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5. 00:41

사도행전 2장 37-47절 말씀 묵상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복음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죄에 대하여 분명한 선포를 하였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마치 보험을 드는 것에 비유하면서 권하는데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복음은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야한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의 설교들은 죄에 대한 선포가 없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할 수가 없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죄사함의 결과로 성령을 받지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다.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신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랑 할 수가 없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먼 데 사람, 즉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알고있었으며 이를 직접 경험하게된다. (행 8:14)


사도행전은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된 시초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있다.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유대인들에게 패역한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자칫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실질적 상태를 직언함으로서, 베드로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상황과 확실하게 다르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서 담대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담대함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도 베드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베드로의 변화는 가장 놀라운 표적과 기사 가운데 하나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도 아니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근거로서 타락한 세대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한 날에 삼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힘든 출애굽의 과정을 겪었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였지만, 베드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아가고있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교회라는 실질적 공동체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교회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증거들이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정경으로서의 성경이 갖추어진 이후에는 더 이상의 사도의 역할이 필요없으며, 사도들의 역할이 끝났기에 기사와 표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사와 표적은 말씀이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들에게 권위를 입혀주기 위함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신사도운동은 성경말씀에 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면서 성경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고있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거짓 영의 역사도 같이 일어나고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영적 분별력이 요구된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현재도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일도 일종의 기사와 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이와같은 기사와 표적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현재는 사도의 시대가 아니지만 이들의 행함을 본받아 지혜롭게 행할 필요가 있다.


이단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모든 재산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바치기를 강요하지만 이러한 강요는 분명 성격상 신사도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시대는 아직 교회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성전에서 모였지만 교회와 성전을 혼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용어를 붙이면 거룩함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오늘날 교회 건물을 지으면서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삵군이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들은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있다.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 실질적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의 근심이 된 한국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사랑이 식어진 한국교회의 상황은 단지 교회의 상황이기 이전에 이 세대가 얼마나 패역한 세대인가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세균의 내성이 강하지면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여야 하듯이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를 인식할 때에는 교회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 하여야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전혀 방어능력을 가추지 못한 무력함을 보여주면서 허무하게 무너져가고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되고 숙련된 목회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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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3. 21:31

사도행전 2장 14~36절 말씀 묵상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가지로 부족한 모습을 보였어도 이번 설교를 통하여 얼마나 베드로가 성숙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성격대로 사용하시지만 이번 베드로의 설교는 단지 성격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은 사도로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에 대한 소명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증언은 단지 베드로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인한 성령의 사역이다.


비록 부족한 성격이어도 수동적인 성격보다는 능동적이 성격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있음을 본다.


인간은 누구나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는 과정일 뿐이다.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해나 잘못된 이해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


신학자들의 변증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논술 방식이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육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요엘 예언의 성취를 말한다.


말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허락된 은혜의 시대이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자들이기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인하여 마음을 돌이키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찔림은 있을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증거되었듯이 타락한 이들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하여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여야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은 마음에 찔림을 받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믿음은 증거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능과 표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은혜가 인하여야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죽인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을 분명히 말하고있다.


유대인을 변호하는 톰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이 로마이며, 예수는 로마로 대변되는 세상 권력을 향하여 어떻게 희생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왜곡시키고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의 손을 빌려 그리스도를 죽였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은 에덴에서 약속된 영원한 안식을 근거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영원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으신 것이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 안에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는 행위 언약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부활은 행위 언약에 대한 공로적 축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베드로는 다윗의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8)”를 인용함으로서 다윗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것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순종의 성취에 따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선물이며,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을 통하여 증거되고있다.


사도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는 것이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사역을 충족시키심으로 안식을 성취하셨기에 성령의 창조 사역이 이 땅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하시는 통로이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예비하였음을 증거하고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통하여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보았다.


인생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패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성공을 위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패배한 자들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다.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단이 행동하는 근거와 정당성을 없애는 것으로서 사단의 패배를 선언 하는 것이다.


사단은 패배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사단을 소멸케하실 것이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못박은 이들이 이스라엘인 것은 아담의 죄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좀비와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한다.


현대 사회는 마치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사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상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사단의 종노릇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세상에서의 불행은 단지 불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


예수를 증거하는 베드로와 달리 현대 신학은 기독론보다도 신론 중심으로 변화되고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윤리와 도덕이 자리잡아 간다.


현대인이라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지는 않다.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신론 중심적 교회론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이처럼 현대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거나 변질되고있는 것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단지 이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내내 있어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못박는 이들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에서 바리세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듯이 이 시대 교회에서는 목회자, 신학자,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있다.


겉으로 평온해보이는 이 시대에 교인수의 급격한 감소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느때보다도 더욱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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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 23:54

사도행전 2장 1~13절 말씀 묵상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과 안식)


오순절은 언약, 즉 행위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오순절은 안식의 성취로서, 유대인들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지만,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참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율법에서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인 그리스도의 안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안식을 위한 요구 조건으로서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이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되신 것은 안식을 위해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처음 아담은 범죄 후에 에덴에서 쫒겨남으로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죽음을 경험하였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의 한시적 요구의 충족에 대한 결과로서의 안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부활은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의 성취에 대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된 안식을 기초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한시적 검증의 시간이 종결된 뒤에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완성시키셨기에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오순절은 부활과 더불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안식이 오순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창조 사역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면서 성령의 새창조를 의미한다.


성형의 창조 사역은 사도행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의 다음 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시킬 수가 있으며, 50일째 되는 날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기쁨의 절기로서 맥추절,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이 날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성령강림절이다.


오순절의 의미가 약화된 장로교에서의 오순절은 단지 맥추절이며, 맥추감사헌금을 내는 날로만 인식되고있는 것이 안타깝기만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대비 관계 가운데 볼 때 처음 아담이 실패한 통치 명령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안식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칼빈주의로 표현되는 카이퍼의 후예들은 에덴에서의 문화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보고있지 않기에 문화 명령을 성도의 과제로 보고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으로 대변되는 문화칼빈주의의 세계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이들이 권하는 문화변혁운동은 그리스도의 안식과 연결시킬 수 없으며,   성령의 새 창조 사역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수용하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일뿐, 새관점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실체로 보지는 않는다.


참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안식과 더불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든 나라들 가운데로 확장 되어야함을 알리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문화변혁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성령의 창조 사역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이땅에서 실체로서 구체화되고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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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 23:20

사도행전 1장 12~26절 말씀묵상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제자들이 아직 유대 율법을 준수하며 생활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아직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안식을 위한 한시적인 명령이 재연된 것으로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기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가 일주일의 첫 날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일상의 모든 삶이 그리스가 성취하신 안식을 기반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오직 기도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모임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를 뽑는 과정이었으면서 동시에 오순절에 임하실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서 모였지만 모인 이들의 숫자가 백 이십명이나 되었던 것으로보아 다락방 모임이 좀 더 규모가 커진 야외모임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맛디아를 뽑으면서 오순절을 준비하는 제자들의 모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시내산에서의 모임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시킨다.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과 시내산에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심이 유비적으로 재연된 것이다.


마치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홍해와 시내산 강림은 실체로서의 믈세례와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한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렸지만,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보다는 간절한 사모함과 기대감 가운데 오직 기도로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렸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심 하나님과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도행전의 과정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연되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이 땅에 실체적으로 임하게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모형이었으며 실체는 아니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과 더불어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는 것이 개혁주의와 다른 점이다.


새관점은 유대 중심적 신학이기에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에서 보고있다.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제자들의 모임과 더불어 시작된 무리들의 모임은 힘써서 기도한 이후에 진행되었다.


자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순종의 행위인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심겨지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아담에 의해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다시 선포되면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정의와 섭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정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인간이 본질적 죄인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불의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완악함과 본질적 죄성을 고려할 때 허용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도록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도 과거의 상처에 묶이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 가운데 임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되는 것이 복된 자의 길일 것이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이기심에 묶임바되어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경험하면서도 사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적 환경들을 자신의 욕심에 이용할 때 어느 누구나 가룟 유다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도는 과거에 집착하는 피해의식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앞으로 행할 것에 대한 준비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적 상처와 불행했던 과거들을 앞으로의 진보를 위한 계기로 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숫자의 중요성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창조 과정으로서의 7일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로서의 12와 충만한 숫자로서의 40등 숫자의 의미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숫자들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도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12사도를 필요로하였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각각의 직무가 있었듯이 12사도도 각각의 직무가 있었다.


12사도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구현시키고있다.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자이다.


가룟 유다는 죄인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와 손을 잡고서 예수를 죽인 자들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이었다.


가룟 유다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된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감당했어야할 직분을 다른 민족들이 대신하여 감당하게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를 다시 세우는 것은 말씀을 응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도 종종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행하셨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말씀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유혹을 거부하면서,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신자의 삶이 말씀에 반응하여 하는 것이다.


멸망할 자들도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유혹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팔아먹는 자들도 유혹받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있는 것이다.


욕심이하는 유혹에 이끌려 이스라엘 성전에서 장사하였던 이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신의 욕심이 성취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요한의 세례에서 시작된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예수의 사역이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사역이 시작되었듯이 사도들의 사역도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은 성령의 임하심과 더불어 시작될 성령과 함께하는 사도들의 역사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신자의 신앙생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가운데 행해져야 할 것이다.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는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부활하심과 예수의 40일동안의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들은 자들 이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에게는 사도라는 용어를 붙이면 안된다.


사도행전 29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이어가는 사도들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가끔 이상한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자신 스스로를 사도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된다.


심지어는 베드로를 목사라고 부르고 자신을 사도라고하면서 목사와 사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단지 스스로 높아지면서 예수를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


성도는 비록 사도는 아니지만 성령의 쓰임받는 도구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들이다.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제비뽑기는 도박이 아니라 인간적인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는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비뽑기는 도박에 불과하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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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7. 12. 31. 19:56

사도행전 1장 1~11절 말씀 묵상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의 본을 보여준다.


어떠한 관계성에서든지 복음은 관계성을 통해서 전파된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관계성의 형상을 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파괴를 경험하지만 복음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어진 공동체의 회복을 경험하게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궁극적으로 깨어진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사도들의 행적을 통하여 보여주고있다.


문화칼빈주의에서는 문화나 사회변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촉구하지만 사도들이 보여준 행적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즉 대위임령을 근거로하고있음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행적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공동체의 회복이다.


공동체의 회복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전하였던 복음과 달리 과거 한국교회의 국가 조찬기도회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권력에 아부하면서 커졌는지를 보여주고있으며, 한국 교회가 왜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과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이후의 사십 일동안의 행적은 이 땅에 시작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가나안을 준비하는 40년의 광야 생활이 불순종으로 인한 징계의 시간이었는데 반하여 부뢀하심과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40일 간의 행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시는 시간이었다.


40일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던 기간이었으며, 기다림의  시간이며,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충족된  시간이었으며 또한 완성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십 일간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족된 완전한 시간이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기까지 참복음에 대하여 깨닫지를 못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사도들이 알고있었던 예수는 단지 인간적인 차원의 가르침뿐이었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야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게되었다.


사복음서만을 강조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와 바울을 대립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복음을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한다.


이들은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새관점은 유대교의 틀에다 복음을 짜맞추어 넣었기에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제자들은 예수께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인지를 물어보았듯이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오직 유대교의 회복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하고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보는 예수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보는 복음은 비록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만 그 안에 참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은 홍해라는 물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사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육적인 세례는 어디까지나 모형과 그림자로서 실체를 예비하고있다.


성령은 창조 사역자로서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노아 홍수의 물을 바람으로 말리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홍해를 건너게하셨으며,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게하셨고, 솔로몬 성전을 구름으로 덮으셨으며, 예수님의 세례에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이제 사도들에게도 임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공식적으로 세우신다.


첫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같이 성령의 창조 사역은 점진적이었으며, 이러한 사역들은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시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였다.


성령 세례는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하고도 진정한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3년간의 직접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음으로해서 깨달음의 한계를 노출하였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신학교에서의 훈련 과정을 이수하면서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이는, 새관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참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대답하셔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서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되면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되었고 더 이상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참된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도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민족적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제한되어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은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갈릴리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승천을 보았지만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


그리스도의 승천 당시에는 교회가 제한적이었지만 재림시에는 전 세계적인 교회의 확장으로 인해서 재림시 모든 성도가 알 수 있도록 인식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후 3:10)”


천사들이 흰 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났었듯이 마지막 때에는 천상의 영역upper-register과 지상의 영역lower-register이 서로 하나가되는 세상이 도래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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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017. 12. 29. 16:43

에베소서 6장 10-24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비된 삶의 모습과 더불어 이제는 전투 태세에 들어간 군인과 같이 어떻게 전투를 해야하는지, 전투 요령을 가르쳐주고있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시켜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관계성을 정립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타락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하였어도, 세상과는 회복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서, 세상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세상 권세자와 싸울 것을 명하고있다.

이는 자칫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전개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성도가 싸워야할 대상은 비록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지만, 인간은 육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병행하여야 한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치 닭에 품겨진 달걀과 같이 성도는 주 안에서, 주의 강한 힘으로 강성하여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도는 교회 생활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성숙되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성도의 안식처가 되어야하며, 영적인 공급처가 되어야한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성도는 주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가 쉽지가 않다.

성도가 주 안에서 강해져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취약점은, 교회가 이미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을 닮아 가고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타락하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교회의 타락은,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하는 군인들을 지원해주어야할 후방 기지들이 이미 적군에게 공략당하여 파괴되어있는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이는 사단의 세력이 교회 바깥보다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가운데 더 역사함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공략 당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아무 무장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단으로부터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이다.

자체 무장이 안되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사단과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없는 싸움은 혼자만의 싸움이기에 여지없이 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가 없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말고는 없다.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고나면,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자신을 과신함으로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명성교회의 사건은,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물질이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사단의 좀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둠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단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대신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욕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

씨름이라는 용어와 싸움이라는 용어에는 차이가 있다.

싸움은 상대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반면에, 씨름은 자신의 내부에, 혹은 자신에게 밀착되어있는 경우다.

씨름은 어찌보면 자신의 내면에서의 갈등이나, 같은 공동체의 일원과의 갈등일 수가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외부의 적이라면,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죄성의 이중 구조를 인정하고서 자신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씨름은 주로 욕심과 관계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이는 사단이 휘두르는 손잡이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욕심과 교만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단에게 패배하였듯이, 명성교회 세습 사건도 자신의 욕심과의 씨름에서 패배한 것으로서, 자신의 욕심을 사단에게 종속시켜버린 것이다.

명성 교회 사건은, 이들이 혈과 육이라는 욕심에서는 승리하였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는 패배한 것이다.


(직접 싸워야 할 당사자로서의 성도)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사단의 다양한 특성들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는 서로 구분하기보다는 한 존재의 다양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 존재 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공동체에 속하여 있으며, 공동체를 주관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식을 누리지만, 아직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 세상 주관자들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사단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단에게서 완전히 보호해주시기보다는,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하에 직접 사단을 대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는 전적인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장성한 어른과 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역경을 파헤쳐나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할 때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인격체로서의 아담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듯이, 성도의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보호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의 인격 안에서, 성도의 능동적 대처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한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악의 날은 인간이 사는 모든 날이 악한 날일 수도 있겠지만,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질수록 사단은 더욱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라는 무장을 해제시킨 후에, 그 자리에 사단의 방식을 주입시키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자 통신의 발달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려하기에, 인간의 내면의 악이 최대로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에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습들이, 지금 이시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현 시대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핵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는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할 것이다.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

성도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악한 날에 성도는 기도와 간구없이 상황들을 해체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상황의 악함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나가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있다.

상황을 해쳐나가기 위해서, 세상은 지식과 돈, 그리고 권력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세상은 자신들이 힘이있고 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부하고 힘있는 이들은 성도들이다.

성도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갖가지 방법과 다 갖추어져있는 셈이다.

성도에게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으며,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도의 싸움의 모습 가운데에는 삼위 하나님의 총체적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제공되고 있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이 악한 시대에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쇠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대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고통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교회를 기업으로 운영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사도들의 특징은 대부분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고난 가운데 수행하고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역경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바울이 이 시대에 생활을 하였더라면, 초대 교회시대보다도 이 시대가 더욱 힘든 시대임을 토로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유명한 목회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귀영화로 몰락하는 것을 보면, 바울도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일 것이다.

이 시대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만만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은 갇힌 자로서, 갇혀있지 않은 자를 위로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외적인 곤란에 처하여 있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어려워도 내면의 풍성함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힘든 이 시대를 풍요롭게 사는 방법은 물질이나 명예나 외적인 풍요를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말씀을 소유한 자로서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이다.


(나가는 말- 새관점)

이 시대에 싸워야할 대적 가운데 한 가지는 변질된 신학이다.

허리에 띠어야 할 진리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면 더 이상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단들도 문제이지만, 신학적 왜곡은 성도를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잡아주는 뼈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생물도 뼈대가 틀어지면 원래의 특성을 가질 수가 없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는데 가장 취약한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붕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마다 심각한 신학의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둘째치고, 알미니안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등을 거쳐 최근에는 새관점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있다.

새관점은 이머징미셔널처치(선교적 교회)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과 연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를 역사적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어야하지만,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를 거부한다.

새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속죄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함으로서 칭의 개념까지 바꾸어 버렸다.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변질 축소시켰으며,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바꿔 버렸다.

바울이 말하는 마귀의 궤계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마치 자신의 폭넓음과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세대적 사고릉 과시하려는 의도인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학문과 목회에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마치 개혁주의를 새관점으로 치장하는 것과 같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면서 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가는 말- 축귀 사역)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외치거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귀신이 들린 경우가 아니고는 자신의 내면의 욕심으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우에 축귀 사역으로 대응하게되면, 자신은 의로운데 자신은 단지 외부의 마귀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성도는 이전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하는데, 옛 사람과 마귀를 혼동하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며,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이들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작업은 축귀 사역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마귀에게 뒤집어 씌움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된다.

영적인 접근법은 종종 이원론적 사고를 가져오기에 매우 조심하여야하고, 분별력을 요구하게된다.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제로운 자신의 생활의 문제점으로 정신질환을 앓고있는데, 이를 축귀 사역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들 가운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42

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 묵상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사회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본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 땅에서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투영되기에, 가정과 교회에서의 성도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투영시키는 모습이 되어야한다.

이 땅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회복시킨,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성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주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순종하라는 뜻으로 볼 경우가 있다.

이는 권위자들, 즉 정치인과 상급자들의 비도덕적인 행태와 같이, 부모의 부적절한 행동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제한이 아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세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구속적 회복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순종을 부모와의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녀들의 순종은, 인간적인 방식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순종의 맥락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순종은 부모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순종은 창조 질서의 가장 기본되는 원리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질서를 회복시키셨다.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 에베소 성도들은 불순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순종의 새 사람을 입어야했으며, 부모로서, 자녀로서, 상전으로서, 종으로서의 각각의 위치에서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여야만 했다.

새로운 순종의 질서는, 하나로 통일되게 하시는,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는 십계명의 제5계명인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와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에덴에서는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에덴에서의 축복이 보장되었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조건으로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에서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에 대한 약속으로 제한적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조건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않다.

자녀에게 보장된 장수는 자연법의 맥락에서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법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은혜 아래에 있다고 자연법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으며, 율법이나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이끌어 가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시내산에서 주어진 제 5계명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구원과는 상관없을지라도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일반적인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세포조직도 지속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시키면, 변성이 일어나서 파괴가 되거나 암조직으로 변이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으며, 상황을 수용하는데에는 한계점들이 있다.

부모는 특히 자녀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문제를 유발하는 이들의 많은 경우가 부모와의 비정상적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옳바르지 못한 자녀 교육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가 된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지금은 종이나 노예 제도가 없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사회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에 종의 위치는 가정에 귀속되어있었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자식과 부모에 대한 권면에 이어서, 종에 대하여 권면을 하는 것은 상전과 종의 관계가 가정의 연장 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직장이 따로 있었다기보다는 가정과 직업이 혼합되어있었던 구조였다.

이 시대에 가정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직장이기에, 종에 대한 말씀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제한적 의미에서 직장인들의 직장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어느 정도는 종속되어 맡겨진 직책을 감당하여야한다.

바울에 종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직무 수행과 관계된 것이며, 또한 상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로 직무와 관계되어 직원을 대하는 방식에 관련되어있다.

바울이 앞에서 권면한 내용들이 가정의 영역이었다면, 이제 권면하는 내용은 직장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에서 적용되어야한다.

종은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인에게 귀속시킨 것이며, 직장은 자신의 극히 일부만 제한적으로 내어주는 것이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신분이 바뀌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여야 할 것이다.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음이라고 번역된 프쉬케(psuche,ψυχῆς)는 숨 쉬는 것으로 유지되는  영혼, 목숨, 생명을 뜻한다.

바울이 종들에게 권면하는 자세는, 외식하는 바리세인들과 같이 형식적으로 하지말고, 숨쉬는 것을 다하기까지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했다.

이들의 행함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이 행하였던 외식은 결코 목숨을 바치기까지는 아니었으며, 최소한도의 형식적인 것이었다.

행함에 있어서의 기준은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 사역이었으며, 이는 가장 완벽한 행하심이었으며, 하나님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지금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더 이상의 완전함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 할 수도 없고 알수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원리가 하나님의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의 심오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의 사랑의 연합을 담아두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에는, 남자가 아내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희생적 사랑이 요구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다는 뜻에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성육신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택한 자들과 연합하심으로서, 태초에 이미 성도에 대한 완전한 창조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 예표되어있었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인 사도들도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과 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순종으로서의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최선은 단지 생각으로서의 최선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같이 목숨을 바치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의 행위여야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들로,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부정직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구조로 되어있기에, 현실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죄악에서 자유할 수 없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 가운데 살고있는 것이다.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모든 결산은 주께서 하신다.

사람에게 하듯 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이기적 목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께 하듯이 하면 어떠한 위선과 가식,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다.

주께는 오직 진실된 행동만을 할 수 밖에 없기에,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을 진실되게 할 것을 권면한다.

종종 선한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을 듣게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값을 요구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값은 어떻게 지불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값을 치를 것인가?

주께서 주시는 것은 공로에 대한 값이 아니라 선물이다.

선물은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선물을 주시는 원리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에 대한 축복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은 순종에 대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가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려지는 것이어야한다,

주께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이란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던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던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종을 대하는 상전도, 자신의 주인의 행동 방식을 자신의 종에게 투영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인 상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에게 속한 종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며, 사단의 종인 상전은 사단의 속성을 투영시키듯이 자신의 종에게 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육신에 종속되어있는 이들에게 나타내어야만 한다.


(나가는 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등의 관계는 하나님의 권위 구조를 이 땅에서 투영시키고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의 문화는 권위 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였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 탈권위 구조에 안착되어있다,

반 세기 전에 한때 유행하였던 히피문화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권위와 권력과 전통을 거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있다.

이는 좁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넓게는 사회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에 혼란이 있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겪어온 부모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게되면서,  순종의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의 구조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면서, 또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부작용들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하고있다.

이는 국가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있다.

민주주의는 왕권에 대한 거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시작은 국민들의 불순종이 아니라 왕족들의 부패였다.

왕족들의 부패는 국민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에게 부여하셨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보다는 사단의 권세를 더 경험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변화되어야할 우선 순위는 권세자들이며, 부모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미 국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더 이상 국가의 개념에는 왕국kingdom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왕국kingdom이었으며,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왕국의 개념이다.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는 상전들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주인이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투영시킬 수가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왕국의 개념이 현실성이 없는 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체제에 있던지간에 이 땅에서는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한시적인 체체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으며, 누구나 다 하나님의 나라를 투영시키지 못하는 구조 가운데 살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삶 가운데 말씀을 온전하게 적용시키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41

에베소서 5장 22-33절 말씀 묵상


바울은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고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것에 관하여 논하면서, 바울은 이제 결혼에 담겨있는 비밀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하여 풀어내고있다.

바울이 정리하는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담겨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자들은 종종 이 구절을 이용하여 아내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세우려고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남편에게 종속시키는 것인데,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인해서 피차 복종하면서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내가 독단적으로 남편과 관계없이 스스로 결정하여, 독립적인 행동을 하기 보다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을 남편과의 긴밀한 관계성에 종속시키고서, 남편을 존중하면서 일을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마치 성도가 교회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성도가 언제나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것과 같이, 아내도 남편의 말을 듣고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종은 주인과 종과의 관계성에서 나온 종속의 개념보다는, 서로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독단적인 뜻대로 일방적으로 행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곧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이 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으며, 다윗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표하였다.

머리의 의미는 대표성과 출발점,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내가 자신을 남편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남편의 대표성과 권위를 인정하면서, 남편에게서 시작된 권위 구조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 더 이상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는 사단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조로서의 교회와 가정의 형성은,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이 사단의 세력만이 권세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밑으로부터의 회복이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불복종은 처음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와는 남편과 떨어져있었기에 사단이 틈을 탈 수가 있었다.

하와는 남편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기에,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내는 더 이상 하와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남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서,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말아야한다.

서로에 대한 복종은 공동체를 묶어주는 끈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는 완전한 복종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공동체의 회복이며, 이는 서로에 대한 복종의 끈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가정 공동체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서, 더 이상 사단이 틈을 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한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의 원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남자의 갈비뼈와 여자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된 인간과의 관계와 유사성이 많이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지으셨다.

형상과 갈비뼈는 존재 자체의 근본적 속성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라는 사랑의 원리가 더해져야 생명이 있듯이, 남편은 아내에 대한 희생적 사랑이 없이는 남편으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슬림 남자들이 아내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사랑의 원리가 결핍된 율법의 저주와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든 여자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완성되어야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기쁨인 것과 같이, 아내는 남편의 기쁨이어야한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은 성도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한다.

100% 깨끗하지 못하면,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으로는 100%는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100% 깨끗하여질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대표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새 사람을 입으려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야하며, 새롭게 시작되는 가정 공동체도 복종과 사랑의 관계로 흠없이 새롭게 시작되어야한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육적인 자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자존감이 밑바탕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는 사랑을 받아야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기를 사랑하여야만 한다.

아내는 남편과 한몸이기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서 가정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존재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바울은 창세기에 기록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를 인용하면서, 비밀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높으신 곳에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고, 이들과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남녀 간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과 맥락을 같이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남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 담겨진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아담이 타락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이미 내포되어있었던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혼인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가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교회와 한 몸이 된 것에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생각하여야한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유비analogy라고 할수있다.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부부사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유형적 교회가 부부의 관계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부가 함께 하는 것보다 교회 생활에 비중을 더 두는 것은 성경적 원리가 아니다.

부부는 이 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창조 원리와 결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그 형상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인간은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창조물에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을 투영할 능력이 없고,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형상을 피조물에 담아놓을 수 있으시며,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피조물을 사랑 할 수 있으신 것이다.

창세기 1-3장에는 인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흔히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마치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여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 되었음을 비밀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에 담겨있는 비밀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사랑을 완성하여가는 과정이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

이러한 사랑은 순종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요구였으며, 순종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은 성립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한다.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과 연합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결혼은 이러한 창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고있는 동거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어둠 가운데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거 문화의 문제점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의 관계성에 비추어 볼 때 동거 문화는 많은 문제점이 있으며, 동거문화가 일반화되는 곳에서 교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혼인을 통한 한몸이 되는 원리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가 연합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동거문화는 연합의 개념이 빠져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위한 이 세상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든다.

혼인은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것을 약속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에 대한 소유를 주장 할 수가 없다.

혼인은 남편의 희생적 사랑과 아내의 복종이 요구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에 대한 희생은 계산에 의한 것이며, 행동방식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이 우선이 된다.

서로 생각을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동거문화는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아가페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혼인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지만, 동거는 단지 육적인 에로스적 사랑만으로 연결되어있다.

혼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동거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사단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혼인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출발이지만, 동거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의 속성 자체를 변질시켜버린다.

동거하면서 진정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서구 사회의 동거 문화와 교회의 몰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40

에베소서 5장 15-21절 말씀 묵상


오늘 말씀은 마치 이민 선을 타고 이국 땅에 도착하는 배에서, 승무원들이 이민 자들에게 이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어떤 방식의 생활을 하여야하는지 설명해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떠한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지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있다.

이는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이루었어야 할 공동체에서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잠시 아담의 타락으로 잊혀졌던 것을 다시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아담은 원래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직책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서 마땅히 수행하여야 할 직책인 것이다.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께 시와 노래로 예배하고, 선지자로서는 악한 세대를 분별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왕으로서는 술취하여 사단의 지배를 받지 말고 자신을 통제하여 이 세상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도록 하여야한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지혜있는 자)

자신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는, 마치 운전자가 주변을 잘 살펴본 후에 차를  움직이는 것과 같이, 자세히 주변을 살펴본 후에,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해야한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실수를 한 사람은 바로 아담이었다.

그가 하와와 더불어 자세히 주의하여 상황을 파악했었다는 언급은 없다.

사단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도, 하와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사단스럽게 움직여도, 부패한 인간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하여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사단은 인간을 분명 파멸로 몰아가고있지만, 인간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있는지 전혀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지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세상적인 지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상황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볼 때에야 비로소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세상의 지혜는,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두 번째 아담의 후손인 신자는 그리스도께로 부터 오는 지혜로 상황을 판단하여야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아야만 가능한 것이며, 신자는 이를 근거로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혜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지식만으로, 인간적으로 분석하고서 판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혜는 오직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지혜없는 자)

지혜없는 자는 한마디로 거만한 자를 말한다.

거만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못한다.

거만한 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겸손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거만한 자는 책망과 교훈을 멸시하며, 도움을 받기를 거절한다.

지혜 없는 자는 지식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는 교만에서부터 오며,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모습이다.

아담의 지혜 없는 행동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우상 숭배로 재연되었으며, 이는 타락한 죄인들의 삶 가운데 보편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새 사람을 입어야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지만,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낌)

인간은 누구나 다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고있기에, 성도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주어진 기회는 하나님께서 잘 활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과 같이 상대방의 끊임없는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제한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과 같다.

시간이 종료되면 더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에, 성도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방탕함)

술 취함은 주어진 기회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다.

술 취함은 마치 땜에 담겨있는 물을 아무 용도도 없이 그냥 흘려 내려 보내는 것과 같다.

술이 들어가면, 엘돌핀과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면서, 몸 안에 축적된 에너지 밸브를 열어 이를 다 쏟아 버리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제한된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

어떤 이들에게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고, 어떤 이들에게는 비교적 적은 기회들이 주어진다.

이는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와 같이 결산을 요구하는 기회들이다.

술취함은 이러한 기회들을 쓸모없이 버리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되면, 이러한 기회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게 된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주께 찬양을 드렸다.

(시편 95편)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전적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찬양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랑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모가 자녀를 보고 기뻐할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를 즐거워하는 것 밖에 없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주께 찬양드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있어야하며, 이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거듭난 성도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면, 성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것이다.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해야하는 이유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일을 이루시기에, 성도는 모든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한다.

성도는 자신이 오해를 받는 일이 있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거나, 왕따를 당하였거나,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슬픔 일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이마저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일들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성도들의 가슴을 찢어 놓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여 극단적으로 좌절되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에,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을 수도 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경외함)

학생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더 이상 싸우지 못한다.

맏형이 있으면 동생들이 서로 싸울 수가 없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두려운 존재가 없으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어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셔서, 그리스도 안에 모인 존재들이며,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모인 이들이기에, 어느 누구도 서로에 대하여 부족함이나 부정적 모습 때문에 불평할 수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납하라는 말을 넘어서, 서로에게 자신을 복종시킬 것을 요구한다.

성도들 간의 복종은, 부부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동체의 특징이며,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서로 복종하시면서 이루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어진 모든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복종이 요구된다.

피치 복종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결속력이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특징이다.

아담은 타락 하면서 바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었고, 가인을 아벨을 죽임으로서 철저하게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었다.

바울은 거듭난 에베소 성도들에게, 앞으로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공동체는 서로 간에 피차 복종, 즉 서로를 서로에게 종속시키면서 강인한 결속력을 갖는 공동체를 이루어야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유형적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성도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38

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에베소 성도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언급하고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

어둠은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이 아니다.

어둠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어둠의 상황에서는 갈길을 알 수도 없고 주변 상황도 파악 할 수가 없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자녀라는 말보다는 어둠 자체를 인격과 동일시 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보는 불신자는 어둠의 희생자가 아니라 어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은 거듭난 성도를 빛 자체이면서 빛의 자녀라고 칭한다.

이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빛 자체로 봄으로서, 빛 가운데 거하는 빛의 주체인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과 동일시되고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은총,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전적인 선물이기에, 받는 이들의 모습이나 성품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종종 일반 은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선한 모습들을 인간의 인격 자체에 투영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사람들은 몇 가지 선한 것을 행함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의 성품이 착하고 선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선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선하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100% 죽어있고 부패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인간이, 자신이 무엇인가 누릴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 누린다는 생각은 전적인 착각이면서 교만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잘나서 혹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교만을 계속적으로 질책하신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로서 행동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공로적 댓가를 주장 할 수 없는 열매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맺는 마땅한 열매로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결과물들이다.

착하게 살았고, 의롭게 살았고,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공로적 사고방식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공로적 행위가 요구된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을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은혜 안에 머물고(staying) 있었지만,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은혜 안에 머물면서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진실되게 살아야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나온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한 무리수를 둔 유대주의적 사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완전한 것이기에 최종적 구원에 더 이상의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도의 잘못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행위 구원론으로서의 펠라기우스적 사고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성도는 마땅히 은혜의 열매를 맺어야하며, 그 열매를 가지고 어떠한 공로적 기대를 하거나, 댓가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한다는 것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분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하며, 과정 가운데 옳고 그른 것을 발견해 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이 모두 집중되어야만 가능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있기에 시험의 기준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다.

성도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분별해 나아가야 한다.

새 사람을 입은 성도는 옛 사람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시험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하와의 권고를 수용하였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시험하지 않고 뱀에게 시험을 당함으로서 타락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에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주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 사람을 입으면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약속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담과 같이 분별력이 없이 다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사단의 유혹에 걸려들면 사단이 흔들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기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하라)

책망expose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권고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였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였던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었으며, 이는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드러냄(책망함, expose)으로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만 해결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문제로 드러냄으로서, 그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같은 류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였으며, 보편적인 인간들이 행하는 모습들이다.

은밀한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빛을 피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원하는 것은, 우상이 옳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상이 어둠 가운데 있기에,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사람들의 속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밀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에베소 성도들이 옛 사람을 입었던 이전에 접했던 모습이었기에,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입장에서 권고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비록 성도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모습이 드러났던 것을 경험하였던 이들이지만, 아직 여전히 죽어있는 어둠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빛으로 비추시기에,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드러난 것들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음으로 빛 가운데 드러났던 것과 같이, 인간 모두는 결국 어둠 가운데 행한 모든 은밀한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남으로서, 죄악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될 것이다.

대부분의 악을 행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둠 가운데 행한 것이 드러나지 않으리란 생각으로하지만, 이는 단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 법칙을 넘어서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다.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와 죽은자)

바울은 죽은 자와 잠자는 자를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어둠 가운데 계속 있게되지만, 잠자는 자는 빛이 비추이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성도는, 죽은 자가 아니라 잠자는 자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관리의 딸을 일으켜 세우셨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 9:24)

이 땅에서 육체가 잠자는 성도들은, 영으로는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한 빛 가운데 빛으로 존재하는 부활체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한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둠 가운데서의 옛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새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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