수 없었듯이, 목회자의 잘못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이용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인들의 잘못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6, 아담의 후손이 가야 할 길)


유대인들의 악행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절히 말씀하시면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는데도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을 스스로 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고 계신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죄악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7, 불순종에 합당한 징벌)


더 이상 열매맺지 못하는 이들을 흩어 버리실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책임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있기에, 공의에 의한 하나님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한 가닥 회개할 희망까지도 기대하셨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을 근거로하기에, 어느 누구도 불평도 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유대인들의 범죄에 마찬가지로 참여한 자들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설령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할 근거가 전혀없다.



(8-9, 불평할 수 없는 죄인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은 인간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유대인에게 임한 재앙과 같이,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두 다 재앙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이나마 평안을 누리는 것은 일반은총에 의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 하지만, 문제는 부정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잘못된 사고 방식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이기에,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인간들이다.


이 세상은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이 세상이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구원 할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은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단지 누릴 수 있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형벌 안에 있다.


사형을 기다리는 자는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이지, 그 이 상의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마지막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자 일반 은총을 베푸신다.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할 자격만 주어졌을 뿐이지 불평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에 내재해있는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인들로하여금 하나님께 나오도록하는 수단이 되어야한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의 내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기에, 자칫 신자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을 유발 시킬 수가 있다.


신자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을 함으로서 멸망할 자들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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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0

예레미야 14장 13-22절 말씀 묵상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

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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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거짓 선지자들은 다수이며, 이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소수이며, 백성들이 듣기에 불편한 말이라도 있는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


모든 시대가 위기 상황이겠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특별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과연 거짓을 말하는 지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져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의 부패상과 현실의 위기가 과연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기의 상황에서 특히 신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지만, 백성들은 이를 분별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14, 거짓 선지자의 예언)


이 시대에 모든 신자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있지만, 가시적 교회의 영역에서는 성직자에게만 선지자의 직책이 주어진다.


성도는 단지 성직자의 말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어떠한 영역이든지 독점이 될 때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 시대는 특히 성직자들의 거짓 선지자 역할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는 성직자의 역할에서 문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선지자의 역할을 본인 스스로는 외면하고서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성도들의 책임도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모세를 중재자로 선택하였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선포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과 말씀을 두려워 피하려고하는 경향에서 나온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아담의 후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만약에 성도들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소유하고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패는 경험하지 않아도 됬을 것이다.


신학의 영역도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많은 인본주의적 신학자들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데로 말씀을 판단하여 해석하지만,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듣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말씀을 각색하거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칼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많은 부분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30여년을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찔림이 없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경우는, 유대주의적 언약 해석으로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과 인간적인 구도로 바꾸면서, 기독교를 유대교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그에게 예수는 구속주가 아니며 오히려 유대교적 삶의 새로운 본을 보여준 인물에 불과하다.


아담이 상실한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시키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누구나 스스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분별력을 가질 때 거짓 선지자나 거짓 신학자들이 둥지를 틀지 못할 것이다.


(15, 실제적 상황)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한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성경의 역사를 많은 부분 비현실적 원역사로 바꿈으로서 인간의 부정적 성품을 추상적이거나 낙관적으로 보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조심해야한다.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면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지향하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낙관적인 견해를 조심해야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지상적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새관점주의자들을 조심해야한다.


신학이 실종된 가운데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려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해야한다.


현 시대는 진리보다도 거짓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다의 마지막과 너무도 유사한 시대다.



(16. 저주받기에 합당한 백성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 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들도 재앙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죄악에 빠져있었던 것을 본다.


말씀에서 보듯이 아무리 지도자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본인 각자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 시대에 아무리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잘못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듣길 원하는 것을 듣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7, 하나님의 슬픔)


인간은 저주를 미움의 대상과 연관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들을 저주할 수밖에 없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찢기는 아픈 심정을 나타내신다.


이는 사랑한다고 언약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언약을 근거로 한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더라도, 언약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행위 언약에 합당한 결과를 감당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영벌에 처할 자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라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해야만 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슬픔과 딜레마였음을 생각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미움으로 저주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 스스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듯이, 언약이라는 약속을 기반으로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그리고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피흘림의 댓가를 치루셔야만 하는 아픈 마음을 간직하신 분이시다.


(19, 희망이 사라진 유다와 시온)


하나님의 저주는 나아짐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정죄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행위 언약 안에서 약속을 맹세한 백성이기에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


징계하고 평강을 준다면, 그리고 치료한다면, 이는 정죄가 아니라 나아짐을 바라는 채찍이고 언약의 실행이 아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언약 백성으로서 약속에 대한 결과이기에 선지자가 감당하라고 선언한 대로 재앙을 감당해야만 했다.



(20-22,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모든 상황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며,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기 위해서 저주를 내리셔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의 죄악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감당시키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저주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놓는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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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49

예레미야 14장 1-12절 말씀 묵상

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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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가뭄의 징계)


유대인들은 가뭄의 재앙이 분명한 하나님의 표현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고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강퍅한 마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심성이 어떠한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겠지만, 특히 현대인들은 자연의 재앙을 좀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연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모든 현상을 과학이라는 지식에 의해서 분석을 하지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고하더라도 과학은 현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은 물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과학은 현상을 설명해주지 결코 원인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기상 이변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만 결론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여지가 많이있다.


기상 이변이 단지 인간의 문명의 발달에 의한 후유증 차원에서만 해석이 가능할까?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도한다.



(7, 예레미아의 기도)


예레미아는 본인 스스로가 죄악에 대한 고백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이 마땅한 형벌임을 인정하고있다.


예레미아는 형벌을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마땅한 형벌임을 고백하고있는데,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레미아는 그냥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외아들 그리스도에게 친히 담당시키심으로서 형벌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으나 마음이 떠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시다가 떠나신다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떠나시는 것 같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떠남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적인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참된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신다.


교회나 신앙생활의 차원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일 때 하나님은 소망이 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신자가 바라는 참 소망과 구원자되심은 오직 인간의 근원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9, 하나님은 놀란 자와 같거나 무력하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슈퍼스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렸다.


하나님께서는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타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의에 의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시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담당하시도록 하셨다.


인간의 참된 구원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죄악이 드러나고 고발되어야만 한다.



(10, 정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의 마지막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마음에서 하나님과 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있다.



(11, 백성을 위해서 구하는 복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근원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급한 것 위주로 해결할 경우 문제는 반복된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부정적 상황을 직면해야할 필요가 있다.



(12, 중심에서의 회개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냥 때를 쓴다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근원적이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해결책을 원하신다.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 하실 수 있는 문제이다.


(결론)


모든 어려움은 우리에게 단순히 어려움을 극복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의 근원에는 우리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내포되어있다.


참된 신앙은 현상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근원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 회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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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44

예레미야 13장 20-27절 말씀 묵상


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

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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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잘못된 계략의 결과)


원래 아담에게는 창조명령을 통하여 에덴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는데 ,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듣고서 직책에 실패하였던 것과 같이, 유대의 직분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겨놓았던 양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과 우상을 쫓았던 관계로, 결국에는 북방민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그토록 자랑하던 양떼들을 잃게되었다.


애굽과 우상을 의지하는 것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항상 급한 것보다는 중요한 것을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어도 워낙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관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는 유대인들이나 현대인이나 마찬가지이다.



(21-22, 세상을 의지한 결과)


세상을 의지하면 세상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한다.


신자에게는 교회나 가족이나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도 의지의 대상이 되면 우상이 될 수가 있다,


교회에서 우상 숭매가 만연하지만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의지의 대상이 될 때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의지 할 때, 교회가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당하는 수치는 이 세상을 의지한데서 오는 결과물이다.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23, 바뀔 수 없는 인간의 상태)


인간이 악에 익숙해있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원래부터 선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종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의지가 없다.


인간이 행하는 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며,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되며, 인간의 존재는 악마의 좀비일 뿐이다.



(24, 하나님의 흩으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을 근거로 어느 이방민족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던 거룩한 땅이었지만,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유는 한가지, 즉 우상숭배로 인하여 교만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그곳이 있는 인간까지 거룩한 것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교회나 마찬가지다.


교회 공동체의 교인이라고 견고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위치를 견고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의지하여 교만하여졌던 것과 같이, 교회의 규모를 자랑하며, 자신의 직책을 자랑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든든히 뿌리내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외적인 교회를 의지할 때, 바람에 흩날려가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인들도 뿔뿔히 흩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식하여야 할 것이다.



(25, 거짓 것을 신뢰한 결과)


거짓 것은 총체적으로 우상과 일치된다.


교회의 외적인 규모, 안정된 직장, 든든한 재정적 여유, 장성한 자녀들 등등….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에 의지하는 것은 거짓 것을 신뢰하는 우상 숭배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의지하거나 의지할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자는 어떠한 외적 환경에서도 목을 곧게 할 수가 없으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순간, 실질적인 추락이 시작된다.



(26, 심은대로 보응받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애굽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함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제시킴으로 하나님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 유대인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셔서 그들로하여금 수치를 당하게하신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교회도 수치를 당할 때가 올 것을 염려해야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그를 구해주실 것이다.



(27, 오랫동안의 간음의 결과)


유대인들은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더러워진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실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미 간음에 길들여져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위치에 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


문명을 거부하는 아미쉬들도 스마트폰에서는 자유할 수 없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제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 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결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해야한다.


교회공동체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가 교제하는 것과 서로 힘이 되며 의지 할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르다.


교회 공동체가 의지의 대상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 공동체에 종속되게되며,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우상으로 전락되며 교회 공동체로 인하여 수치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문명의 기기에 의존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환경을 조성해가고 있다.


이럴 때 일 수록 더욱 경계하여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겠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 2017. 12. 29. 12:42

예레미야 13장 12-19절 말씀 묵상

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6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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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악에 잔뜩 취한 자들)


should be filled with wine


I am going to fill with drunkenness


#채워져야할 포도주 대신에 어둠이 채워짐.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에게 어둠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자들은 온갖 재난과 재앙에 휘말려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리면, 유대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자신들의 죄악에 취하여 서로를 상하게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를 말한다.


아담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책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에덴 공동체에서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로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에 취하도록 내어버려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자신의 형상을 거두어 가심으로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시면 그동안 그들 가운데 억제되었던 죄악이,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날 뛰게 되어있다.


그 결과 공동체는 붕괴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14, 공동체의 붕괴)


14 ‡ I will smash them one against the other, parents and children alike, declares the LORD. I will allow no pity†or mercy or compassion†to keep me from destroying†them.’”Threat of Captivity


#하나님께서 주시는 파괴는 결과적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에 대한 위협이다.


구조는 남아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의 충돌이 아니라 완전히 구조 자체를 없애는 걷어냄이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되는 공동체는 부자지간이다.


부자 사이에도 충돌이 있어 서로 상하게 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일반은총 마져도 거두어 가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기본적인 질서가 유지되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담의 후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게되면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파괴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주어진 좋은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유대 공동체와 같이 서로에 대한 파괴적인 본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5,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

15 ‡ Hear and pay attention, do not be arrogant, for the LORD has spoken.†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끝까지 교만하고 건방진 백성들에게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


#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의 지독함을 보여준다.



(16, 마지막까지도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의 싸움?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사단에게 드리는 반역 행위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에게 하나님의 귀한 것을 가져다 바친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당연히 생각하며, 감사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한다.


욕심을 쫓는 것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이 높아지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취하는 영광은 사망의 그늘이며, 어둠이기에 인간의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17, 마음을 얻지 못하신 하나님)


17 ‡ If you do not listen,†I will weep in secret because of your pride; my eyes will weep bitterly, overflowing with tears,†because the LORD’s flock†will be taken captive.†


유대인들에게 대한 간절함은 그들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오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이 묻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끝까지 원하신다.


유대인의 우상숭배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사랑하는 자로부터 받는 배신감과 상처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비통에 잠기신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취하는 도둑질이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 축복을 자기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교만은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하는 악한 행위이다.


교만은 주신 자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배은망덕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에 대한 상실의 마음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는 것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시다.


아담의 후손인 죄인들은 사랑과 눈물에 대하여 진실된 감각이 없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하지 말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렇게까지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



(18-19, 제거된 면류관)


18 ‡ Say to the king†and to the queen mother,†“Come down from your thrones, for your glorious crowns†will fall from your heads.”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기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였으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는 자리였다.


왕으로하여금 보좌에서 내려와서 왕관을 벗으라고하는 것은 한 개인에 대한 자격 박탈 일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이기도하다.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좋은 환경을 교만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인간은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은 주신 영광을 도로 찾아 가신다.


중세 시대 교황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조금만 틈만 보여도 높아지려고한다.


교회의 영역은 절대로 자신이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풍요할 때 감사하고 교만하지 말아야한다.


교회에서 장사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


(19. 내려진 막)


19 ‡ The cities in the Negev will be shut up, and there will be no one to open them. All Judah†will be carried into exile, carried completely away.


무대 공연의 종료를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선언이시며, 인간이 다시 시작 할 수가 없다.


아담의 후손이 어떠한 지에 대한 절망을 보여준다.



(결론)


산자는 신자이기 이전에 아담의 후손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부정적 상황 가운데 죄가 고발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야한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정적 상황을 불평하기 이전에, 부정적 상황에는 사랑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심정이 내포되어있음을 생각하여야한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긍정적 환경을,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의 도구로 사용하지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신자가 행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눈물로 돌려드리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해서는 안된다.


비록 거듭나지 않은 신자가 함께하는 외형적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기 위해서 신자는 목을 곧게 세워서는 안된다.


직분자의 직책은 섬기는 직책이지 절대로 계급장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자신에게는 절대로 자랑 할 것이 없는, 교만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마땅히 처할 낮아짐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높아짐을 담당하고서 낮은 자리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느 인간도 교만하거나 높은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인간이 교만하거나 높아지려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은 세상이기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교만을 허락 할 수 없는 곳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낮아져야 할 죄인이 교만하게 높아질 때는 반드시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이 악한 세대는 힘과 권력과 명예와 높아짐의 시대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제 불능의 죄성


#-인간은 누구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두드린다고 하더라도 열려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인간은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를 말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신다.


욕심에 이끌려 세상 것을 의지하는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나라가 북한 핵문제로 인하여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듣기에 너무 하나님을 멀리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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