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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9장 1-19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8장 1-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6장 14절- 7장 10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6장 1-13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5장 1-14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4장 1-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3장 7-15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2장 19절- 3장 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스더 2장 1-18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비전)
바울의 사도직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며, 바울은 단지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한 것 뿐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전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자기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기의 일일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의 비전을 품었지만,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 가운데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의 일인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성추행 물의를 일으켰던 J 목사가 항상 외쳤던 말은, 젊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비젼을 품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식이고 인간의 욕심이며,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경우와 같이, 철저히 인간적인 꿈과 인간적인 자만과 인간적인 능력이 무너지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서 할 수 있다.
유명한 신학자들과 저명한 목사들이 나름대로 성공하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이들의 학문과 목회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은 보편화 될 수 없는 소수를 위한 것이다.
참된 신학과 참된 목회에는 성공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가 없다.
신앙의 영역은 꿈을 이루거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생각해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 가운데 하나는, 담임 목사가 강대상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바울을 목사라고 칭하면서 목사의 직책을 사도와 동등하게 만들면서, 강대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 혼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목사들을 대상으로 목사교를 만드는 훈련과정에서 배운 이들이 공공연하게 써먹는 방법이다.
결국 교회는 내전을 겪었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많은 성도들이 난민이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칭 사도라 칭하는 목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악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사도라는 용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이기에,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에, 이미 말씀이 주어진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자칭 사도가 될 수는 없다.
만약에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의 말을 덧붙이는 자로서, 자신이 이단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지 29장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명칭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도의 신분을 말해준다.
백성은 왕과의 관에서 친밀감의 한계와 관계성의 막연함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용어는 사용해도 자녀나 아버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새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의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이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역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속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으로서 삼위 하나님의 긴밀한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만 참여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렇다고 성도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성도에게 주어졌다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등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퀴리오스)는 어디까지나 종이 주인에게, 혹은 신하가 상전에게 사용하는 용어로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위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종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서 부르지 않고, 자신과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는 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축복으로서 성도로서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평강)
평강은 전쟁이 그친 잠시동안의 샬롬의 상태를 말한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
평강은 계속된 영적인 전쟁을 위한 막간의 휴식이며, 충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삶을 충전하지만, 성도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주일 예배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평강 가운데 한 가지다.
주일은 성도가 누려야 할 평강의 날이다.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모인 교회의 성도는 어떠한 세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는 주일에 모인 성도들에게 평강의 시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릴 권리와 자격을 주셨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과 성도가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조는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에 머무를 수 있는 구조다.
새관점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율법이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머무른다는 것은 이미 구원의 구조 안에 들어와있다는 말로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어도 성립되는 구조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로 인해서 은혜 안에 머무름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는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준 모델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의해서, 택함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이라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기 전인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로 보는 새관점은 신령한 복으르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이기에, 구약의 소수의 믿음을 가진 이들 이외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창세 전 영원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요구되지 않는다.
창세 전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신 이들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을 받은 이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성도가 받는 구원은 현재적 환경에 의한 즉흥적인 구원이 아니며, 성도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도 아니며, 오직 창세 전에 미리 계획된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근거로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찰스 핫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언약적 연합federal union이 성도의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실제적 연합actual union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J. V. Fesko, loc1995)
택한 자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흠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 가운데 결정된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성자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의 중심에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의 중재자가 되신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미 창세 전에 택정함을 받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도 없고 무흠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는 중재자도 아니시며,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는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출애굽한 유대인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유대이스라엘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언약적으로 연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의 중재자로 보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받은 은혜를 행위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려고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육신이 되었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만큼 거룩하고 무흠할 수는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신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새관점의 논리에서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따름의 본을 보여주는 유대 혁명가일 뿐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을 손상시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이단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손상시키는데까지 이르게된 것이다.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택한 자를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하심은 창세 전에 있었던 구속 언약의 내용이다.
구속 언약은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된 세분 하나임 간에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약속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예정된 택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며, 택함을 받은 예정된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이다.
(기쁘신 뜻)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정적 개념에는 자칫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따스한 성품이 결여되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건을 자녀에 대한 학대라고 표현하기도한다.
하지만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신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은 마치 아이를 낳기 위하여 준비하는 부부와 같이 기쁨 가운데 준비되어진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낳게 될 아이에 대한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한 산모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의 그림자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진 것도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잉태의 고통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아이가 갖는 자존감과 같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비천하다고 하더라도, 자존감까지 손상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허무하거나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삶을 결코 헛되게 살아서도 않되며,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구원받은 자이기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가장 부요한 자이다.
(우리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있는 이들은 모든 이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레위 자손의 제사장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도 아니며, 오직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시고 중재자가 되심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서 구원에 참여된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된 이들은 모두가 아니며, 유대 이스라엘도 아니다.
모세는 중재자였지만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제2성전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택함받은 자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제2 위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만린 구원론적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오직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하심)
성도에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계획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부패한 자가 자기 길을 가도록 내어버려두셨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패를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간섭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에정론을 거부하는 이들은 아담의 타락에도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함이 있는 차를 리콜하듯이, 아담의 타락에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기에, 이에 대한 후속 대책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그렇다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책임이 있으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간섭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아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였다.
인격적 존재의 결정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기에, 자신이 선악과를 먹고자 결정했을 때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속성의 상실을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유 의지가 없는 사단의 종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단에 종속된 존재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타락하여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심으로서, 주의 기쁘신 뜻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인도를 하신다.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행함의 결정권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노예 의지 상태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인간의 행함과 공로에 영향을 받으셔서 그들의 행함을 보시고 구원을 결정하시지는 않으신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구원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지만 이는 모두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상반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한 반발이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행함으로 유지함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행함으로 완성시킨다는 인본주의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과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거부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은 영원 가운데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심으로 성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다.
영원 가운데 예정된 성도는 이미 영원 가운데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federal union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경륜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연합actual union이 일어난다.
이 모든 일은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메시아이신 성자 예수님께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자는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인간의 주제적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키는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성경의 모든 구속적 경륜은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기에, 영원 가운데 아들로 지명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없다.
새관점의 문제는 인간의 구속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행동의 본을 보여준 혁명가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떠한 논리도 영원 가운데 맺어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하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스스로 교만한 자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아들들이 됨)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7-8)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삼위일체 개념에 혼돈을 가져오기도한다.
인간적인 생각에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보다도 한 단계 뒤이기에, 시간 상 아버지만 존재하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태어난 자라면 성부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기에, 창조된 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결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지명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셔서, 둘째 아담으로 모든 택함 받은 자의 맏형이 되셨지만,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음은 전적으로 택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은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비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 가운데 약정하신 구속 언약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음을 말하고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처음 아들인 아담을 대신하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아들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오셔서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부 하나님은 처음 아담의 아버지이셨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더 이상 육신이 된 인간의 아버지가 되실 수가 없으셨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시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지배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아들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하여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더 이상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불순종한 아담이 낳은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일 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했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표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세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된 성도들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이 육신 안에서 경험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유산을 물려주는 일들은 육신에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식 이외에는 존재를 기뻐하고 유산을 물려주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아들 삼기 위해서 기쁨 가운데 구원하시는 고통을 감당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면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이가 부모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가 없다.
아이는 태어났다는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 되며,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기쁘게 달려가는 아이가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면 된다.
부모가 자신을 기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부모를 충분히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자녀와 같이, 아무 공로도 없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마땅히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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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9장 1-19절 말씀 묵상
1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2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고
3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4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5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6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
7 또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8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아리다다와
9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다
10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아뢰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한 시행하겠노라 하니
13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15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7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19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
부림절은 유다 민족의 승리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림절 행사를 하면서, 이 날만은 맘껏 취하면서 유다 민족의 승리를 만끽한다.
부림절이 유다 민족의 민족적 승리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부림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자들로 규정하고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면서, 부림절에 대하여 부정적 표현을 하기도했다.
마치 부림절이 기독교를 거부한 유대교의 병패를 낳은 것처럼…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부림절이 전하고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현재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부림절이 진정으로 전해주고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부림절은 유다 민족의 승리 이전에 사단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해주고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원시복음(창 3:15)을 통해서 사탄이 패배할 것을 말씀하신다.
에스더서를 통해서 전해주는 하만의 패배는,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세지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유다인들이 대적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단지 그들의 재산에 탐을 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전해주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방인들의 재산은 우상 숭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아간이 숨긴 시날산은 매소포타미아지역의 우상숭배 산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유다인들이 대적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단일함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유다인이 승리를 자축한 부림절은, 유다인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는 인간이 공동체적인 존재로서, 누구의 권위 아래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림절이 유대 민족주의의 승리라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살인이 될 것이다.
히틀러는 연설에서 “유대인은 하룻밤에 페르시아인 7만 5천 명을 난도질했다. 만약 독일인에게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유대인들은 독일에서도 새로운 부림절을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유대 민족주의로서의 부림절을 비난했다.
부림절은 민족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이해되어질 때,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을 준비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약하고 연결되지 않는다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부, 성자, 성령, 사단으로 비유한다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하수에로 왕은 결코 성부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인물이다.
왕과 왕후와의 관계를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묘사하면 부적절하다.
전혀 적합하지 않은 배역이다.
하지만 에스더서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유다민족의 승리와 하만의 패배는,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단의 패배와 연결될 수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역사적 사건 가운데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물들로 한정되어야하는 한계가 있지만, 에스더서에서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단의 패배를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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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8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 날 아하수에로 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아뢰었으므로 모르드개가 왕 앞에 나오니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준것은, 정복당한 자의 영역이 정복자의 영역으로 귀속됨을 의미한다.
사단의 몰락도 마찬가지로 사단이 관리하던 영역이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세상은 왕권에 의한 영역의 선포로 인하여 왕에게 귀속되지만, 현대는 왕권에 대한 개념을 배제하려고한다.
그리스도께 패배한 사단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
이 세상은 오직 두 가지 왕국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대상이 되는 왕국이고, 또 하나는 구속의 영역이 아니지만 단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한다.
2 왕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니라
하만이 제거된 이 땅에서의 왕권을 모르드개가 주관하게된다.
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실행자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이 땅은 성부 하나님의 통치권을 성자 예수님이 회복시키심으로 인하여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관리가 된다.
물론 모르드개를 성령에 비유하면 안된다.
하지만 에스더서는 왕과 에스더 모르드개, 그리고 하만의 역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회복될 이스라엘을 예표하고있다.
3 에스더가 다시 왕 앞에서 말씀하며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아각 사람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 한 악한 꾀를 제거하기를 울며 구하니
4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 규를 내미는지라 에스더가 일어나 왕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간구와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
사단이 하늘에서 추락을 했어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죽임을 당하게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최종적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된 자들을 위한 대속적 죽으심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음부에서의 고통은 죽은 성도를 위한 하나님께 대한 간청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왕의 금규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주시기로 확정하셨다는 표시이다.
5 이르되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나를 좋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6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하니
7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매달렸고 내가 그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8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왕의 조서가 어떻게 변경이 될 수 있는가?)
왕의 조서는 변경될 수 없지만, 대신에 유다인을 치기로 한 자를 멸할 수 있도록 또 다른 왕의 조서를 내렸다.
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죽는 것이 취소되지 않는 것과 같다.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철회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의 저주를 피해갈 수 있는 대안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이루신 보혈은,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문설주의 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하나님의 행위 언약이 철회된 것이 아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물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행위 언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마치 왕의 조서가 철회된 것과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율법의 저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에는 만인 구원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앖다.
칼 바르트나 톰 라이트 본인은 부정하지만, 이들의 신학은,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국 만인구원론적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언약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맺어진 것이기에 절대로 철회될 수 없는 것이다.
왕의 양식은 철회되지 않았고 모든 이들에게 유효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하여 마귀를 멸하지만, 마귀는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자들은 결국 완전히 죽일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을 이들을 피해갈 뿐이다.
9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백이십칠 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와 유다인의 문자와 언어로 쓰되
10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그들은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
왕의 조서는 전달하는 자가 있어야지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은 복음을 전파하여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제자들에게 명령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신자들에게 효과가 있다.
11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12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13 이 조서 초본을 각 지방에 전하고 각 민족에게 반포하고 유다인들에게 준비하였다가 그 날에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한지라
14 왕의 어명이 매우 급하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라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이방 나라에서 영화롭게된 유다인)
어둠의 세상 주관자가 지배하였던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하여 성도들이 높임을 받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있어야만 했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성도는 불신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야한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기초로한 선교적 교회(미셔널 처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페르시아의 유다인이 페르시아를 유다백성의 국가로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둠의 세력들이 가득한 이 땅은 결코 하나님의 구속적 나라가 될 수는 없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변화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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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
하만의 몰락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죽음의 문제)
유대인들은 부림절이 되면,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하만과 모르드개의 상황의 역전에 축배를 들면서, 취하도록 마시며 축제를 즐긴다.
상황역전은 인생 모두에게 승리감을 전해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부림절을 금했으며, 오히려 부림절과 관계하여 더 많은 핍박을 가하기도하였다.
만약에 페르시아에서 모르드개와 하만의 상황의 역전이 없었다면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왜 하나님께서는 히틀러에게서 유대인들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을까?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하나님과 부림절에서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 아니신가?
왜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해놓고서, 왜 구해주시는가?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읽고 즐거워하는 유대인들이 그냥 단순하게 즐거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부림절은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한낱 인간적인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부림절과 같은 역전을 희망해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마땅한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역전은 누가 더 정의롭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다 죽음이라는 운명에 직면한다.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고 누구는 수명을 다하고 죽고, 누구는 편히 죽고 누구는 비참하게 죽고, 누구는 정의롭게 죽고 누구는 억울하게 죽고…..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지만, 어떠한 죽음이던 간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하다.
다양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죽음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죽음이다.
죽음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문제는, 사는 동안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느냐, 아니면 영원한 분리로 확정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사단의 패배)
하만이 몰락하는 상황은 사단의 패배와 유형적으로 유사하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시던 장면이 연상된다.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간청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함인 것이었다(요6:39).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에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다.
마치 왕후 에스더가 왕의 지위와 권력으로 하만을 직접 징계 할 수도 있었지만, 에스더는 왕에게 간청함으로서 왕이 직접 하만을 처단 할 수 있도록하였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와 유혹을 물리치심은 사단에 대한 승리로서 사단의 추락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예수 그리스도께서 70인을 세우시고 각 지역과 동네로 둘씩 앞서 보내신 후에, 70인이 귀신들도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광야에서의 시험과 유혹에 대한 승리로 귀신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상황의 역전으로 나무에 달린 하만은, 마치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사탄과 같았을 것이다.
사탄은 에덴에서 아담을 시험하여 선악과를 먹게함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사탄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로 유혹을 하였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예수님께 패배를 당하였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에서의 아담과는 달리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을 하신 후에 자신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첫 번째 아담에게는 통치명령이(창 1:28) 주어졌으며, 통치 명령의 대상에, 간교한 뱀을 포함하는, 모든 생물(창 3:1의 들짐승의 짐승과 창 1:28의 생물은 같은 용어)을 다스리라고하였지만, 아담은 오히려 생물인 간교한 들짐승의 다스림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사탄은 더 이상 예수님을 유혹할 수도 없었고, 지배할 수도 없었기에, 이 세상 권세자로서의 위치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이 왕을 속였듯이 사단은 속이는 자로서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거짓말을 하였지만 그의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고있다.
현대인들은 환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진리인 것은 말씀만이 참된 구원을 전하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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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6장 1-13절 말씀 묵상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눈을 가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눈을 밝히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시면 아무리 간단하고 쉬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신다.
왕의 행동은 자신의 자아가 신적 섭리에 종속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섭리를 통하여 주관하신다.
3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4 왕이 이르되 누가 뜰에 있느냐 하매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우연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우연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섭리를 대체하는 개념이다.
이와같은 우연이라는 상황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에 빠진 요나를 위하여 물고기를 준비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동물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주관하신다.
세상에는 우연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이다.
5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들어오게 하라 하니
6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착각)
하만은 분명히 착각을 하고있지만, 착각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희망이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은 허황된 것이지만, 이러한 허황된 희망이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가 없다.
어찌보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나 아무 희망을 못느끼는 사람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씀 안에서의 소망이 제거된다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아무런 의욕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착각이 일반 은총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일반 은총은 구원이라는 특별 은총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오직 허무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8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9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자)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사람과 높임을 받는 사람이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은 높임의 근거가 자신의 욕심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높임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람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존중을 받아야한다.
권력의 탈취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가 아니라, 단지 도적질이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악일 뿐이다.
세상 권력에는 이 두 가지 유형이 있지만, 목회자에게도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이 적용된다.
인간적인 세습이나, 정복자마냥 자기 파워로 교회를 장악하는 사람이나, 사람을 속이면서 자신을 우상화시켜 목사교를 만드는 사람이나, 복음을 윤리나 도덕으로 변질시켜서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케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교인들을 희생시키기에, 교회에는 커다란 재앙이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하만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게되면, 재앙이 올 수 밖에 없다.
10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11 하만이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
(역전당한 하만)
하만의 추락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메단 사단의 추락을 연상시킨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가룟인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를 팔게하고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인 것이며, 모르드개를 높인 하만과 같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스스로가 행한 것이다.
사단은 귀신같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에는 따라올 수 없다.
성도는 감정적이고 육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12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13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말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의 아내 세레스가 이르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아무리 악인이라하더라도, 상식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원리는 자연법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은총과 자연법은 어떠한 암흑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드러낸다.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마음에 있기에, 한 가닥의 희망을 갖고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하심과 섭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획을 하셨을지 알 수가 없기에, 미리 단정을 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장 하찮은 미세한 먼지가지도, 심지어는 불규칙한 무수한 움직임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완전하게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연은 오직 사람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우연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편의상 갖다 붙이는 말이다.
섭리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영원한 작정과는 구별된다.
섭리는 작정하신 일을 피조물의 시간과 공간에서 실행하시는 외적 행위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돌아가는 현상을 마치, 시계공이 만든 시계가 만들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더 이상 조물주의 간섭이 없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물 가운데 계속적으로 관여하심으로인해서,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고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경 시대에 한정되지 않고 지금 이 시대에도 지속되며, 성도들의 삶 가운데 깊이 관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특별한 성도에게 이차적으로 위임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시며,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실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목적을 섭리를 통하여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감독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속적인 통치자이시고 보존자로서,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는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말아야하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한다.
섭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 속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좌우되기에, 우리의 존재와 행동은 하나님께 의존될 수 밖에 없다.
이는 성도가 기도하여야하는 이유이다.
당장은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너무 많은 것을 알게되면 이를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오히려 부족함에 감사하여야한다.
섭리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한탄과 후회는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섭리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선택은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알미니안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의지와 동기가 하나님의 섭리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섭리의 은혜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사람의 행할 의지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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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5장 1-14절 말씀 묵상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금식을 마치고 왕앞에 나아감)
금식을 하면 오히려 힘도 없고 혈색도 안좋고 기운도 없어서 왕 앞에서 제대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을 텐데 에스더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수산 성의 모든 유다인들에게 삼일간의 금식과 기도를 부탁한 것은,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식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겪게되는 어려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이기에, 인간적으로 힘써서 해결 될 수가 없다.
신자가 취하는 삶의 방식은, 자신의 힘보다는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왕후의 예복)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은 것은 왕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성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분만이 가능하다.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으신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지 않다면, 속죄 사역은 불가능 할 것이다.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에스더는 뜰에 선 후에 금 규 끝을 만짐으로서 죽음을 면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도 거룩함이 없이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보좌에 앉히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셨다는 표시이다.
에스더에게 내민 금규는 왕의 용납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한을 나눌만큼의 지위와 권력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제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능력으로 성도를 위해서 새 창조를 이끌어 내시는 것과 같다.
왕과 왕후와 모르드개의 위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에 비유 할 수는 없지만, 이와같은 상황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 땅에서의 역할극으로서 연출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왕과 동시에 하만을 초청한다.
그의 위치는 왕과 하만을 초청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간 것은 하만의 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듯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죽이고자하는, 사단의 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만은 왕과 함께 초청됨으로서 모르드개와, 더 나아가 에스더를 함께 멸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회에 참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제껏 마음대로 세상을 휘둘렀던 사단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일 생각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패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자기가 죽인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10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
11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12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13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하니
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모르드개의 착각은 사단의 착각과 유사하다.
유다인들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함으로 자신이 승리하리란 착각을 하게된 것이다.
왕과 왕후와 모르드개, 유다인, 그리고 하만의 역할은 성부, 성자, 성령, 성도, 그리고 사단의 배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개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많은 부분 유사성을 띄운다.
왕의 절대 권력과, 사랑받는 자로서의 에스더의 깊고 지혜로운 처리방식,고통 가운데 슬피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모르드개, 막연하게나마 고통 가운데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유다인들,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진 하만의 역할이 극이 아닌 실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이러한 일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심은, 유다인들에게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알리고자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위로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나가는 말- 서있는 자의 교만)
하만은 즉석에서 결과를 보고자하지만, 에스더는 하나님의 간섭하시고 역사하심을 참고 기다린다.
하만은 표면적으로 일을 진행하지만, 에스더는 깊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한다.
하만은 보이는 상황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지만, 에스더는 보이지 않게 겸손함으로 내실을 기한다.
사단은 단수가 낮지만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단은 하나님 보다 한참이나 하수이지만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모른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겸손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자랑한다.
더더욱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다.
기도는 자랑할 수 없는 것이며, 더군다나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페북이나 SNS로 장사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장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사람에게서 인정받으려고 온갖 좋은 것은 다 동원한다.
페북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장사하는 사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다.
하만이 자신의 정당성과 마음에 불편한 것을 공개적으로 떠벌인 것에 비해,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잠잠하였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사람일까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페북으로 장사하는 사람 가운데는, 하만과 같이,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테러를 가하기도 한다.
자신은 정당한데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정당화하면서까지, 비판하는 사람을 공개 처형하는 사람은 겸손하다고 할 수 없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공개 처형하지는 않는다.
페북에서 특정인을 공개 처형하는 사람은, 마치 하만과 같이 자신의 자존심에 손상을 가한 모르드개를 공개 처형하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이는 하만이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면서 정작 마음에 안드는 모르드개를 해할 궁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거나 공격을 당할때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지는 않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복수하는 것도 모자라 장대 높이를 20m보다도 높게 달아서 수치를 주려고하는 것과 같이, 공개적으로 얼굴에 먹칠을 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사명인양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른 이들의 부족한 점들을 애통해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한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상황을 들추어내면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은,부정적인 상황이 없다하더라도 찾아가면서 부정적 상황을 들추어낸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 상황을 먹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하는 일의 성격이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상대방의 부정을 통한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정죄하는 일이 없으면 자신의 소재가 없어진다.
이들은 가끔 자신에게 비판의 목소리가 가해지면 이를 참지 못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상대방을 공개사냥 해버린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끊임없이 정죄를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구약의 한계점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방식이다.
신약에 속한 사람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금식하여야한다.
금식은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방법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만에 대하여 시위를 하거나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다.
왕을 초대한 에스더는 그 다음날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 알지를 못했다.
왕이 예전의 기록을 듣게될지도 알지 못했고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을 줄도 알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을 금식하며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란 확신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교회가 변하려면 더 이상 정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끊임없이 죄가 고발되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차이가 있다면, 죄에 대하여 처리하는 방식이다.
구약은 율법의 정죄에 놓여있지만, 신약은 용서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에,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해서 정죄 할 자격이 없다.
할 수 있다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뿐이다.
상황이 심각하면, 에스더가 수산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식하면서 기도에 동참하길 원했듯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이를 지속적으로 시행해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인간이 힘을써서 상황이 개선된다면, 이는 인간의 공로가 되며, 인간이 힘쓰는 방식이 점점 더 심해지며,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모든 부정적 상황에 앞서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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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장 19절- 3장 6절 말씀 묵상 (0) | 2017.12.29 |
에스더 4장 1-17절 말씀 묵상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옷은 여러가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구원의 상징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사장의 의복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희망을 구체화하기도하였지만, 옷을 찟고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는 일종의 절망과 좌절을 상징하면서, 구원보다는 심판에 의한 음부로 귀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모르드개는 옷을 통하여 상황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함으로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사에서 유다인의 상황은 실제적이어서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종말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황은 유다인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첨단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현대인의 심각한 상황을 드러낼 마땅한 수단과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다.
더군다나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에는 위기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금식은 단식이나 투쟁과 구별된다.
단식은 투쟁이라는 개념과 연개되며 약자의 시위 방법으로 사용된다.
금식은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며,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간구하는 표시이다.
유다인들의 금식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해야한다는 구원 개념과 관계된다.
비록 바사에서 유다인의 구원의 방법이었지만, 성도에게 요구되는 믿음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은 더 이상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 의지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금식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금식은 단순하게 식사를 안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더 이상 힘을 쓰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이면서 동시에 생사를 주께 맡기겠다는 표시이다.
에스더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구약의 이야기라고들하지만, 에스더서에서 유다인의 구원의 과정과 방법은 많은 부분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을 볼 수있다.
금식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모르드개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있는 상태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왕후 에스더에게 어떠한 상황인지를 전달한다.
모르드개는 그냥 에스더를 면회하면서 상황을 전달 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앞으로 에스더가 어떠한 방식으로 왕 앞에 나아가야 할지 본을 보여준 것이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의 지혜와 명철함을 볼수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로 인하여 생길 앞으로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모르드개는 단지 인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며, 오기나 용감함이 앞서서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로서 분명하고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을 가진 지도자의 면목을 보여주고있다.
이 시대에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스스로의 사명감으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과 우유부단하게 타협하면서, 적당주의로 타협해 나아가는 것을 볼 때 모르드개의 절개있는 행동방식은 분명 본받아야 할 행동방식이다.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죽으면 죽으리이다)
종의 생명은 주인에게 권한이있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금식은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면서 목숨까지도 주께 맡기는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각의 표현 방식이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왕에게 나아간 행동은 중보자로서 요구되는 행동이다.
모세는 중보자로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참된 중보자로서 실제로 죽으셨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도있다는 뜻을 그리스도께 고백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최종적 죽음이 집행되지 않은 상태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육을 당하리란 계획을 알고서 애통하고 울면서 금식하였다.
구원은 인식의 출발에서부터 온다.
이스라엘과 유다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의 죄가 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였기에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결국 최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르드개와 유다인이 바로 왕에게 나가지 못했을 때 왕후 에스더의 역할이 필요했듯이, 성도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불결한 존재이기에,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란 생각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죽으심으로서, 구원을 이루셨다.
성도는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를 인식하여야한다.
죄에 찌들어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죄에 대하여 너무 무감각 한 것을 본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병폐는 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출발된 것이다.
부자 세습을 비롯하여,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이면서,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우상 숭배를 하게하고,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인간적 목적으로 이용하며, 세상에 나가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인 현재의 상황은, 모두 다 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출발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로 시작된 모든 역기능을 바로 잡으시고, 모든 것을 통일하시어 하나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도록 모든 질서를 바로 잡고계신다.
죄와 역기능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 회복에 찬물을 끼얻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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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3장 7-15절 말씀 묵상
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8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10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11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하만과 왕의 실수)
하만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유다인을 살육할 계획을 제비 뽑은 후에 바로 실행에 옮긴다.
왕의 조서를 각 지방에 배포하면 바로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만은 거의 12개월이나 앞서서 왕의 승인을 얻어서 조서를 배포한다.
이는 하만이 자신의 계획을 철저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유다인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짧았다.
왕도 마찬가지로 하만의 말만을 듣고서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사가 없이 독단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서 왕으로서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악의 궤계는 일반적으로 이와같이 단편적이면서 많은 결점들을 보여준다.
악은 성도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을 해 오지만, 이들의 계략은 대부분 보편성과 객관성이 결여되어있기에 문제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법과 일반 은총으로 인하여, 잘못된 상황에 대하여 결코 쉽게 용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도하지만, 자연법과 일반 은총으로 보편적인 간섭을 하시기도하신다.
악의 계략은 종종 이러한 자연법과 일반 은총의 원리를 무시함으로 인해서 문제를 드러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줄곧 악을 제어하시고 계신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도록하신것도, 좋은 환경에서는 인간의 왕성한 악이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도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하였거나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렀기에 허락하신 징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하신 것도 악을 제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악을 제어하시지만, 악의 번성력은 조그마한 환경만 조성되어도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악의 속성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기 의한 계략이 숨어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속 사역을 차질 없이 진행하신다.
이 땅의 역사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악이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성도는 단편적인 악의 승리에 합류하기보다는 결국 승리하실 하나님쪽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아야만 한다.
12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14 이 명령을 각 지방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15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열두째 달에 시행할 일을 첫째 달에 신속하게 실행에 옮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통제하시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악이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있다.
악은 끊임없는 통제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시행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러나 악은 세상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진행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세상의 악이 허용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을 허락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하만의 계략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유다인의 행동 방식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세상의 불행을 보는 시각은 하나님과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평화라는 이름으로는 하나님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악의 승리를 종종 경험하게되며,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좋은데 왜 인간에게는 힘든일과 불행, 그리고 역경들이 허용될 수 밖에 없는가?
이는 분명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성도가 성경을 보고 깊은 묵상을 하여야만 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결코 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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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장 19절- 3장 6절 말씀 묵상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세세한 부분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않게 한 것은 선경지명이 있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행동을 하면서도 본인 스스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하여 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 수가 없고, 앞으로의 일도 알 수가 없다.
만약에 사람이 앞으로의 일을 알 수가 있다면, 역사는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앞으로의 일을 모르면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일을 알게도
면 그 사람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앞으로의 일을 모르는 것이 은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될 것을 구분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의 역사를 말하고있지만, 구체적인 것은 피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날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징조에 대하여만 말씀하신다.
인간은 여러가지 정보와 지식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미래를 예측하려고하지만, 상황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일보다도 인간이 누구에게 속하여있느냐이다.
인간은 누구를 주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주인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을 아들로 부르시고 상속자로 삼으셨다.
인간은 누구의 종이든지 간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앞으로의 일을 모르는 것이 은혜다.
사람의 미래의 모든 일은 사람의 계획과 더불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 사역의 관점에서 역사를 운행하신다.
인간은 비록 앞으로의 일을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모르드개는 자신이 들은 말을 에스더를 통하여 왕에게 전달했을 뿐인데 이러한 일이 앞으로 유다 민족을 구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할 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지만, 이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막연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섬세한 부분까지도 관할하고 주관하시면서, 어떠한 상황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 없이, 이러한 상황들을 섬세하고 시기 적절하게 사용하시는 모든 상황의 주제이시다.
신자에게는 비록 현재의 삶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우며,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섬세한 부분까지 다 아시고 계시기에, 오직 주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모든 순간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며 살아야한다.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3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모르드개의 절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것은 유대인으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약속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일제 신사참배에서 천왕에게 절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을 연상하게 해준다.
일제 마지막 때에 기독교가 심각한 핍박을 받았던 것은 신사참배를 거절한 기독교인들과도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모르드개의 일로 인하여 유대인 전체를 멸하려는 하만의 계획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다.
결국 하만은 자신의 계략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어야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를 핍박했던 일제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핍박이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핍박하는 자는 순간에는 승리하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진리이다.
어둠의 권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심겨진 유다인의 줄기를 끊어버리려고 안간 힘을 쓴다.
이들의 계략은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고 진행이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사단의 계략에 말려들기 십상이지만, 하나님은 사단의 계락까지도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상황에 휩쓸려 우왕좌왕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된다.
삶은 평탄하거나 위기가 오거나 간에 항상 영적인 긴장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틈을 보면서 성도를 넘어뜨리려고하지만,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지혜를 간구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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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장 1-18절 말씀 묵상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분노와 복음)
분노는 일시적이다.
어리석은 자는 일시적인 분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잘 다스리면서 자신을 분노에 휩쓸리지 않게 한다.
분노할 때 사람은 엔돌핀이 쏫구치면서, 스스로 일시적인 흥분의 상태에 들어간다.
쉽게 분을 내거나, 부정적인 것을 쫓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실제로는 부정적 상황이 심각한 상태가 아닌데도, 스스로 부정적 상황을 찾아다니며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부정적인 것에 중독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면서,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것처럼 울분을 토해내지만, 정작 심각한 부정적인 상황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심각성은, 자신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속이는데 있다.
이들은,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여야한다고 하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정죄를 하지만, 이들은 정작 구약에 머물면서 신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부정적 상황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구약에서와 같은 율법의 저주가 아니라, 신약에서 제시되는 복음뿐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지혜롭게도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신하들과 의논한다.
아하수에로 왕은 구약에서의 정죄에 묶여있지 않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복음적인 해결책을 찾는 지혜를 보여주고있다.
하나님도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분노하셨지만,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가죽 옷을 입히셨다.
율법이 벗은 아담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벗은 아담에게 옷을 해 입히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와스디를 아담과 이스라엘에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노하시기를 즐겨하시는 분도 아니시며, 문제가 생겼을 때 상황을 외면하시거나 포기하시기 보다는 더 나은 상황을 위하여 일을 진행하신다.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사랑의 대상이 된 돌감람나무로서의 이방인)
와스디의 불순종을 계기로 에스더가 기회를 얻은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계시로 이방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 연상된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이나 가나안에서의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나 와스디가 버림을 받은 참감람나무 가지라면, 대신 택함을 받은 에스더는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것은, 참감람나무의 수액을 공급받을 가지와 같이, 자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함이다.
왕후가 된다는 것은, 나무에 접붙인 가지와 같이, 영광의 수액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속성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야만 하는 구조로 지음을 받았다.
사랑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묶어주는 띠로서, 공동체 모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사랑하는 이들과 공유 할 때 기뻐하시듯이, 인간도 자신의 풍성함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할 때 기쁠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를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영광을 같이 누릴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풍요를, 사랑하는 이와 같이 누리는 가운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를 사람과 같이 누리길 원하셔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면서도,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가지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사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아담의 범죄는 사랑해야할 대상의 상실이라는, 하나님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에서는,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다.
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6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추방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
주전 597년 잡혀간 여고냐, 즉 여호야긴이 잡혀간 시기는 에스더보다 100여년이 앞선다.
아마 모르드개의 선조가 잡혀갔으리라 생각된다.
아담이 비록 에덴에서 범죄함으로 인하여 에덴 밖으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간섭하심은 계속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르드개 일가의 바벨론 포수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추방이었지만,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섭리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순간 순간 개인의 운명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비참 할 수도 있겠지만, 타락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기구한 운명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수산에서의 경험은,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포로생활을 하고있지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계속되고있음을 보여주는 경험이다.
비록 현실이 바벨론이나 바사와 같이 희망이 없어보이는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결코 구속의 희망을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간섭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적으로 이해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여서는 안된다.
8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
9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
(택함 받은 자의 수동성)
택함받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전에 J목사는 종종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고 강조하였지만,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지, 결코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다.
그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있어서, 성적인 부도덕함에 최고가 되어있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의 선택과 욕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장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응답하여야한다.
10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11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지를 알고자 하였더라
(자신을 오픈하는 것의 위험성)
수산에서의 유다인들은, 아직 바사와 메데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는 가운데, 긴장감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같은 류의 사람이 아니어서 자신을 숨길 수도 있겠지만, 성도들은 사회에서 종종 자신에 관하여 솔직하게 말을 할 때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성은 솔직하여야하지만, 솔직함과 진실이 때때로 불협화음을 야기 할 때도 있다.
자신에 대하여 오픈하는 것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오픈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되지 못한 공동체에서 오픈하면서 말을 할 경우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두 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며
13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는 그가 구하는 것을 다 주어 후궁에서 왕궁으로 가지고 가게 하고
14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그를 기뻐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
(성결의 필요성)
인간인 왕에게 나아갈 때도 정결함과 오랜 시간의 준비가 필요한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무 준비하는 것도 없이 무성의하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에게는 준비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없다.
그렇다고 외형마져도 무책임하고, 불성실해서는 않된다.
비록 그리스도의 깨끗케하심을 입어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자신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정결하게 가꾸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
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16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 행복하다.
사단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불행하다.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이 시대가 불행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서로 사랑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왕은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기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어려운 시대적 상황은 좀처럼 사랑을 실천 할 수 있는 환경을 쉽게 제공하지 않는다.
결혼 인구의 감소와 저출산율은 그만큼 사랑의 대상이 줄어든다는 외적인 증거다.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며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사랑하지 못할 때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는 징조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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