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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에스더 1장 1-22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시편 96편 말씀 묵상
- 2017.12.29 :: 시편 95편 말씀 묵상
- 2017.12.29 :: 시편 94편 말씀 묵상
- 2017.12.29 :: 시편 93편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20장 7-18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9장 14절- 20장 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9장 1-13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8장 13-23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8장 1-12절 말씀 묵상
에스더 1장 1-22절 말씀 묵상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2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수산 궁에서의 통치)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를 통해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해본다.
수산 궁은 바사와 메데 온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자가 있는 곳이었다.
수산 궁은 비록 페르시아의 겨울 별궁이 있었던 곳으로 비록 우상 숭배가 왕성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가 가득한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계신다.
우리는 종종 우상 숭배가 가득한 곳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을 때가 있고, 일본과 같이 우상 숭배가 가득한 나라는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진행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시키시고 계신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상을 통치하는 천상의 나라가 수산 궁을 통하여 투영되고있다.
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잡은 자에게 휘둘리고 있지만,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페르시아의 유대인들과 같은,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어나아가고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환경이 아마 바사 왕국에서 살아가는 유다 사람들과 같은 입장일 것이다.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5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6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7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8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3~8절은 아하수에로 왕의 광장함, 특히 전례없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아하수에로 왕의 부정적인 면 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비록 세상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창조주로서,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모든 생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의 보좌로서의모형을 보여주고 있다.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와스디의 거절과 왕의 진노)
마치 아담의 타락을 연상케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에덴을 맡기신 후에 하늘의 천사들에게 아담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불을 붙이면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셨다.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왕의 대책)
하나님께서 첫번째 날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 즉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로서의 땅은 긴밀한 상호 관계에 있었다.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제하는 회의가 열리는 곳이기도하다.
창세 전 택한 자에 대한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 간의 협약에 의한 것이며, 아담의 타락 후의 구속 사역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서 진행되고있는 것이다.
이는 왕후 와스디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열린 회의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열린 회의를 연상케해준다.
성경에서는 아담의 타락 후에 천상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언급이 없고, 이를 연상한다면 마치 아담이 타락 한 후에 대책 회의가 열린 것처럼 인식되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지만, 시간의 개념을 넘어설 때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17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므무간의 대답)
므무간의 조언은 현명하다고 옳은 것이다.
왕후 와스디의 문제는 그냥 지나갈 경우 더 크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되리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이를 잘 표현해준다.
아담의 불순종도 어찌보면 조그마한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결과는 인류 전체의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단이 주로 틈을 보는 이유는, 처음에는 조그마한 틈이어서 가볍게 여기고 무방비할 수 있기에 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그마한 틈은 나중에는 넓다란 통로가 될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과 왕후 와스디의 관계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와 유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므무간의 조언은 아담의 범죄가 왜 심각한 문제인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인간의 보편적인 역사 가운데서도 투영됨으로서, 사람들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깨닫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림절을 지키지만 그들은 부림절 가운데 내포되어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을 범하고있다.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22 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왕의 조서)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시행한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왕이신 하나님의 조서라고 할 수 있다.
조서의 내용은 일반 상식을 기초로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성경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거부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거나 해석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왕의 조서는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이방인에게는 양심이라는 자연법이 주어졌기에, 이 땅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방법이 없다.
피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면서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왕의 조서는 선포되어야만 하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나가는 말)
앞에서의 비유는 인물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되며, 다만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관련성만 생각해보아야한다.
만약에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과 아담 사단등을 아하수에로, 에스더 모르드게 와스디, 하만에게까지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에스더를 중보자로서의 예수님과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관계성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만, 교훈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페르시아에서의 생활은, 유대인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깊숙한 곳에서의 생활일 것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일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2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지만,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페르시아 제국의 도래는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가운데 있는 시기였다.
이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다 사람들과는 달리 페르시아 지역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들의 신분까지도 숨겨야만 했다.
에스더에서의 기록은 이러한 흑암의 한 가운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도 그냥 흘려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숙히 개입하셔서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광활한 세상에서 하나님과는 관계없어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심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함께 하셨으며, 아프리카 오지나 남미등 가장 먼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려고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와 계획의 극히 일부도 알지 못할 뿐이다.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미 창세 전에 택하셨고, 구원을 계획하시면서, 섭리 가운데 총체적으로 이 땅의 역사와 상황들을 주관하시면서, 현재의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종종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얼굴을 가리시고,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때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의 한계로 인한 좌절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계시지만,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면서 참고 기다리실 뿐이다.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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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6편 말씀 묵상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편 96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언약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부르는 찬송은 마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이 연상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라고 하면서 주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다윗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데 비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해주실 이스라엘만의 왕으로 제한하여 찬양한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가 아니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찬양하면서, 찬양해야할 사람들에 이방인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언약궤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두 다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참이스라엘이며, 참된 예루살렘인 교회의 성도들이 찬양을 하여야 할 이유가 된다.
다윗의 찬양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찬양이며, 함께 하심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다.
다윗은 이방 신들을 물리치신 하나님을 인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옳고 그름을 심판 하시는 분이심에 대하여 찬양한다.
다윗은 자신이 진리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옳음을 인정하셨다는 생각에서 더욱 감사드리며 찬양할 수 있었다.
다윗의 찬양은 하나님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승리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구체화되고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4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하여 자신들의 신상이 목이 잘리고 나뒹구는 일들을 경험하였다.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려다가 소 달구지에 실렸던 궤로 인한 웃사의 죽음을 경험해야했다.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다윗은,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모든 만민들 가운데 계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블레셋의 신들과 같이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어떠한 우상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어떠한 신들도 감당 할 수 없는 능력과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결정체로서 성소에 계신 분이시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다윗의 찬양은,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가운데 드려져야 할 찬양이다.
신자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이론상의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삶 가운데서 경험되어지고, 많은 연단의 시간을 겪으면서, 위대하심을 고백하는 찬양이 되어져야한다.
성소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의 아름다운 에덴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며, 에덴에서의 과제를 능력으로 다 이루신 분으로서, 웃사와 같이 자기 방식으로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귀와 위엄이 있으신 분이시다.
다윗은 삶 전체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찬양을 드릴 수 있었다.
신자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이 되어야하며, 이 세상과의 싸움을 통해서, 진정 다윗과 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한다.
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능력과 지혜가 없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이미 전적으로 부패한 죽은 자이기에,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합당한 영광도 나올 수가 없다.
단 한가지 방법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신만이 진정한 예물이 될 수가 있다.
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두려워 떨어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피난처가 될 뿐이다,
10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그동안 세계는 불안정하였고, 불공평하였으며, 악이 승리하였었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에 의하여 요동치던 세계가 굳건히 서게 될 것이며, 악의 세력에 의하여 더 이상 위태롭게 되지 않을 것이며, 불의가 승리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다윗이 찬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신자의 삶은 다윗과 같이,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눈에 보이는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창조되었으며, 하위 구조로서의 땅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의 기쁨은,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에서의 기쁨이며, 땅의 즐거움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가시와 엉겅퀴를 내야만 했던 이 피조 세계의 탄식이 즐거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성도들은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다윗과 같이 소망 가운데 찬양을 해야 할 것이다.
밭과 숲의 모든 나무들도 타락과 더불어 가시와 엉겅퀴로 훼손되었지만, 그 때가 오게되면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된 결실들을 보게 될 것이다.
13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아담에게 맡겨졌던 땅의 세계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었지만, 결국 땅은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한다.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아무 목적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생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공이라는 이름하에 최선을 다하지만, 이러한 인생은 나침판이 없이 목적을 상실한체 달려가는 인생이며, 결과적으로는 저주받은 땅에 묻힐 인생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고 고달프고 무의미해보이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그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쁨으로 맞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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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5편 말씀 묵상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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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양 받으실 구원의 반석)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다윗은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구원에 대하여 갈망을 하였다.
다윗의 구원에 대한 갈망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절망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윗 같은 사람이 애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하여 갈급해 한다면, 사람들은 속된말로 “배불러서 고민할게 없어서 그런 고민하냐”고 핀잔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위대함은 인간이 진정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남달리 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구원에 대한 갈급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애절하게 간구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가 죄에 대하여 증거를 해준 것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 하셨던 것은 그의 죄에 대한 인식과, 구원에 대한 갈급함과, 이로인한 애절한 기도였다.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다윗의 애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응답이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삶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도,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라고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윗는 왕의 체면을 무릅쓰고 언약궤가 돌아오는 날 미갈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다.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체면을 넘어서, 신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3, 크신 하나님을 찬양)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해야한다.
물론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종속시키고 죄에 얽매이게하는 우상들에 대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죄에 종노릇하였던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우상과 이들 기반으로한 악한 자들에 대한 승리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윗은 전사로서 항상 싸움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다.
다윗은 영적인 싸움에서 수 많은 패배의 쓴 맛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표면적인 육적인 싸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영적인 패배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게하는 통로가 되었다.
다윗의 즐거운 찬양은 궁극적으로 싸움에서의 승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었다.
신자들의 삶도, 다윗과 같이, 끝없는 실패와 좌절과 패배를 맛보는 삶이지만,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준다.
신자가, 다윗과 같이, 고통 가운데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 구원의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찬양 할 수 있는 즐거움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4-5, 창조주이신 전능자)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부요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부요는 신자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위해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운영된다.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실 수 있으시다.
하지만 우상 숭배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서 이를 누리는 부요한 삶을 살아야한다.
이러한 풍요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 필요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물질적 공급보다는 우리의 성숙에 필요한 고난을 먼저 허락 하실 수도 있다.
물질적 풍요는 자칫 우리의 육적인 죄성의 촉매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찬양은 왕으로서의 육적인 축복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패배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6-7, 목자의 음성에 즉각 반응해야 할 양)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다윗은 우리의 존재의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양이다.
양은 바로 앞만 보고 움직일 수 밖에 없기에 목자의 인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죽음과 직결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목자의 도움을 받아야만하는 양같은 존재이기에, 잘못된 목자를 선택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가 부를 때에 응답하고 따라가야 한다.
바로 응답하지 않고 생각을 해 보고 늦게 따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이미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믿어도 되지 않느냐도 말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놓친다면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8, 마음이 완악한 이들)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인생은 광야에서의 삶과 같다.
언제나 오늘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언제나 마음 문을 열고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삶이다.
성공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자녀교육에는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다.
한국 사람들의 지나친 교육열은 하나님께 대한 완악한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 자아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들도 광야에서 멸망한 이들과 같이 완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9,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시험하고 조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과학적으로 옳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충분히 경험하고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험하고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거부하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학문은 과학적이어야하며, 검증되어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접근은, 믿음보다는 이성과 논리에 의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만약에 하나님과 말씀을 검증해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믿는다면, 이는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라고 기록한다.
믿음은 보이는 현상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한다.
성경의 증거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성경의 증거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한다.
(10, 미혹된 마음)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미혹되었다는 것은,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마음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음이 잘못된 상태에서 아무리 옳은 길을 인도한다고 할지라도 잠시 후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뿐이다.
마치 잘못된 OS가 잘못된 연산을 하는 것과 같다.
미혹된 백성들은 40년 동안 길을 잃고서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 길을 가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잘못된 길을 가면서 방황하고 떠도는 인생들에게 참된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된 길임을 알고서 오늘 그의 말씀을 들을 때 더 이상 방황하거나 떠돌지 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옳바른 길을 가라고 말한다.
짧은 인생 방황하면서 오래살다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짧게 살더라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제대로 된 길을 걸어 갈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잘못된 상태 그대로 예수의 길을 걷는다면 문제만 일으킬 뿐이고, 교회로 하여금 욕을 먹게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가려면 거듭난 마음, 즉 잘못된 마음에서 벗어나서 주인되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한다.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하고 고백을 하면서 자고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인생은 죄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잘못된 연산을 하는 마음의 OS로 인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만 한다.
(11,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이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은 광야에서 증명되었고, 또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안식은 오직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회개와 구원의 반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묵상)
현대인은 인터넷의 지식을 쫓아가는 목자를 잃은 광야를 방황하는 인생들이다.
현대인들은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만, 오래 살아도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된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생명이 되고 길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결코 인간에게 길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 생명을 제시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과학문명의 발전에 온 힘을 다 쏟아부우며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참된 안식은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탄식이 전제되어야하지만 현대 과학은 죄에 대한 개념을 수용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은 오직 광야와 가나안에서 증명된 죄에 대한 인식과 탄식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멀리왔다.
현대의 문명에 익숙한 우리들은 죄의 문제와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스라엘이 교사로서 그리스도께 죄인을 인도하였듯이,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안식이 있을 수가 없다.
신자의 삶은, 다윗과 같이, 죄에 대한 통회하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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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4편 말씀 묵상
1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3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8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2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6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20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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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복수하시는 하나님)
복수는 개인의 감정적 차원에서의 복수가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한 공의의 차원의 복수를 말한다.
하나님은 선에 대하여 절대적 기준이신 분이시기에 손상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복수의 심판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선의 절대적 기준이시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없다.
다윗이 악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올바른 행동방식이다.
이 세상이 힘있는 자들만의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절망적이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힘있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으신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은 인격적인 관계하에서 일어난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근거가되기도 한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정당한 근거가 되신다.
출애굽도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이 있었고, 가인에 대한 처벌도 죽은 아벨의 땅에서의 핏소리로 호소함이 있었으며, 다윗은 삶의 여정 전반에 걸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였기에, 자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할 수가 있으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에는 다윗의 애절한 기도가 밑거름이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기도를 원하시고, 기도에 응답하는 가운데 역사하시고 간섭하신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
신자의 삶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과연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새벽기도회가 특징을 이루는 한국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하고 많은 잘못에 대한 회개가 없었기에 진정한 기도가 될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가운데 드려질 때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이 이루어진다.
삶의 변화가 수반된 진정한 기도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3-7,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악행)
이들이 자행하는 악행은 일반적인 악행이 아니라 주의 백성에 대한 악행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시험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도 인간과 분리되시고 인간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의 모든 깊은 것을 아셨듯이, 지금도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것이라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계신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속된 말로 “모르는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독약일 뿐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심판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없으시며,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도 없다.
다윗의 기도는 단순한 악행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라,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키고, 주의 공의를 침범하는 것에 대한 공의의 복수를 간청하는 기도다.
다윗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응답되었다.
(8-11, 다윗의 논증)
다윗은 창조자의 전능하심을 논리적으로 변증하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본능 가운데 존재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분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나타난 피조물과 자연법을 통해서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을 통해서도 이 땅에 정의를 실행하시며, 악인을 심판하시며, 의를 이루어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을 통하여 은혜를 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사람들로하여금 진리에 이르도록 하신다,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일 뿐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인생이 허무한데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인생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신자는 하나님과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초월적인 것이나 신비의 영역에서 찾기보다는, 삶의 일반적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기쁨을 누려야한다.
(12-13,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에게 있지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현재의 고통은 클지 모르지만, 이는 더 큰 환란을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의 밑거름이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악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연단과 교훈을 위한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 일차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북한 핵문제의 경우도, 결국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삶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결과적으로는 신자를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과정이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14-15, 하나님의 열심)
인간은 모두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환란과 어려움을 통한 연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지만 해결책이 있으며, 덮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 투성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다윗의 삶도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삶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다.
다윗 성이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육신의 목적하는 바가 결국에는 패망하게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예루살렘의 평안이 임해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정적 상황 가운데 살게 되어있다.
이것은 인간이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이러한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16-17, 구원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이는 멸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멸망에서 자유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을 멸망에서 구원해 낼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을 직면해야하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적 상황에 대해서 자유 할 수 있는 능력이나, 불평할 권리가 없다.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할 뿐이다.
(18-19, 위험에서 붙드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실족할 때 잡아주시고 근심할 때 위로가 되신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상황 가운데서 간섭 하셔서 실족하지 않게 인도하시는 것들을 경험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차도로 갈 때 잡아주는 부모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실족치 않게 보호하신다.
부모가 함께 하지 않고서 아이에게 평안을 기대할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가운데 평안과 위로를 경험한다.
아이가 보호받고 위로를 받는 것은 아이의 행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이의 신분에 근거한 것이다.
성도는 행함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로 택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이유 가운데 한 가지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간섭하심이 없다면, 인간은 모두 다 멸망의 길로 치달을 뿐이다.
(20-21, 행악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서 행악자를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행악자들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잠시 한시적으로 허용하시지만, 결국 심판대 앞에서 그들을 멸하신다.
(22-23,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이 되신다.
다윗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 경험하는 모든 핍박과 환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와 안식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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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3편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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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치하시는 권위)
다윗은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우주적 왕이시다.
다윗은 피조계의 안정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확립된다고 말한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간섭하심에 기인하기에, 다윗은 이로 인해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어버려두신다면 이 세상은 불안정해지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 혼란 가운데 들어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 인한 다스림을 받기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고 찬양과 감사들 드려야함이 마땅하다.
다스릴 수 없는 권위는 이미 권위가 아니다.
권위는 다스림, 즉 통치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윗은 이 세계의 안정이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땅에서의 최초의 다스림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진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다스림을 위해서 이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왕을 허락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의 부패에 대하여 염려하셨고, 경고도하셨다.
하나님의 염려와 경고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가 말해주고있다.
왕들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된 옷을 입었다.
옷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옷의 모양에 걸맞는 능력과 권한을 부여한다.
왕에게 부여된 권위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다.
권위가 상실되면 안식도 상실된다.
권위는 잘못 사용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권위자가 아닌 이들이 권위자의 옷을 입는 경우도 문제가 된다.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걸치는 가운도 권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만, 이는 목회자를 타락시키며 우상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구별된 제사장이 있었던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의 만인제사장의 개념에서 본다면, 강대상에서 목회자가 입는 가운의 성격은 성경적으로 규명되어야 될 것이다.
(2, 영원부터 계신 보좌)
주의 보좌는 다윗의 왕권과 직결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귀결된다.
다윗은 자신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계신 분이었음을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왕권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이 세상은 원래 왕권에 의하여 통치 되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왕들의 부패로 인하여 왕권을 거부하게 되었다.
다윗은 주변 이방인들의 위협을 목도하였으며, 이 땅에서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서의 왕권의 안정을 하나님의 보좌와 연계시킨다.
다윗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3, 다윗을 위협하는 세력들)
큰 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다윗은 사는 동안 항상 전사로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고 띠를 띠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다윗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을 위협했던 세력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이었다.
신자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여야하기에, 다윗의 고백과 찬양이 신자의 고백과 찬양이 되어야 한다.
북한 핵문제와 미국의 전쟁 위협이라는 큰 물결 안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축복을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악을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악을 일으키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만큼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도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악보다도 크신 하나님)
두려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공포가 사라지는 때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경우 뿐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 안에 귀속 시킴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의 위협으로 인해서 도망을 다니기도했다.
두려움은 다윗에게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였지만, 다윗은 삶의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안에 귀속 시킨다.
이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의 권세 안에서는 위협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 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 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악이 도전해 올 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였는데도 이 세상에서 악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심이 아니고, 신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간섭 하심이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5, 증거를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 하심과 섭리는 일반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구체화 시키심으로서 특별 은총을 위한 확실한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다윗의 경험은 하나님의 구체화된 증거들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자손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확증된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주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경험이었으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대한 소망이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게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에도,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속 언약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신자에게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경험하는 증거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증거들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묵상, 실종된 권위)
다윗이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참된 안식은 참된 권위자의 보호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자녀가 부모 아래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참된 안식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었기에, 참된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에서 안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참된 권위자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안식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특징은 권위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권위와 권력과 전통의 상실이다.
이 땅에서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종종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안식을 설명해준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는 민주주의보다는 왕국kingdom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왕국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왕권의 오용과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 땅에서는 왕이라는 개념이 적합하지 않아보인다.
결국 인간의 죄성과 부패로 말미암아 왕의 통치가 오용됨으로서, 사회 제도가 바뀌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 할 모형과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은 사람들이 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후로 발전된 민주주의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급속히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카이퍼는 이에 맞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반혁명당을 중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생각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자유 의지를 상실한 사단의 좀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목회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으며, 목화자라는 이름은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한국 교회가 몰락한 원인 한 가운데 목회자들의 부패와 몰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다윗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다운 평안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왕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 문명은 많이 발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권위가 사라짐으로 인한 안식의 실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문명이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된 안식을 누렸듯이, 신자는 참된 권세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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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장 7-18절 말씀 묵상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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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지쳐만 가는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지쳐만 가고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끝까지 시키시는 하나님께 항복한다.
자신이 당하는 조롱과 핍박을 체념 하듯이 받아들인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기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옳은 하나님의 일이라도 죄인의 정서로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차원에서 일을 하시지만, 사람은 감정의 차원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있기에 반어적으로 자신을 한탄하며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일을 감당하는데서 오는 괴리감이 예레미야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이중인격자, 혹은 위선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신자로하여금 일방적으로 명령하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하소연 할 수 있었다.
(9, 피할 수 없는 사역)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가 효과도 없는 것은 둘째치고, 핍박은 늘어가고 자신은 지쳐만 가는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도 기도 할 수 있기에 예레미야는 내면에서의 혼란과 내적인 갈등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듯이 표현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 것같으면서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잘 모르는 것으로 인한 답답함으로 인해서 더욱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예레미야가 성숙되어지고, 다듬어져가고 있었다.
비록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성도는 비록 듣는 이들이 없고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비록 헌신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성도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여야 할 것이다.
(10, 두려움에 처한 예레미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빗, 즉 “사방이 두려워함”으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자기한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레미야는 극도의 두려움과 고통에 빠져서 혼란스러워한다.
심지어 예레미아는 친한 벗에게서도 핍박을 당한다.
예레미야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다 없어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레미야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존재로서, 이 세상을 대적하면서 천상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다보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까운 이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에서 조차도 진리를 말함으로 인해서 오해를 사고, 급기야는 서로가 결별해야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도 진리를 공유하는 일이 쉽지만 않은 세상이다.
(11, 예레미야의 깨닫음)
예레미야는 매우 힘든 상황이지만, 자신의 대적들이 치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드리며 힘을 얻는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유다 백성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과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레미야에게 고통은 단지 자신의 희생에 대한 것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깨달았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핍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핍박과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어질 것을 미리 짐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 함으로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도 당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는 희망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반역에 의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더욱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예레미야가 반역자들에 관하여 하는 불평은, 자신의 희생에 대한 불평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인하여 희생을 당하시는 것보다는 그들을 무찌르시는 것이 낫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다.
(12, 인격적이신 하나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고서,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됨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쌍방 통행적인 인격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반복해서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예레미야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세상의 권위와는 달리 참된 권위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있는 비인격적인 모습은 전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 상호간에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3, 찬양으로 바뀐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는 자신을 가난한 자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세상에서 부자는 자신의 능력과 권력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세상에서 핍박받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하기에 천국을 소유하는 부자가 될 수 있다.
(14-18, 저주가 찬양으로)
예레미야는 또 다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한탄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이 기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예레미야의 반복되는 변덕과 감정은 예레미야가 지극히 변덕스러운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지극히 생각이 깊은 선지자라고도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깨달았으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았기에, 예레미야의 슬픔과 고통은 결국 하나님께서 당하실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다 백성의 반역은 단순히 반역한 이들의 멸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반역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이는 결국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어질 것이란 깨닫음 때문이 혼란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서대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마치 속이는 시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보고있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을 저주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후에 전개될 예레미야의 고백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인생의 본질적 죄악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상상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고통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보면서, 신자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임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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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9장 14절- 20장 6절 말씀 묵상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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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도벳과 성전의 긴밀성)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기에, 예레미야는 현장에서의 실증을 통해서, 그리고 또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반복하여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성전은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지막 보루로서, 이곳은 안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생각마져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재앙 선포를 통하여 무너진다.
성전에서의 경고는 최후의 보루까지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형적 관계에서 볼 때,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종말이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생명 나무의 길이 막혔음에 대하느선언이며,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구원의 길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의 후손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의 경직성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완고함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도벳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현장에서의 증언을 통한 경고하는 심판은, 유다 백성들에게 도벳의 현장을 통하여,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실증적 예증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인류 모두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패하고 잘못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도벳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의 정당한 이유를 보여주셨듯이, 역사적 이스라엘의 목이 곧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심으로서,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심으로서, 이러한 류의 일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증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도벳은 유다 백성들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도벳은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욕을 먹는 현장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부모의 욕심을 위해서 자녀들이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온갖 음란물이 판치는 인터넷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사람이 정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한 가운데서도 있을 수가 있다.
도벳은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공동체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유다 백성들과 같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끊임없이 사랑해야할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1-2, 바스훌의 박해)
예레미야의 도벳과 성전 뜰에서의 말씀 선포는 분명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총감독을 하고있는 성전에서 이제껏 없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스훌은 성전의 책임자였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했어야했는데, 결국 대중의 편에 서서 예레미야를 박해한 것이다,
성전의 총감독으로서의 제사장 정도되면, 도벳에서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도, 오히려 바른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핍박을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운 것이었다.
바스훌의 이와같은 잘못된 행동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반적 상황이 얼마나 부패되고 변질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직자가 세상과 타협하게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
성직자는 삶의 고달품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수동적으로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고, 많은 명예와 권력과 부로 인해서 적극적으로 죄에 참여 할 수도 있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어느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를 짓기 이전에 죄성을 가지고 있다.
성직은 많은 권력과 명예를 제공해주기에 인간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성직자는 자신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에 대한 도전이 올 때,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성전 총감독으로서의 바스훌과 같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부가 클수록 선택이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일들은 단지 성직자의 부패만이 원인이 아니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의 경우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3일만의 외침으로도 도시 전체가 회개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상이 가득했던 니느웨성도 회개를 하였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상식을 넘어선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속성이 있다.
아담은 타락하고서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피하려고했다.
가인은 범죄하고나서 에녹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바벨탑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세상적인 결속 매체인 혈연, 학연, 지연은 하나님을 배제한 육적인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선지자는 이러한 관계성으로 인해서 고향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으로부터 예언을 하지말라고 협박을 받았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이었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이었기에 더욱 거부를 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제사장 계통의 바스훌에게서 핍박을 받는다.
교회가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될 수 없다.
교회에서의 선후배 관계나, 세습에 의한 친인척과의 관계등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데 방해가 되며, 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지역 교회에서 온전하게 말씀을 선포했던 부교역자는, 그 다음날 바로 교회 사택에서 쫓겨나야만 했으며, 결국 열악한 환경에서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 해야 했던 경우를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
성직자나 신학자가 혈연 학연 지연을 넘어선다는 것은 밥줄하고도 연관되기에, 이를 넘어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성직자가, 복잡한 인간 관계성으로 인해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까지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어느 보수 교단의 경우에는, 재판은 돈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바스훌이, 대중의 편에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결정을 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전 못지않게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후배 신학자가 선배 신학자의 생각에 반하여 소신있게 말을 한다면, 그는 당연히 사회에서 매몰 될 것이다.
참된 신학자가 되려면, 이러한 핍박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의 특성상 많은 지역 교회들이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조그마한 나라에서 신학자들이 서로를 뻔히 알기에,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 시대 한국교회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바스훌과 같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3,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 마골밋사빗)
바스홀의 이름은 부흥과 확장의 개념이 들어있는 “증가하고있는 방백" 혹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패한 유다였지만 나름대로 희망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후에 마골밋사빗 즉 “두려움이 모든 것을 둘러싸서 도망 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름은 지어주는 것은, 지어주는 사람의 주권과 지배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바스훌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동물들에 대한 아담의 왕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종종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한다.
아브라함, 사라, 이스라엘, 바울등등…
이는 하나님의 주체가 되심을 선포하는 주권적 의미도 있다.
바스훌에서 마골밋사빗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앞으로 당하게 될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4, 정죄에서 용서로)
예레미야는 바스훌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이 인간 관계를 넘어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예레미야가 모든 인간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신다.
처음에는 핍박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기도했지만, 예레미야의 성숙된 모습에서 점진적으로 담대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도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 질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세상의 핍박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을 밟아 간다면, 하나님과의 동행 과정에서 더욱 더 큰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세상의 핍박보다도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 할 수 있었다.
신자는 모두다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실제적 과정을 밟아가야할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와 같이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를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정죄에 대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결되었기에, 정죄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죄는 정죄의 대상이었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죄는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다.
교회 공동체는 드러난 죄를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이 땅에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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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9장 1-13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6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9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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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례를 통한 말씀의 선포)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한 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유다 백성들을 이해시키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명하신 토기장이의 옹기를 통한 말씀 선포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의 이해력에 눈높이에 맞추신 하나님의 배려하심의 표현이다.
토기장이의 옹기는 이미 결과적으로 모양이 만들어진 상태이며, 결과물이 잘못되었을 경우 수정이 불가능하며 깨뜨려 폐기 할 수밖에 없기에 종종 인용이 되고있다.
옹기는 이스라엘의 결과적 상태로서 이스라엘이 폐기될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4, 더럽혀진 거룩한 곳)
유다 백성들이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물이다.
중립지대에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그 신에 대해서 알고서 그 신이 더 좋아서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는 가나안 땅이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되었지만 인간의 우상에 대한 집착력은 안보이는 것도 찾아 낼 정도로 집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해야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의 거룩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고있다는 것이다.
이 땅을 불결하게 만들며 우상 숭배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권이 아닌 다른 신의 지배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이었다.
유다 백성들이 거룩한 땅을 불결하게 만들고, 무죄한 어린 아이의 생명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피를 흘리게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사단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사단의 좀비에 불과했다.
(5.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인간의 욕심이,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릴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도덕과 윤리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려고 많은 말을 하지만, 이는 거대한 탐욕의 불길에 바가지 물을 뿌리는 꼴이다.
바알 산당에서 행하던 음란한 행위는 축복에 대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축복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큼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교회에서의 교인들의 축복에 대한 욕심도, 같은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복 대성회, 각종 부흥회, 입시를 위한 기도회 등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온 가증한 것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6, 죽임의 골짜기)
자식을 불살라 바알에게 바치면 축복을 받을 것 같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짓밟혔으며, 결국에는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셨듯이, 예루살렘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던 상황에서 열혈당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싼 내분과 예루살렘 주위를 둘러싼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상황 가운데 기근과 더불어 지옥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근과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벽에서 뛰어내린 자들은 뱃속에 금이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 로마군에 의해서 전부 배가 갈리면서 살육을 당했고, 성내에서는 내전에 의한 살육과 기근으로 모두가 최악의 비참함을 경험해야만했다.
다윗에 대한 축복과 더불어 시작된 거룩한 시온성인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7-8,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책)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계략도 효과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주검이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령하셨는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다스려야할 대상의 밥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 1:28의 생물과 창 3:1의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חַי chay)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뱀, 결국 사단의 존재가 포함되어있었는데, 유다 백성들은 결과적으로 사단의 밥이 되고만 것이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의 저주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무시하고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일반적으로 삶의 환경에서 접하게되는 많은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과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성이 파괴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방향성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등진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인간은 삶의 환경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한다.
문명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발전이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현대의 첨단 문명에서는 하나님이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하지만 첨단 문명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북한의 핵도 제거하실 수 있으시고, 주변의 부정적 상황도 충분히 제거해 주실 수 있지만,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현대 문명 사회의 결국이 어떠할지 심히 염려스럽기만하다.
(9, 심은데로 보응받는 재앙의 저주)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어야되는 상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는 이들이 도벳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바알에게 번제로 드렸던 사건에 비교하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만 할 짓을 한 댓가라고 할 수 있다.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가장 기본되는 틀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자식을 바알에게 번제로 바침으로서, 스스로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10-11,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함)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내산에서 언약에 대한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을 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직접 주시고, 친히 나라를 다스리셨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스림으로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육적인 인생의 한계이며,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하심에도, 모든 인간은 결국 깨뜨려야할 옹기밖에 안되는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사 한 가운데 있다,
이 세상은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운행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계신데 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는 삶의 방향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상황과 인간의 행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서 반드시 정리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지옥을, 힌놈의 골짜기와 동일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힌놈의 골짜기 도벳은 실제 있는 지옥이라는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유다 백성들은 일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바알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삶에서 배제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악에게 내어주는 행동을 하고있다.
현대인은 시대를 결산하는 마음 가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2-13, 우상 숭배의 최후)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최후는 자신을 대표하는 선조들이 시내산에서 맹세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맹세를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선조들의 맹세에 절대적으로 귀속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와의 관계 가운데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를 배제한 개인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공동체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 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인간의 속성 안에 담겨진 것이다.
부모와 자녀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이며, 친구는 사회 공동체의 근간이다.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재앙은 가나안 땅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구현이라는 목표가 실현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상 숭배의 죄악은 결과적으로 자녀와 친구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은, 더 이상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악행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생명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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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장 13-23절 말씀 묵상
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16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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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와 유다 백성의 서로에 대한 관계성에서 전개되고있다.
유다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과 유다 백성들에게 핍박받는 예레미야의 항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에 대한 공의의 차원에서 유다 백성들의 문제를 접근하셨다면,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항변을 한다.
(13-16,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예로 드시면서 이스라엘의 상식 밖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질책을 하신다.
상식은 자연법에 속하여 있는 정상적인 범주의 영역인데 반하여 비상식은 자연법을 벗어나는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유다 백성의 몰상식한 행동을, 이방인들에게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겠는가?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맘껏 축복 하실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경우, 그 죄성이 더욱 활성화되어,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노아 홍수 이전의 급속한 타락도,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적 풍요가 더욱 인간의 죄성을 자극하고 촉진시켜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급격하게 타락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죄인이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축복을 받게되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되며, 결과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선택하여 축복을 해 주실 경우, 인간의 타락된 본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오용하고, 이로 인하여 교만하여져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밖에 없다.
불신자로서 타락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닌 일반은총으로서의 자연법 하에서는, 자연법이라는 상식에 준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법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질 경우, 이들은 자연법을 무시하고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 은혜를 몰상식하게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견고한 법을 제어장치로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았는데, 하물며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교회가 거듭나지 않은 신자들로 넘쳐날 때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유다 백성들의 몰상식을 뛰어 넘을 수밖에 없다.
교회의 부패가 일반 상식을 넘어서서, 세상보다도 더욱 부패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죄성과 결합함으로서 인간의 죄악이 더욱 활성화되는 특수한 상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된 한국 교회가 사회의 걱정거리가 된 이유인 것이다.
수백억이라는 이월 적립금이 교인도 몰래 관리되고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선포될 수가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오늘날 한국 대형 교회들의 현실이다.
교회의 축복에 대한 강조와 급속한 부패는 거의 비례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대형교회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이러한 현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도가 아닌 자칭 교인들이 세상적인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들어올 때, 교회 성직자들은, 아무 위기 의식도 없이, 이들의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한국 교회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더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어려움을 핍박과 환란이라는 박해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 당하는 모습은 유다 백성들이 당하게될 비웃음과 같은 종류의 비웃음으로서, 핍박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치를 당하면서도 이를 세상의 핍박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히 고난과 수치는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길 원하시지만, 인간은 육체의 죄악에서 자유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제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 아니기에, 성도는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가야만 할 것이다.
(17, 재난의 날에 응답 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재난의 날에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유다 백성을 완전히 버리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재난의 날에 완전한 버림을 선택하셨지만,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완전한 버리심으로 인류의 죄악과 그에 따른 저주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다.
유다 백성들에 대한 저주는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었듯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모든 인류에 대한 언약적 심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죽음을 직접 담당하여야만 하기에, 재난 날에 이들의 기도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응답되지 않으며 영원한 죽음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 유다 백성들의 악행)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꾸미는 계략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싫어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하려는 계략이다.
진리는 죄인들의 악행을 고발하기에, 불의한 이들은 진리가 선포되는 것을 싫어 할 수 밖에 없다.
교회에서도 진리가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공동체가 떳떳하지 못한 일들로 인하여 마음에 찔림을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서 진리가 바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9-22, 예레미야의 탄원 기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기를 간청을 한다.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면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이전에는 죄 용서와 불쌍히 여김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갚는 것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또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유다 백성을 향한 극단적인 저주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자신은 정당한데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인간적이다.
예레미야의 생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예레미야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묵상)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언약에 근거하고있으며, 어디까지나 공적인 약속에 근거를 한다.
교회는 예레미야의 항변과 같이 개인적인 감정적 분노를 표출하는 곳이 아니며,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가 실현되는 곳이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육적인 목적과 욕심을 충족시키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입시를 앞둔 기도회의 모습은, 얼마나 교회에 세상적인 관점이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불의가 드러날 수 밖에 없지만, 교회 공동체는 인간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가 용서를 통해서 실현되는 곳이다.
교회의 성도들이라고하더라도, 바울이 고백하였던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온갖 부정적 상황으로 인하여 육신의 죄에 다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참된 자유가 실천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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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장 1-12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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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격체로서의 진흙)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는 성경에서 많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비유 가운데 한 가지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는 이사야서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라는 말씀은, 토기장이의 원래부터의 의도가 다른 용도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과정 가운데서의 실패로 인해서 토기장이의 1차적인 의도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진흙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아담의 범죄를 막지 못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진흙이 터진 상황은 오직 진흙만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진흙이 인격체라는데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신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책임이 수반되어야만 참된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유다 백성은, 비록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거의 사단의 좀비와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 대하여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격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기에, 인격체와 맺는 언약은 행위 언약 일 수밖에 없다.
은혜 언약은 일단 제대로된 인격적인 기능이 상실된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은 아담이 인격적인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나안이 에덴이 유형학적으로 재연된 곳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의 근거하에서는 유다 백성들을 재앙의 저주 직전까지도 끝까지 인격적으로 권면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시내산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사실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체로 대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비인격적으로 대하시겠다는 표현이기에, 이러한 적용은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인격적인 개념이다.
아브라함 언약과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은혜 언약인 것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을 이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결론으로 내려졌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이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이 비인격적인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의 본질은 은혜 언약에 속하여 있지만, 표면적인 속성은 행위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들은 모세의 시내산 언약이 이스라엘의 보존을 위한 것이지, 결코 불순종에 따른 심판과 저주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불순종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해서, 재앙을 내리시기 직전의 마지막까지도 인격적으로 이들이 돌이키고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대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는 조화가 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인격이라는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비록 구원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을지는 몰라도, 결코 잘못된 행위를 간과 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은 신자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새롭게 부여받은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새로운 인격체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비상식적 행동과 부도덕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책임을 잘못 이해한 결과물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악을 간과하지 않으셨듯이, 마찬가지로 인격을 새롭게 부여받은 신자들의 잘못된 죄악들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그냥 지나가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5-10, 하나님의 주권)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듯, 이스라엘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토기장이가 터진 진흙을 자신의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듯이, 세우셨던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것도 하나님의 좋으신 뜻대로 행하실 권리가 있으신 것이다.
애초부터 천지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구속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인격체로 창조하시기 위해서 값비싼 댓가를 치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적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행동방식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신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 인간을 받아들여야만 할 의무는 없다.
인간이 인격적 선택권이 있듯이 하나님도 인격적 선택권이 있으신 것이다.
비록 유다 백성이 이제껏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로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실 수가 있고, 유다 백성들이 악한 것을 행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주실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실 수가 있으신 것이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에 관한 예정론은 구원 받을 자에 대한 것이며, 여기에서 인격이라는 기본 권리가 배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차원보다도 높은 차원에 계시기에, 모든 부정적 상황도 결과적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다.
(11-12, 마지막까지 권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기 않으시고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기를 권면하시지만, 유다 백성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인간이 한 마디의 항변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시면서, 인격적으로 유다 백성들의 선택을 존중하시면서, 끝까지 노력하셨는데도 결국 유다 백성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한 마디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의 저주에 대하여 항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가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한 단면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하여 인류 가운데 심겨진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이기에, 오직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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